교육학/논제2013. 4. 2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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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페스탈로치의 생애와 활동

(1)생애

1746년 스위스 태생. 1771년 노이호프에 농민학교를 세웠다가 실패했다.[각주:1] 이후 스위스, 독일 등에서 학교를 세워 교육에 전념하다 만년에 노이호프로 다시 돌아와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의 사상은 루소의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나 칸트의 영향 등으로 자신의 교육적 실천에 맞게 변형해 활용했다.

 

(2)저서

①《은자(隱者)의 황혼 Abendstunde eines Einsiedlers》(1780) : 농민학교 운영에 실패한 후 쓴 교육선언

②《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 Lienhard und Gertrud》(1781~1787) : 가정교유그이 중요성을 역설한 교육소설. 악의 추방과 가난의 근절을 주제로 한 농촌소설.

③《인류발전에 있어서 자연의 운행에 대한 나의 탐구 Meine Nachforschungen über den Gang der Natur in der Entwicklung des Menschengeschlechts》(1797) :페스탈로치의 근본적인 철학적 인간학적 사상이 담기 저서

④《게르트루트는 어떻게 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Wie Gertrud ihre Kinder lehrt》(1801) : 교육방법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한 또한 만년의 저서
⑤ 《백조의 노래 Schwanengesang》(1826) : 교육이상으로서 전인적(全人的)·조화적 인간도야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이들 저서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신(神)에 대한 순수한 신앙이 그의 생활과 사상의 바탕이었음이 잘 나타나 있다.

⑥<<직관의 abc>>(1803) : 직관교육에 토대를 둔 아동교육법을 서술한 책이다.

 

2.페스탈로치의 사상적 견해

페스탈로치는 당시의 유럽 사회를 분석하여 계층간의 불평등에 대해서 조사하고 이를 해소하는 것은 교육만이 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중에게 바른 지성을 기르게 하면 민중은 스스로 그들의 힘과 지성을 높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1)교육에 관한 기본적 견해

페스탈로치는 기본적으로 루소의 입장을 수용했다. 교육은 일차적으로 아동 개개인에 초점을 두어야 하며, 정신 발달의 일반적 과정에 관한 지식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상적 학교는 학생의 개인적 특성과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특성이 다같이 올바르게 존중되어야 하는 그런 곳이어야 하며, 모범적인 본은 가정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교사는 아동의 자연적 성장을 도와주고 아동이 사회안에서 신분과 능력에 알맞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 주어야 한다.

(2)루소 교육원리의 수정

페스탈로치는 루소의 중요한 교육원리를 받아들였지만 루소가 교육은 아동 개개인의 직접적 경험의 결과라는 소극적 입장인 것과 달리// 칸트의 영향으로 교육이 아동의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루소는 교육을 아동 개인의 직접적 결과로 보는데 //페스탈로치는 교육이 아동의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는 적극적 입장을 취했다.

루소는 탁월한 능력을 둔 이상적 가정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페스탈로치는 평범한 농부의 가정도 훌륭한 교육의 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학교를 부정한 반면, //페스탈로치는 학교가 가정의 본을 따라 개조되면 가정에서 시작된 교육을 자연스럽게 이어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루소의 개인주의, 개인중심 교육과는 달리 //페스탈로치는 인류 전체의 발달과 개체로서의 인간의 발달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으며, 아동은 지적 정신적 성장의 자극을 위해 사회에 의존해야 된다고 보았다.

루소는 교사의 임무를 정원사에 비유했지만, //페스탈로치는 아동과 사회를 연결하고 아동을 성인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주어야 하는 존재로 보아 교사의 역할을 더 중시했으며 교사가 이를 위해 '교육의 대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3.교육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

(1)교육목적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조화롭게 발달시키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였다. 태어날때 가진 자연적 본성 중에서 세 가지 가치있는 것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지적 능력, 생산적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 선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도덕적 능력이다. 이는 머리(head), 손(hand), 가슴(heart)- 3H의 작용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지적교육, 노작교육, 도덕교육을 해야 된다고 보았다. 이런 교육을 통해 인간을 개혁하면 사회가 개혁된다고 보았다.

 

(2)교육내용

교육내용은 아동의 필요를 기준으로 결정되는데, 아동이 성인의 수준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명확한 관념이다. 이는 사물의 수, 형태, 이름 (수.형.어)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1. 수의 요소에 대한 수업(산수). 2. 형태의 요소에 관한 내용(그리기와 쓰기). 3. 이름과 그 이름에 담겨 있는 관념에 관한 수업(언어수업)이 필요하다.

 

(3)교육방법

①합자연의 원리

페스탈로치는 자연에 의한 교육, 자연법칙에 따르는 교육을 주장했다. 즉 인간교육도 안에서 밖으로, 천천히,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내적인 본성, 심리학적 발달순서에 따라 실시해야 한다.

②방법의 원리

모든 인간의 지적 도덕적 발달은 그 기초에서 출발하여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끝으로 이것을 통합해야 한다는 원리.(합자연의 원리와 뭐가 다른...거....지?) 도덕성의 발달단계는 무율, 타율, 자율 순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③자발성의 원리

학습자 내부의 잠재력을 밖으로 끌어내 계발시키는 원리이다. 아동의 능력을 내부로부터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므로 교육은 아동의 자기활동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교육의 초점을 '아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두고 발달단계에 맞게 자극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④직관의 원리

사물에 대한 인식은 사물들을 감각으로 인식하는 '막연한 감각인상'에서 출발하므로 모든 수업의 시작은 아동이 개별적인 사물과 직접 접촉하여 이를 구분하는 '직관교육'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직관의 기본요소는 수.형.어 이며 3요소가 모든 인식의 기초를 이룬다. 직관교수의 단계는 각 개체를 다른 개체와 구별하여 확실히 지각시키고, 현상과 윤곽을 파악해 형의 관념을 얻게 하고, 언어에 의해 명확히 표현하도록 한다. 이러한 인식론은 교육의 계열과 범위에 대한 교안을 제안했다.

 

⑤사회의 원리(생활공동체의 원리)

유아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가지게 되는 신뢰, 사랑, 감사, 의존등의 본능적 감정이 도덕생활의 기본이 된다고 보고 가정교육을 중시했다. 모자간의 애정,신뢰감의 확산을 시민으로서의 자질과 국민으로서의 자질이 고양됨과 동시에 인류복지의 공헌으로까지 확산된다고 보았다.  - 가정교육의 중시

⑥노작교육의 원리(기능적 능력의 계발)

'생활이 도야한다'라는 말을 했듯이 노작교육을 중시했다. 이는 인간의 기능적 능력(HAND)의 계발을 위해 필요한 것. - 노작교육의 중시 

⑦일반도야의 원리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해 직업이 필요하다. 직업은 인간으로 하여금 가정 외에 영역에서 활동하고 독립심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교육이 중시되어야 하며 인간교육의 바탕위에 직업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4.가정교육, 노작교육, 평등교육론

(1)가정교육의 중시

가정은 교육의 출발점이며, 중심이되는 곳을 가정에서의 어머니와 아이와의 관계로 보았다. 가정은 기초적인 3R교육과 함께 도덕교육의 터전이다. 또한 직관교육을 위한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2)노작교육(기술교육)

수.형.어에 대한 교육은 사회 생활을 위한 준비의 일부분일 뿐. 이러한 지식 훈련은 기술 훈련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노작교육은 경제적 수익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3)평등교육론

페스탈로치는 교육은 대중을 위한 자연적 권리이며, 천한 계층의 어린이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교육에 의해 발전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특정 신분이나 직업을 가진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닌 인간성의 실현을 교육의 목표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5.교육사상의 영향

①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은 나토로프의 사회적 이상주의 교육학설에 영향을 미쳤다.

②직관주의와 교수단계설의 기초가 되어 있는 심리주의적 경향은 이후 교육심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③객관주의 사상은 직관교수에 큰 영향을 미쳤다.

④교육의 목적을 인간의 개선에 있다고 보아 인도주의와 민주적 교육의 발전에 기여했다.

 

 

페스탈로치는 루소의 교육사상을 받아들였지만 거기에 적극적인 교육과 사회와의 조화를 더해 후대의 교육사상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위의 교육사상의 영향에 적힌 직관주의, 교수단계설, 교육의 목적(사회 기여, 평등, 인도주의 등등)을 중심으로 페스탈로치를 이해하면 더욱 좋을 듯. 인간에게는 3H가 있으며 이를 길러주기 위한 수형어의 교육. 또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작교육. 그리고 합자연, 방법, 자발성의 원리에 따른 아동의 상태에 맞는 교수단계설. 교육의 목적을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의 조화라는 사회의 원리를 통해 가정교육, 평등교육을 주장했다. 이러한 특징이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페스탈로치의 기본적인 바탕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 그것에서 모든 사상이 출발한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함. 그리고 이러한 페스탈로치의 사상이 신인문주의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음.

  1. 두산백과에 1771년으로 소개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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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교육학/논제2013. 4. 2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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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국가주의 교육(공교육제도)의 의미.

국가주의 교육이란 국가의 존속, 발전을 교육의 목적으로 하는 19세기 교육론으로 교육의 국가관리 또는 공교육제도를 발전시킨 사상이다. 근대국가 유지를 위해 국민의 통합과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민이 필요해지자 국민이 국가발전의 수단이 되었으며, 이는 공교육제도의 발달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어 교육대중화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의무교육을 중심으로 무상교육, 공교육, 장학제도의 발전을 가져왔다.

2.근대 공교육제도의 특성

(1) 교육의 국가주도

중세유럽까지 교육의 주도권은 교회의 몫이었으나 근대 공교육제도에서는 국가가 교육의 목적과 내용 방법을 결정한다.

 

(2)민족의식 교육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에 따라 국민형성에 의해 필요성이 제기된 근대공교육제도는 사회 구성원을 묶을 수 있는 동질적인 사회규범과 지식의 교육을 통해 근대 공교육제도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 결과 모국어, 모국역사중심의 애국교육이 자리잡게 되었다.

 

(3)보편적 의무교육

전근대교육은 성직자들과 귀족계급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근대 공교육제도에서는 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에 확대되어 모든 국민이 교육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3.국민교육체제의 대두배경

①종교개혁: 루터와 칼뱅곽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교육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영혼구원을 얻게하는 수단이므로 계급과 성에 관계없이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이러한 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무교육의 기반)

②산업혁명: 산업혁명으로 인해 많은 노동자의 필요가 생기자 기존의 도제제도로는 노동자 공급이 부족해졌다. 따라서 숙련 노동자의 양성을 위해 문자 해독과 기능교육 등 실제적 교육의 필요성이 나타났다. 이는 대량 교육 제도의 배경이 되었다.

③시민혁명의 평등사상: 계몽사상에 입각해 만민평등사상을 내세워 일어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평등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보편적 평등교육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능력주의가 사회조직의 기본원리가 되어 교육의 학력관리 기능도 강조되었다.

⑤근대민족국가의 수립(국가주의) : 작은 공국을 통합해 일어난 근대민족국가들은 새롭게 형성된 국가의 통일성 확보를 위해 국민성을 만드려고 했다. 이는 새로운 교육제도의 창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각국의 공교육 제도가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각국의 근대국민국가 수립 과정에 따라 특수성을 지니며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4.공교육제도의 등장( 프, 독, 미, 영)

①독일

독일은 1713년 프로이센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그 계몽군주)가 발표한 보통교육에 관한 교육령으로 프로이센 내에서의 초등학교 취학을 의무화했다.

이후 1763년 '일반지방학사통칙'은 프리드리히 2세가 공포한 것으로 독일의 대표적 초등교육 시행령인 동시에 세계 최초의 초등 교육령인데 5~14세 아동들에게 취학을 의무화했다.

의무교육과 함께 1694년 프로이센의 할레대학의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이 변화했다. 이때 강독이 전형적인 강의 형식으로 바뀌고 세미나가 등장했다. 1808년 훔볼트의 개혁을 비롯해 복선제가 정착되었고 1919년 바이마르 헌법에서 단선형 통일학교제가 도입된다.

 

②프랑스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교육개혁이 실시된다. 그 이전에도 생피에르, 샬롯테의 국가교육론 등 교육개혁이 주장되었다.

프랑스 대혁명기 프랑스 헌법에서는 (91년헌법.이떄 93년 95년 새롭게 개정되는 헌법하고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겟음) "모든 시민이 필요로 하는 교육기관에 대해서는 무상의 공교육제도를 조직한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나폴레옹의 제정에서는 중등학교 이상의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 이후 7월 왕정기인 1833년 기조법에 의해 초등교육법이 실시되었으며, 제3공화국기인 1881년 무상교육제가 확립되었고 바로 1882년 의무교육제가 확립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통일학교 운동이 일어나는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의 학제는 복선제였다. 초등교육은 하류층, 중등교육 이상은 상류계급.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이후 꽁파뇽협회를 결성해 통일학교 운동으로 단선형 학제가 수립되었다.

 

③미국

1776년 독립이후 펜실베니아주의 1834년 무상학교법에 을 시작으로 초등학교 제도가 운영되고 , 1852년 메사추세츠 주 교육령으로 의무취학을 법령화했다.

공립학교는 1821년 보스톤에서 공립중학교가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1827년 카터 교육령으로 500호 이상의 읍면에 중학교를 설치하도록 법령화했다.

 

④영국

산업혁명 이전의 영국에서는 자유주의 전통의 영향으로 국가의 교육통제에 부정적이며, 무관심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빈민교육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1870년 초등교육법이 만들어지고 1891년 초등무상화교육법, 1918년 피셔 교육법으로 무상교육제가 완전실현되었고, 1944년 교육법에 의해 단선형 확제가 확정되었다.

 

5.공교육의 목적과 기본 원리, 장점과 한계

(1)공교육의 목적

국가주의는 개인의 성장과 발달 이익보다, 국가사회의 발전에 역점을 두고 있다. 즉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해 지덕체로 훈련된 보통교육을 실시해 국민의 교육수준을 높이는것.

(2)기본원리

공교육의 출발에는 의무성과 무상성을 담고 있는데이는 공교육제도의 기본 원리이다.

 

(3)공교육제도의 장점

국민교육체제는 기존에 소수에게 제한되던 교육을 위무취학 규정으로 다수에게 확대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일부 사회세력에게 (EX:교회)좌우되지 않는 중립성과 평등성을 보장하는 국가관리에 의해 공공성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다.

(4)공교육제도의 한계

국가관리에 따른 획일성과 통제 가능성이 문제가 된다는 것. 또한 국가 이데올로기나 사회지배적 문화가 강제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또한 대중교육이 일반화됨에 따라 교수학습이 개별교육보단 집단교육의 원리가 적용되게 된점이나 개인의 신념,이념,필요등을 반영한 교육권, 학습권 등이 제한된다는 점이 대중교육의 진전에 따라 제기되어 온 문제들이다.

 

6.공교육제도와 교육사상가(피히테, 콩도르세, 호레이스만, 오웬)

(1)피히테

1806년 나폴레옹 프랑스의 침입으로 독일이 위기에 처한 이후 국가를 강조하여 국민교육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사상은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에서 잘 나타나 있다.'

피히테는 독일이 도덕적으로 부패해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고,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길은 오직 교육뿐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기존의 교육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교육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 국민적 성격의 형성을 돕는 교육을 의미한다.

피히테의 교육론은 개인과 국가의 조화와 근대 공교육제도의 정비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2)콩도르세

콩도르세는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스 혁명기 공교육의 일반조직에 관한 보고 및 법안을 발표해 프랑스 공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콩도르세는 자연주의, 경험론, 성선설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자유와 평등이 인간의 특권이며 교육이 그를 획득하는데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므로 누구나 균등하게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교육의 기회균등이 보장되기 위해 교육을 국가가 주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연주의적 입장으로 의무제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고 자연권으로서의 부모의 교육권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따라서 국가교육의 지나친 개입을 경계했고, 교육은 사실이나 수를 가르치는 적극적 수업에만 국한되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3)호레이스 만

호레이스만은 미국 메사추세츠 주 출신의 교육행정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주 교육위원회를 설치해 학교감독제도의 기초를 확립하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주립 사범학교를 세우고 교육강습회를 개최해 교사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호레이스 만은 교육개혁의 기본적 방향을 제시했는데 주요 내용으로는 종교교육은 도덕교육,도덕적 훈련으로 대체, 체벌금지, 교사양성을 위한 광범위한 준비를 할것, 교수활동은 교과서뿐만 아니라 언어법, 실물교수법을 이요할것, 흥미를 중시할것, 음악과 그림 자연과학을 추가해 교육계획을 중실히 할것이 있다.

또한 호레이스 만은 공립학교 운동을 전개했는데 공립학교를 미국의 정치,인종,종교,다원성을 극복하고 이를 통합시켜 줄 수 있는 장치이자 ㅏ회적 평등의 실현과 갈등해결을 위한 최적의 도구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추구한 공립학교는 유럽처럼 소수귀족층을 위한 것이 아닌 보편평등한 학교였다.

(4)오웬의 교육운동

오웬은 웨일즈의 한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렸을때부터 사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공장 경영자로 활약했다.  오웬은 마을주민들중 약4분의 1이 거지인 공장촌을 무상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의 개혁을 통해 성공적으로 꾸려 나가자 자신의 견해를 일련의 새로운 사회관: 성격 형성에 관한 에세이라는 소책자로 발간했다. 오웬은 이 에세이에서 인격은 개인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는 별도로 외부적 상황에 의해 형성되므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는 교육의 차이로 귀착된다 라고 했다.

따라서 성격형성학원, 유아학교, 공장법 제정 운동을 펼쳤다. 후에 미국으로 가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마을을 만들려 했으나 실패하고 거지가 되서 영국으로 돌아와 사회시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로버트 오웬의 이러한 사상은 사회적 교육사상이라고 알려진다. 즉 교육은 사회개혁의 수단이고 이를 통해 협동주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민교육체제의 내용이 좀 많은것 같긴 한데 일단은 국민교육 체제가 나오게 된 배경과 전개를 파악해두면 일단의 성격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 그런 후에 독일,프랑스,미국,영국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특수성을 중심으로 특성을 파악하면 일단은 틀은 잡힐 것 같다. 또한 국민교육체제는 지금도 교육의 바탕이 되는 체제이므로 이의 장점과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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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교육학/논제2013. 4. 2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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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연주의의 배경과 유형. [각주:1]

자연주의는 원래 타고난 것을 존중하자는 것으로 이러한 자연에는 아름다운 질서가 있으며, 이 질서에 따라 사는 것이 올바르고 행복하다는 주장.  이는 루소가 에밀에서 주장한 것으로 이후에 써머힐 학교를 지은 닐(20세기 신교육 운동)까지 내려오는 교육사조이다.

 

교육에서의 자연주의는 세가지 관점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교육원리는 자연의 법칙에서 도출되는 관점, 둘째 교육은 인간의 선한 본성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관점, 셋째 교육은 인간발달의 일반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점.  (셋째는 패스)

 

(첫째 관점은 대표적으로 코메니우스를 비롯한 감각적 실학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데 코메니우스는 객관적 자연주의, 경신적 자연주의를 주장했다. 그에 따른 원리로 합자연의 원리를 주장했는데, 이는 전체적인 관점으로 보아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므로 교육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진행해야 된다는 원리이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의 자연은 외계의 자연을 의미한다. 객관적 자연주의는 외부적 환경에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 )

 

둘째 관점인 교육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입장은 루소가 대표적으로 주장하는 입장이며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고 인위적인 제어를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어린이의 자발성에 따라 자유방임적으로 교육하려는 관점을 말한다. 교육학에서의 자연주의라고 하면 보통 이 관점을 이야기한다. 즉 18세기 자연주의에서의 자연은 주체인 간의 내적 생명으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

이 관점에서는 인간을 성선설적 입장에서 인간의 신의 손의 있을때는 선했으나 인간의 손으로 넘어오면서, 즉 교육받으면서 악해진다는 주장을 했다. 또한 인간은 천성, 개성을 갖고 태어나며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갖고 태어나므로 교육은 소극적일 것을 주장했다. 각각의 연령과 삶의 조건에는 나름의 완성과 성숙이 있다는 인간관을 제시했다.

따라서 교육이 어린이에 내재하는 자연성을 신뢰하고, 조장하며 개발하는 것이 임무라고 보았다. 자연의 질서 속에는 모두 평등하며, 인간의 보편적 권리실현을 위해 자연에 의한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관을 제시했다.

 

2.루소의 자연주의 교육론

(1)루소의 생애

루소는 스위스의 한 청교도 가정에서 사제공의 아들로 태어나 바로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망을 가지고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이었던 백과전서파와 교류를 하며 자신의 사상을 구축했다.

38세에 디종 아카데미의 논문 현상에 당선되고 이후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출시하게 된다.

음 근데 쓸떼없는 사족을 붙이자면 루소는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려고 노력는데 환경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과 가치관의 투영이 자연주의 교육관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봄. 불우한 어린 시절, 어머니라 부르던 바랑부인과의 육체관계, 아이들을 시설에 다 내다버린(?) 행동들을 보면 드는 생각. 

 

(2)루소의 사상적 토대

①낭만주의

:루소는 이성이 가치로운 인간의 능력임에 틀림없지만, 이성만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인데 이것은 이성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감정인 양심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루소는 이성만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에 대해 양심이라는 감정을 이성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자 하여 낭만주의를 토대로 하였다.

낭만주의는 감성의 가치를 주장하며, 감정 혹은 정서의 표현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형식과 관습에서 탈피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②자연주의

:루소는 자연스러운 것은 순수하고 선하다는 입장을 취해 자연주의의 토대 위에서있다. 인간은 조물주로부터 나올 때는 선하다고 보았으며,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된 자연성을 자유스럽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리적인 정치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제도적인 주인인 인간 자체의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③국가교육관에 대한 입장

루소는 초기 저작에서는 훌륭한 시민 양성을 위해 국가교육체제를 강조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국가는 개인의 자연적 욕망과 사회적 의무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국가를 의미하며, 이러한 이상국가에서만 교육이 제대로 교육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했으나 후기 저작에서는 그러한 이상적 국가는 없다고 생각했다.

 

 

(3)루소의 자연주의 교육론

 

①교육목적 : 루소는 개인의 자연적 본성보존과 사회적 제약으로 벗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본래의 선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연인의 육성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잠재성은 도덕적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데 도덕적 자유인이란 개인적 측면에서 볼때 자율적인 태도로 합리적 사고를 하고 합목적적인 행위를 하며 그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는 자기삶의 주재자이다.

 

②교육방법  - 루소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교육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자연에 의한 교육, 사물에 의한 교육, 인간에 의한 교육 루소는 자연에 의한 교육을 주장했으며 이외의 교육을 비자연적 교육이라 하여 비판했다. 즉 이러한 교육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성향과 발달단계를 무시하고 임의로 교육방법과 목적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 의한 교육, 사물에 의한 교육도 자연에 의한 교육에 의거해 필요하다. 세가지 교육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자연주의 교육은 인간에게 주어진 성향 및 발달단계를 이해하여, 그것에 합당한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목표를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③교사의 역할

루소는 교사를 아동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에 맞는 조건을 제공해 주고 돌보는 정원사에 비유했다. 교사의 임무를 아동의 자연적 성장을 이끌고 아동으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그의 신분과 능력에 맞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 주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④에밀에서 제시한 발달단계에 따른 교육

유년기(1~5세): (신체교육)신체적 단련을 위한 체육이 중요하다. 신체적 기능들이 원활하게 발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동기(5~12세): (감각교육)감각은 정신능력 중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고 완성되는 것이므로 가장 먼저 계발될 수 있도록 감각 훈련에 집중한다.

청소년기(12~15세):(지식교육)이 시기는 호기심과 함께 결과에 대한 예견 능력이 발달되므로 지식공부를 시작 할 수 있는 단계이다.  지식공부는 과학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천문학에서 물리학으로 수렴한다. 그러나 지식을 획득하는 취미와 능력을 길러주는 것은 아동 스스로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사회성 훈련의 일환으로 목공술을 배우며 수공 능력으로 마음의 발달을 위한 자극을 받고 장차의 역겨을 혼자서 처리해 나갈 준비를 한다.

청년기(15~20세):(종교, 도덕성교육) 이 시기는 성에 눈뜨기 시작하므로 정념을 사회적 정조에 ㄷ의해 접하는 것. 또한 역사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을 공부해 종교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처음 접하게 된다. 스무 살에는 사회에 들어가서 위대한 문학과 연극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처신 방법을 배운다.

여성교육:루소는 에밀 5장에서 에밀과 결혼하게 될 소피에 대해 서술했다. 그런데 루소는 여성의 의무는 남자를 즐겁게하고 남자의 생활을 돕는 존재이므로 부인과 어머니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보수적 여성관념을 제시했다.

 

 

(4)루소 교육론의 영향

 

①아동중심 교육의 전개

루소는 아동을 능동적인 존재, 아동의 특성에 기초한 교육 전개, 소극적 교육을 제시했는데 이는 칸트, 페스탈로치, 프뢰벨 등을 거쳐 진보주의에 계승되고, 아동중심 교육의 기틀을 이루게 되었다.

②노작주의의 발달

루소의 영향을 페스탈로치, 프뢰벨을 커쳐 케르쉔쉬타이너의 노작교육론에 영향을 미쳤다.

 

③범애주의에 영향

루소는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한 범애파에 영향을 미쳐 초등교육의 교과와 방법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범애주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독일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루소의 사상을 기독교적 견지에서 실천에 옮긴 교육개혁사상을 의미한다. 인류애를 기초로 아동으로 하여금 공익에 힘쓰고 애국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하는것.

 

 

루소는 기존의 계몽주의사상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이는 꾸준히 계몽사상에 따른 근대국민교육에 대한 대안이 필요할 때마다 이용(?)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게보면 피아제의 인지발달론도 인간을 성숙의 존재로 보는 관점에서 루소의 영향이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루소의 사상을 큰 가치가 있는듯. 근데 루소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멀쩡해보이면서도 충동적이고 반또라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ㅋ.ㅋ

  1. 교육철학이 아니라 철학으로서의 자연주의는 훨씬 넓고 다른 개념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교육관으로서의 자연주의가 필요하므로 그것만 중점적으로 봐야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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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013. 4. 26.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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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할 일이 있는데 자면 안될것 같고. 그러다가 두시 넘으면 류현진 경기봐야 될것같고. 고민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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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육의 의미는 역사교육의 이론 1장 역사교육의 개념과 연구 영역의 첫 부분. 이를 좀더 구체화 시킨 것이 양호환 선생님의 책 역사교육의 입론과 구상 1장이고, 김한종 선생님의 역사수업의 원리 책 1장 1부에도 약간 다루고 있다. 역사교육의 입론과 구상 1장에서는 역사교육론이 독립적기 위해 필요한 요소인 교수내용 지식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고 역사수업의 원리에서는 역사교육 독자적 학문화에 이르기 까지의 담론에 대해서 서술했다. (사실 나한테 좀더 필요한건 교수내용 지식같으므로 그쪽을 좀더 봐야겠다.)

 

역사교육의 의미에 대해서 논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하면 역사교육이라는 이론적 영역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역사교육'이 단순히 역사의 내용+교육학적 방법이라면 사범대학의 존재의미는 확 떨어진다. 아무튼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의 개념 자체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해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는 '역사'라는 담론과 '역사교육'이라는 담론의 차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며, 기존의 교육학+역사가 아닌 '역사교육'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역사교육'이 가리키는 영역이 어떤것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각주:1]

 

교과교육학의 의미는 처음 도입될 때 초중등학교에서 가르치는데 유용한 교수 방법의 개발과 적용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었으나 이후 양자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포괄적 결합시도가 이루어졌으며, 일반화된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별도의 이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전제로 한다.  윌슨과 사이크스는 이를 "교과에 특정적(特定的)인 교수지식(subject-specific pedagogical knowledge)"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슐만(Lee S. Shulman, 이승만하고 발음이 비슷하죠잉.-_-ㅋ이슐만이라고 외우시면 간편할듯)이 제시한 교수내용지식과 비슷한 개념이다. 슐만은 교사가 잘 가르치기 위한 지식을 일곱가지 제시한 후(내용지식, 일반교수법적 지식, 교육 과정 지식, 교수 내용지식, 학습자의 특성에 대한 지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맥락에 관한 지식, 교육의 목적 가치 철학적 역사적 근거에 대한 지식)에 다시 세가지로 정리했다. (내용 지식[각주:2], 교수내용 지식, 교육과정 지식[각주:3])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수내용 지식이다. 교수내용 지식의 차이는 강의력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이는 경력교사와 초임교사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각주:4]

교수내용 지식의 세부 영역(?)으로 유추, 은유, 직유, 예증, 감정이입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교과 내용에 관한 지식, 학습자에 대한 이해, 일반 교육학적 지식이 통합적으로 반영된 교수 내용 지식의 산물이다. 이중에서 실제 교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교수 내용 지식으로는 유추와 감정이입이 있다.

 

유추는 학생들이 미리 알고있는 것(기반사례)을 바탕으로 비슷한 유형의 새로운 것(표적사례)을 설명하는 것이다. 방향과 목적이 분명한 유추를 하려면 유추 대상의 공통적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친숙한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 또한 공통점을 가르치고 난 후에 차이점도 가르쳐야 한다.

 

감정이입은 수업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이 과거 상황에 처하게 하거나 과거인과 동일시 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에 파트를 따로 만들어서 정리해야겠다)

 

이러한 교수내용 지식이 적절하게 현장에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수단으로의 유추, 감정이입 등에 대한 특성을 파악하고 사용해야 한다. 교사가 학생들의 특성이나 교과 내용의 파악이 미흡해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교수내용 지식의 범위 안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수내용 지식의 특성파악이 중요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교과특정적 교수지식(교수내용지식)은 전 교과에 걸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적 개념으로 확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각 교과의 특성한 인식론을 기반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잘 가르치려면 무조건 많이 아는 것, 무조건 잘 가르치기만 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와인버그와 윌슨의 연구에서 시사하는 비전공자와 전공자의 차이인 수업에 경험적 산물이자 신념체계까지 반영한다는 인식론적인 측면부터의 차이발생은 교수내용지식의 의미를 뒷받침해주며 특히 우리나라같이 사회과 통합등등 역사교사가 지리,윤리도 가르치기를 원하는 구조의 사회에서 좀더 유의미할것이다.

 

 

  1. 책 내용을 인용하자면 역사교과 교육이론 필요의 당위성과 그것의 구성요소를 밝히는 것. [본문으로]
  2. 과목 자체의 내용에 대한 지식 [본문으로]
  3. 커리큘럼에 관한 지식, 계열성이라든가 단원 구성과 같은 [본문으로]
  4. 이는 미국에서 교사가 되는 과정이 학부 졸업 후 대학원 과정을 따로 거쳐야지 교사가 될 수 있고,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 실험이다. 와인버그,윌슨의 연구, 에번스의 연구, 굿문즈도티와 슐만의 연구모두 경력 교사와 신임 교사의 강의력의 차이는 교수내용지식의 차이라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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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교육학/논제2013. 4. 2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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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와 코메니우스는 실학주의 사상에 입각한 교육론을 전개했다. 를 염두해 두고 이해하면 좋을 듯.

 

 

1.로크의 교육사상

 

(1)생애와 활동

로크(1632~1704)는 명예혁명기 사상적 기반이 된 사회계약론으로도 유명하며, 이후에 버클리와 흄에게도 영향을 미친 경험론철학의 시조이다. 로크는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아동기부터 주의깊은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옥스퍼드에서 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로크는 퓨리턴이기도 한데 건전한 인격을 갖춘 신사 양성을 목표로 했다.  주요 저서로 『인간오성론』(1690)『교육에 관한 고찰』(1693)『오성의 구사』(유작)이 있다. 로크의 교육 사상은 이들 저서에 모두 담겨있다.

 

(2)『인간오성론』(1690)의 사상.

로크의 기본적인 교육에 대한 관점은 경험론적 인식론으로 공부해야되는 관점(^.^)이 모두 인간오성론에 담겨있다.

①인간백지론

"아동의 마음은 출생시 백지와 같다" 라고 백지설을 주장한 로크는 대표적으로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본유관념을 부정했다. 그러므로 아동은 어리므로 원하는대로 틀에 부어 만들 수 있는 밀랍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②경험론적 인식론

로크는 모든 관념은 감각적 경험과 내적 성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지식획득의 원천을 감각을 통하여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진 자료, 내적 성찰로 자료를 처리하는 마음의 능동적인 활동. 두가지로 보았다.

③교육만능론

이러한 인식은 경험을 통해 어떤 학습도 가능하다는 교육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낳게 했으며, 나아가서 교육을 통해 어떤 유형의 인간도 길러 낼 수 있따는 교육만능론에 이르게 했다.

 

(3)『교육에 관한 고찰』(1693)

교육에 관한 고찰에서는 로크의 교육론이 소개되어 있다. 청교도적 영향을 많이 받고있다. 로크는 교육의 목적을 사회 전체의 질서를 바로 잡고 국가의 번영과 복지에 이바지하는 신사의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신사는 덕성, 지혜, 품위, 지식을 갖춰야 하며 이를 위해 체육, 덕육, 지식 교육, 수공 교육을 제시했다.

 

(4)『오성의 구사』의 형식도야 이론

로크는 유작인 『오성의 구사』에서 '지적 능력의 도야'를 교육의 목적으로 제시했다.

로크는 이 책에서 연습의 강조와 일반적인 능력의 도야를 주장했다. 로크는 우리는 태어나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직 연습을 통해서라고 주장했다. 즉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연습을 통해 단련할 수 있따고 보았다. 또한 연습이 가능한 분야는 어느 분야에 관계없이 적용 할 수 있다고 하는 일반적 능력의 도야를 주장했다. 즉 연습을 통한 분야에 관계없는 능력의 도야는 형식도야설의 토대가 되었다.  

 

 

2.코메니우스의 교육사상

코메니우스는 실제적이며 경험적인 지식의 가치를 강조하는 17세기 실학주의 교육사상을 교육이론으로 구체화시키고 실천에 옮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코메니우스는 보헤미아의 모라비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성해 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명성을 얻었다.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교단 소속의 목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코메니우스의 사상적 토대

①경신을 통한 자연주의: 루터의 직계인 코메니우스의 교육사상은 베이컨의 경험주의적 자연관과 스토아적이고 기독교적인 자연관이 결합되어 나온 것으로 그의 일관된 사상적 바탕은 경신을 전제로 한 자연주의이다. 코메니우스는 교육의 목적과 내용을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출발한다.

②객관적 자연주의: 코메니우스는 인간의 지적, 도덕적, 종교적 훈련의 기초를 인간의 생득적인 본성에서 찾았다. 즉 교육은 인간이 태어날 떄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과 소질을 계발하여 표출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고 인간의 내면적 자연을 원리에 따라 발달시켜야 하는 것 (합자연의 원리)을 교육의 기본원리로 제시했다. 여기서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자연이랑 아담의 원죄에서 벗어난 최초의 근원적 상태를 의미한다. 즉 코메니우스의 인간관은 성선설에 가깝다는 것.

③감각주의: 감각은 이해보다 먼저 작용하며, 마음은 모든 사고의 원료를 감각에서 가져온다. 따라서 아동에게 먼저 감각을 연습하도록 하고, 그다음에 기억, 이해, 마지막으로 판단을 연습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교육관

 

기본적 인간관 : 인간은 이성적 창조물이며, 다른 창조물의 지배자이자 창조주의 형상이므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신의 피조물인 모든 존재들과 영원한 평화를 이루고 나아가 내세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보았다.

교육목적과 내용: 그러므로 신이 부여한 가능성을 교육을 통해 형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며, 이를 위해 모든 사물의 원인과 법칙을 아는 지적 도야, 사물의 지배자로 자신과 만물의 지배자가 되는 도덕적 도야, 창조주의 형상으로 자기 자신과 일체 사물을 신께 귀의시키는 도덕적 도야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구체적인 실현방법으로는 모든 지식을 백과전서식으로 조직해 가르치는 범지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3)교육방법

코메니우스는 대교수학에서 자연의 원리에 근거한 교수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①합자연의 원리 : 자연이란 사물의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이 나고난 내면세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모든 교육은 자연의 원리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모든 교과에 공통 적용된다.

②직관교수법: 사물이 언어의 실체이므로 언어로 이해시키기 전에 사물, 표본, 실례를 통한 감각학습이 우선되어야 확실한 지식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최초의 그림을 곁들인 교과서인 세계도회와 시청각 교육을 실시했다.

③아동중심교육 : 교사는 천성의 하인일뿐 주인은 아니다. 라고 하여 수업은 아동중심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④훈육중시 : 훈육 없는 학교는 물 없는 물레방아와 같다 하여 사랑과 모범으로 아이를 대해야 하나 충고와 질책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4)교육제도

가정교사에 의한 개별교육보다 학교의 집단적 교육이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6년식의 4단계의 학교제도를 두어야 한다고 했다.(4단계 단선형 학제 어머니 무릎학교- 모국어학교-라틴어학교-대학) 이는 독일의 통일학교의 기본이 되었고, 미국의 민주교육제도인 단선형 학제의 원형이 되었다.)

(5)보편적 교육론

코메니우스는 신 앞에서 모든 이는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모든 사람이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를 가능케 해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교육이 사회 계층과 차별을 넘어야 하며, 이러한 보편교육은 전세계적으로 확대해 세계적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남녀평등이 이루어져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할 것을 주장했다.

(6)저서

『언어입문』(1631): 단어장, 문법, 사전의 포괄적인 체제의 한 부분으로 계획된 라틴어 공부의 입문서인데, 12개 유럽어와 4개 아시아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걸쳐 라틴어 공부의 초보자들이 사용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세계도회』(1658): 세계에 있는 모든 기본사물과 인간의 모든 기본활동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낸 책

『대교수학』(1632) :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물을 가르치는 기술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으며, 교육자들에게 교육의 원리를 제시하는 책. 이 책은 교육의 본질과 목적, 일반 교수론, 도덕 및 종교적 도야와 학교 훈련, 학교계통의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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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4. 24.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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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연대

1806 영국 케이프타운 점령 - 1830 프랑스 알제리 점령 - 1847 라이베리아 독립(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 - 1878 스탠리 콩고강 유역 탐험(벨기에의 콩고 점령) -1884 베를린 회의(아프리카 분할 문제 논의) - 1898 파쇼다 사건

 

 

19세기 제2차산업혁명의 발달에 힘입어 열강은 세계를 식민지화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로 크게 나눠서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아프리카는 수난의 역사가 지속... 어쩌면 너무 불행한 역사만 기억하기때문에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를 설명하려면 제국주의의 정의와 배경, 전개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지만 일단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점령했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보기로.

(1)아프리카 탐험 초기

이전까지의 유럽인들은 수면병,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 때문에 아프리카 내륙으로 깊숙히 진출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는 연안 지방을 중심으로 무역 거점을 점령했을 뿐이다. 본격적인 내륙 진출은 풍토병에 대한 치료제 개발 이후부터이다.

또한 탐험가들의 여행도 큰 기여를 했다. 리빙스턴과 스탠리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리빙스턴은 스코트랜드 출신의 선교사로 전도를 목적으로 1840년 남아프리카에 갔다. 그런데 이들의 성향 또한 백인의 책무를 가진(?) 성향이었다. 리빙스턴은 영국 군대와 상인이 들어와야 선교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빙스턴은 1852년 케이프타운을 출발해 육로로 서안의 루안다를 커져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해 켈리마네에 갔다. 중간에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그리고 1856년 귀국해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기라는 책을 펴냈고 이후 1856년 다시 아프리카를 탐험했다. 그는 이때 1856년 유럽인들의 노예사냥 실태를 폭로해 노예무역 금지에 일정 기여했다. 리빙스턴은 1871년 나일 강의 수원을 찾다 실종되었는데 이를 찾기위해 '뉴욕헤럴드'가 미국 출신의 스탠리를 파견했다.  스탠리와 리빙스턴은 1871년 11월 아프리카 중부의 탕가니카 호수 근처의 마을에서 만났다. 그 후 리빙스턴은 스탠리 일행과 조사를 같이하다 1873년 사망했다.

이들의 탐험은 열강의 아프리카 침략에 이용되었다. 리빙스턴의 탐험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스탠리는 벨기에의 왕이던 레오폴드2세에게 고용되어 콩고강 일대를 탐험하고 벨기에의 침략을 도왔다. 벨기에는 콩고를 직접 지배하면서 복리 후생 시설 등을 제공했으나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권리는 무시했다.

백인의 짐

 

백인의 책무를 다하라

그대가 길러낸 가장 훌륭한 후손을 보내라

그대의 자식을들 유배지로 보내라

그대 포로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거칠고 사나운 그대들의 새 백성을 돌보라

무뚝뚝한 그들은 그들은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

 

백인의 책무를 다하라

평화를 위한 격렬한 싸움 속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입을 채우고

질병을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네가 너의 목적을 달성할 떄쯤

너를 원하는 다른 미개인들을 위해

다른 원주민과 이교도에게로 시선을 돌려라

그들의 광기를 끝낸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키플링-

세실 로즈의 유언집(1902)에서

영국은 국토가 좁아 3,6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600만 명만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 영국의 생산품을 팔 수 있는 지구상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영국인이 세계 제1의 인종이고, 우리 영국인이 지배하는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인류가 행복해지며,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 1 세실로즈

 

(2)아프리카 분할의 전개

영국이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로부터 1815년 케이프타운 식민지(희망봉이라고 생각하면됨) 얻자 네덜란드의 후손인 보어인은 북쪽으로 이동해 트랜스바알과 오렌지자유국을 세웠다.

1875년 이집트의 재정난을 이용해서 수에즈 운하의 최대가 되고 이후 아라비 파샤의 민족주의 반란을 제압해 1882년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남북의 기점을 바탕으로 영국은 종단정책을 추진했다.

앞서 영국이 케이프타운 식민지를 얻자 보어인이 트랜스바알과 오린지자유국을 세우는데. 트랜스바알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를 차지하기 위해 보어전쟁을 일으켰다.(1899~1902) 이 결과로 영국은 트랜스바알을 합병하고 남아프리카 전체를 차지한다. 그러나 후에 영연방 자치령인 남아공 연방을 조직하게 된다.(1910)

 

프랑스는 1830년 투르크로부터 알제리를 획득하고 이를 거점으로 동진해 튀니지를 얻었다(1881), 남쪽으로도 진겨개 사하라사막을 포함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와 적도아프리카를 획득하고 홍해 인근에 약간의 땅과 마다가스카르 섬을 얻었다(1896) 이렇게 프랑스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을 세웠으나 파쇼다에서 후퇴해 영국의 이집트 지밸르 인정하는 대신 모로코에 대한 진출을 인정받아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따(1911)

중간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놓고 대립했다. 프랑스인에 의해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했으나 후에 최대 주주는 영국이 되었고 결국 이집트를 영국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은 파쇼다(지금의 수단 중부)에서 마주쳐 파쇼다 사건이 일어났지만(1898) 전술한대로 프랑스가 양보하고 후에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게 된다.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달성한 후 유럽에서 현상유지에 힘쓰나 국가차원이 아닌 개별적 차원에서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이러한 개별적 진출을 토대로 독일은 토고와 카메룬을 얻고(1884~1885),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이후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으로 독일은 크루거 전보사건(1896)을 일으켜 영국과 대립하고, 모로코에서도 2차례의 모로코 사건(1905, 1911)을 일으켜 프랑스와 충돌했다.[각주:1] 이때 1911년 열강의 관심이 모로코 사건에 쏠려 있는 틈을 타 이탈리아가 투르크와 전쟁을 일으켜 트리폴리를 점령하기도 했다.(이토전쟁)

 

이탈리아는 뒤늦게 통일 달성후 제국의 위신을 위해 아프리카로 진출했으나 홍해연안의 에리트리아와 인도양의 이탈리아령 소마릴랜드를 획득했으나, 프랑스에게 튀니지를 선취당하고 에티오피아 군에게 패배했다.(1896, 후에 2차 세계대전때 무솔리니는 이때의 패배를 설욕한다는 명분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에 19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서 트리폴리를 얻고,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스탠리의 탐험을 후원한 벨기에는 콩고자유국을 승인해 (1884) 관리하다가 1908년 식민지로 병합했고,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소유하게 되었다.

 

결국 1914년경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유지하는 나라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였다.

라이베리아는 1841년 흑인 조지프 로버츠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 되었고, 1847년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의 노예제 폐지 이후 해방노예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때 아프리카에 돌아온 해방노예들이 건설한 국가이다. '자유의 나라'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초기엔 미국의 보호국이고 지배층은 백인, 수도는 미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이름을 딴 먼로비아 였다. 즉 미국을 그대로 본뜻것.

 

그림 3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왼쪽 맨위에 모로코가 보임.

 

 

 

(3)아프리카 인의 저항

 

당.연. 히. 아프리카인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인들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30여년간 저항했으며, 프랑스는 10여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겨우 점령할 수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프랑스와 두차례 전쟁 끝에 여왕이 폐위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곳곳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수단에서는 반외세를 주장하는 마흐디 운동 세력이 이집트를 간섭하던 영국을 공격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독일이 지배하던 나미비아 지역에서는 토착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탄자니아 지역에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주술사가 앞장서기도 했다. 1905년 일어난 봉기를 마지(스와힐리어로 물)마지 봉기라고 한다. 독일인들이 면화생산을 위해 탄자니아 인들을 강제동원하자 주술사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이다. 3년간 독일에 맞섰지만 무참히 진압당했다.

에티오피아는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민족 운동을 주도했다.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통일 후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수에즈 운하 개통 후에 에티오피아는 주요 거점이 되어 영,프,이가 차지하려고 했으며, 1890년 이탈리아가 침략했으나 막아냈으며 1896년엔 아도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서부아프리카에서는 사무리 투레가 민족 운동을 이끌었는데 사모리투레는 니제르강 유역에 제국을 건설하고 프랑스에 저항했으나 1898년 사모리 투레가 체포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줄루 왕국의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림3 출처 더텍스트 세계사-

  1. 모로코사건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단순히 아프리카 점령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 세계대전으로 가는 방향에서 열강끼리 부딪힌 사건이므로 제국주의와 연관되어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일것 같다. 교과서마다 아프리카 분할, 제국주의파트별로 다르게 실어 놓았는데 제국주의를 설명할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수월한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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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교육학/논제2013. 4. 2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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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주의 자체는 크게 잘 다뤄지지 않는 것 같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반발이라는 흐름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함께 로크와 코메니우스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될듯.

 

1.실학주의의 의미

실학주의는 르네상스기 이후에 나온 서양의 형식적 언어주의(키케로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교육운동을 의미한다. 관념보다 사물을 중시하며, 고전문학보다 자연과학적인 사물교과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근대 자연과학에 토대를 둔 실학주의는 사물과의 직접적 접촉(경험)과 이성에 바탕을 둔 전통을 지식 획득의 중요한 방법으로 확립시켰다.

 

2.실학주의의 대두배경

따라서 실학주의의 배경에 대해서 크게 과학의 발달과 르네상스기 형식적 언어주의에 대한 반발을 꼽을 수 있다.

①과학의 발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천문학적 발견, 지리상의 발견으로 세계관이 변화했으며 자연과학의 방법이 경험과 이성에 바탕을 둔 관찰, 즉 공리공론의 연역적 방법에서 관찰과 실험에 기초한 귀납적 방법으로 전환되었다.

②형식적 인문의주의 극복

인문주의는 형식적으로 변질되 고전의 무조건적 모방, 암기 및 교조주의적 성향, 심미적인 점에만 치중하는 점을 보였는데 이러한 형식적 인문주의에 대한 극복과 인간양심과 현실생활 및 대중교육 등에 일부 공헌했지만 형식적으로 치우치고 종교적 도덕적 완성에만 중점을 둔 종교개혁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3.실학주의의 성격

실학주의는 관념보다 사물을, 고전문학보다 자연과학적인 사물교과를 중요시하는 기본적인 성격을 가진다.

①실질도야 강조

실용성 있는 지식과 실제적인 직업 기술 및 과학적 연구방법을 중시하고,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지시을 통한 실질도야를 강조했다.

②교육목적

실생활에 유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합리적 인간양성을 목표로 하고 실용성, 실천성, 구체적인 지식, 직업에 필요한 기술 습득에 중점을 두었다.

③교육내용

지식의 실용적 가치를 중요시해 백과전서식으로 다양하고 많은 지식을 다룰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교과목 수를 25~30개 까지 만들고 교과과정을 구성했다.

④교육방법

관념적 사고방식보다 사물에 대한 직접적 사고방식을 중시하고, 고전이나 고전문학보다 사회생활이나 자연과학적 교과를 중시했다. 따라서 직관교육,실물교육, 실험, 여행, 시청각 방법등을 사용했으며 다양한 교구를 사용했다.

 

4.실학주의의 교육 유형

실학주의의 교육 유형으로는 인문적 실학주의, 사회적 실학주의, 감각적 실학주의가 있다.

①인문적 실학주의

대표적 학자로 라블레, 밀턴, 비베스가 있다. 이들은 키케로주의처럼 극단적인 고전중시적 성향이 아니라 고전을 실생활에 이용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즉 고전의 가치를 인정하고 고전연구를 고전 자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실생활에 이용하기 위해 고전을 연구하는 것. 그러므로 고전에 능통한 인간보단 실제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유능한 인간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문적 실학주의는 교육적으로 크게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실학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감각적 실학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②사회적 실학주의

대표적 학자로 몽테뉴가 있다. 사회적 실학주의는 가장 큰 목표가 실제 사회생활에서의 원만한 인간관계이다. 그러므로 상류계급의 귀족과 공적 실무가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공적 생활에 바탕이 되는 신사적 품격과 세상보는 안목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신사가 되는 것이 교육목적.

따라서 자연과학을 위시해 체육, 역사, 철학, 여행등을 중요시하고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사교계 진출후 다양한 문화를 접촉할 것을 강조했다.

 

③감각적 실학주의

대표적으로 베이컨, 코메니우스 등의 학자가 있다.(로크는 사회적 실학주의, 감각적 실학주의의 영역에 다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감각적 실학주의는 실학주의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 기본적으로 감각적 지각을 기초로 한 교육을 강조한다.

감각적 실학주의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존중하고, 감각적 지각을 기초로 자연계의 현상을 인식, 확립하여 자연력과 자연법칙을 활용해 현실생활을 향상시키려는 교육사조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관한 지식으로 인간생활의 복지증진이 교육 목적이다.

고전어 대신에 다양한 백과전서식 교육내용을 제시했는데, 특히 모국어, 자연과학, 사회과학의 실제적인 면을 중요시했다.

감각적 실학주의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발달을 적용한 교육방법을 실현하려 했다.

자연에 질서에 근거한 합자연에 따라 교육을 하고자 했으며, 직관을 중시했는데 이는 과학,심리적인 토대 위에 감각적 직관을 통한 학습을 말한 것이다. 말보다 사물이라는 말처럼 사물과의 직접적 경험을 통해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언어보다 그림같은. )

과학의 영향에 따라 실험과 귀납법을 통한 학습을 강조했다. 경험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교육은 기억보다는 감각적 지각의 훈련에 기초해야 하며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에 영향을 받아 성립된 지식과 진리의 원천으로 자연현상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자 했다. 즉 실물이나 표본에 의한 학습방법을 강조했다.

 

4.실학주의의 교육적 영향

실학주의는 근대교육 개혁의 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초기 실학주의는 큰 영향력이 없었지만 후의 감각적 실학주의에서 나온 합자연의 원리는 루소의 자연주의로, 코메니우스의 직관 교수는 페스탈로치로 이어졌다. 또한 코메니우스의 실학주의 교육은 근대국민교육제도의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독일, 영국, 미국에서 실과학교가 발달하는 영향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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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한문사료2013. 4. 24.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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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이후 교과서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7차교육과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이들 국가의 속성에 대해서 나오지는 않는데 이번 2009개정교과서는 부여, 고구려, 마한의 목지국을 연맹왕국으로 설명하고 있다.[각주:1]이들 각 나라에 대한 것은 중국의 여러 삼국지, 사기, 위서, 후한서 등등에도 나와있지만 교과서는 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인용하고 있는 듯.

초기국가의 특징은 국왕의 출현과 국가체제의 정비, 영토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래의 군장세력이 잔존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부여의 마가구가저가나 고구려의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등의 가에서 고추가를 형성했다는 것은 군장국가 중에서도 유력한 부족의 귀족이 우대되고 일반 군장과 구별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한통) 내용이 많으니 고구려는 다음번에 한꺼번에 봐봐야겠다.

1.부여

(1)영고

以殷正月祭天, ……(中略)……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中略)……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2)4조금법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男女淫 (..)皆殺之.

尤憎妒 已殺, 尸之國南山上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兄死妻嫂, 與匈奴同俗.

(3)부여의 위치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4)부여의 사회

方可二千里 戶八萬 其民土著 有宮室·倉庫·牢獄.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麤大, 性彊勇謹厚, 不寇鈔. 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豬加·狗加 大使·大使者·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大者主數千家, 小者數百家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부여의 건국 설화는 여러개가 있다. 북부여에 관한 설화, 동부여에 관한 설화. 북부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흘승골성(요서)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라고 했으며 그의 아들 부루가 동쪽으로 이동해 동부여를 세웠다는 것이다.

동부여에 관한 다른 설은 북부여왕 해부루의 신하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동해 해변가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우라고 하여 아란불이 왕에게 건의하여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동부여라고 칭했으며, 그후 금와가 뒤를 이었다는 것.

이를통해 부여가 요서 지방에 건국했다 동부여로 이동했다. 동부여는 지금의 장춘시 외곽지역을 말하는듯 북부여의 건국연대가 기원전1세기로 기록된 것은 이 무렵부터 부여가 강력한 왕국으로 등장한 것을 의미한다.

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떄까지 1천년 역사와 전성기의 영토는 북으로 흑룡강 이남, 남으로 백두산에서 요하 상류, 동쪽으로 연해주, 3세기경 영토 사방 2천리 인구 8만호였다고 한다.

주변에 고구려,선비와 국경을 대고 있었다.

세습왕 아래에는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는데 저마다 행정 구역인 사출도를 다스렸다. 부여 초기에는 가들이 모인 평의회에서 주요 국사를 결정해 왕권이 약했으나 점점 왕권이 강화되었다.  

부여는 귀족인 가가 있고 그 밑에 호민으로 불리는 지배층이 있으며, 민과 하호로 불리는 천민층이 있었다.[각주:2] 왕이 죽으면 후하게 장사지냈으며,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고

매년 12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국가의 단합을 도모했다. 이때 국가중대사를 토의하기도 하고, 전쟁시 우제점을 치기도 했다.이 시기의 제천행사들은 국가적인 대행사로 군장국가의 제천행사가 국가적인 행사로 바뀐것을 나타낸다.

고조선의 8조 금법과 비슷한 4조 금법이 전해진다. 이를통해 부여는 엄벌주의, 가부장적 사회 및 사유재산, 노예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위략에는 고구려에도 부여와 같이 도둑질한 자는 12배 배상을 했다 했는데, 이러한 법률은 초기국가 시대 공통된 내용으로 짐작된다.

 

2.고구려

本有五族, 有涓奴部‧ ……(中略)…… 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中略)……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雛加. 涓奴部本國主, 今雖不爲王, 適統代人, 得稱古雛加, 亦得立宗廟, 祠靈星‧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加古雛之號. 諸大加亦自置使者‧皁衣‧先人, 名皆達於王, 如卿大夫之家臣, 會同坐起, 不得與王家使者‧皁衣先人同列.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3.옥저

(1)옥저의 위치와 주변국, 크기

東沃沮在高句麗 蓋馬大山之東, (..중략.)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2)골장제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 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䥶,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

 

(3)민며느리제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4)고구려에 복속되어 공물을 바치는 옥저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中略)…… 使相主領. 又使大加, ……(中略)…… 統責其租稅. 貊布‧魚‧鹽‧ ……(中略)…… 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 ……(中略)…… 以爲婢妾, 遇之如奴僕.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옥저는 함경남도 부근에 위치해 느슨한 연맹국가를 영위하고 있었다. 변방에 위치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었으나 큰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중 옥저현후 세력이 중심세력을 형성했다고 알려졌다.(위지동이전에 보면  불내, 여화, 옥저국이 한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현이 폐지되면서 각기 제후국이 되었는데 옥저현이 중심이 됐다고 알려짐)

 총 5천호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고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다. 이후 한사군 설치후 임둔군 지배하에 있다 낙랑군 밑으로 갔다가 고구려 태조왕 때 고구려에 복속되어 천리길을 걸어 공납으로 바쳤다고 전해진다.

옥저에는 어린 여자가 남편 집에 가서 살다 혼인하는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뼈를 추려서 가족무덤인 목관에 안치하는 풍습이 있었다.(골장제)

 

4.동예

(1)책화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中略)……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2)무천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3)전투에 능하며 단궁과 반어피, 과하마가 유명했다.

能步戰. 樂浪檀弓 出其地. 其海出班魚皮,又出果下馬, 漢 桓時獻之.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동예는 옥저와 같이 느슨한 연맹체국가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파악되며 읍락마다 장수가 읍군 삼로등이 지배했으며, 불내예후국이가장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해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명주 삼베, 단궁이라 불리는 활과 과하마라는 말, 그리고 반어피 등이 특산품이었다.

동예는 총2만호를 거느리는 비교적 큰 나라였으나 왕국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족외혼의 풍습과 각 부족의 구역이 구분되어 책화라는 부족 영역 보호책이 있었다. 동예에도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5.삼한

(1)삼한의 위치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中略)……

(2)마한의 사회정치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中略)…… 凡五十餘國. ……(中略)……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中略)……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中略)……

(3)하호의 존재 (고구려의 하호와 비교된다)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中略)……

(4)강력한 왕권의 부재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中略)……

(5)사회풍속, 기풍제와 시월제, 소도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毛本, 木, 作本, 誤.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진수가 위략을 참고하여 삼한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했는데 삼한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삼한은 예맥족이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등의 연맹왕국과 고대왕국을 건설해 갈때 한강 이남의 한족 사회에서도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에 기초하여 정치적 통합운동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辰국, 기원전 4세기경) 진국은 한나라와 직접 교역했다고도 전해지는데 위만조선의 성립으로 기존 고조선의 유이민이 한강 이남으로 유입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해 삼한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남쪽으로 와 한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삼한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한은 약 50여 개(54개)의 소국으로 이뤄졌고 10만여 호를 거느렸고 가장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고 전해진다. 진한과 변한에 속한 소국은 이보다 적었다.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개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소국은 마한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으로 불렸던 것처럼 왕의 호칭을 가진 존재가 다스리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장수가 통치하였다고 한다.

장수의 명칭은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마한에서는 세력이 강한 이들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고 불렀다.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에서는 이러한 장수에게 관(官)과 인수(印綬)를 주기도 하였는데, 간접적 통제를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한편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등의 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데, 일제강점기 경북 지역에서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이라 새겨진 도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장수 등에 의한 소국의 통치 체계는 “국읍(國邑)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더라도 읍락(邑落)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라는 것으로 미루어 그다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는 곧 삼한의 통치 질서가 완비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 체계적인 국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삼한 사회는 ‘왕’으로 표현된 존재를 정점으로 신지‧읍차 등의 장수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피지배층은 토착 생활을 하며 농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므로 삼한은 일반적인 농업 사회의 특성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후가 따뜻하고 저수지가 많아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해 벽골제, 의림지같은 저수지는 마한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농기구도 발전해 북방이주민에 의한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후 괭이, 보습, 낫, 호미 등 철제농기구가 만들어져 생산력이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의창 다호리의 무덤이 좋은 근거이다. 한편 변한지역의 철은  품질도 좋고 수량도 많이 나와 일본으로 수출도 하고 화폐로도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삼한의 피지배층과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바로 ‘하호(下戶)’이다.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하호가 복속민과 같은 존재로 기록되어 있고, 동예조에는 일반적인 피지배민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한의 하호의 성격을 해명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한편, 삼한에서는 음력 5월에 씨를 뿌리고 10월 농사가 끝난 다음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료상에는 제사의 대상이 단지 ‘귀신’으로 되어 있지만, 이 제사 자체가 농사와 관련 있는 만큼, 이는 바로 ‘농업신’에게 올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 나서 군무를 추는데, 땅을 밟는 동작은 지신(地神)을 즐겁게 하고 땅의 생육력(生育力)을 높여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라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제사는 일종의 축제로 거행되어 구성원 간에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국읍 장수의 정치권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각 국읍에 천군(天君)이 있어 제사를 주관하고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두었다는 점은 삼한 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문제로 중요하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과 유사하므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솟대신앙) 소도를 복원해 보면 현재 서낭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도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이곳으로 도망 온 죄인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도에 죄인이 오면 잡을 수가 없었다는 말. 이는 소도가 신성한 특수 구역임을 말해 주는 동시에 삼한이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분리된 사회였음을 알려 준다. (제정분리사회)

이들은 읍락에 모여 살고, 초가로 지붕을 한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두레를 만들어 농사를 공동으로 짓는 등 공동체적 전통이 있었으며,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부장품을 넣는 풍습이 있었다. 이들의 무덤은 고인돌보다 진화된 움무덤(토광묘)와 돌덧널무덤(석곽묘)가 있었다.  무덤 뿐만 아니라 바위에도 그림을 새겨 자신들의 세계관을 담았다. 경북 고령 양전동 암각화, 언양 천전리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이들을 통해 삼한 사람들의 예술관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그렸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1. 통론에서는 군장국가로 설명하고 있다. 신특,구특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초기국가를 각각 다루지 않고 바로 성립과정에 대해서 언급했다. (부체제로) [본문으로]
  2. 하호에 대해서 여러 논란이 있는데 교과서에서는 천민층으로 기술했고 한국통론은 씨족원의 후신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한 양인신분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그냥 천민과 양인의 논란이 있다고 표현한 책도 있다. 깊게 찾아보기 그러니. 교과서의 내용을 피지배층이라고 완곡하게 이해하는게 일단은 합리적일듯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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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교육학/논제2013. 4. 2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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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의 교육도 소주제로 파고들면 내용이 굉장히 많은데 ㅡㅜ 그러나 논술에서는 사소한건 물어보지 않을 것 같으므로(비토리노, 에라스무스, 라블레, 비베스 이런거 물어보지는 않겠지? 종교개혁도 고타교육령, 메사추세츠교육령, 예수회 이런거 다 나오지는 않겠지?) 그냥 큰 줄기만 파악하고 넘어가야겠다.

일단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것과 동시에 기존의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수정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공통점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인문주의 교육은 엘리트 위주의 교육, 종교개혁은 서민도 생각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시작하면 될듯.(엄밀히 말하면 루터는 제후들의 편에 서면서도 종교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입장이지만 굳이 인문주의 교육과 대체적인 차이점을 도출하자면.)

1.르네상스기의 교육

(1)르네상스의 의미

르네상스운동은 15세기를 전후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나타난 것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을 통해 새로운 인간생활과 문화를 수립하려는 운동이다.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의 표현과 실현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본위주이 또는 인문주의에 있다.

(2)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

인문주의 교육은 중세의 스콜라주의 교육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교육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위해 고대 자유인들의 삶을 재발견하고 고전작품을 통해서 이루려고 했으며, 신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율성과 주도성을 가지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정리하면 ①인간주의 교육의 토대 형성 ②인문학 중심의 자유교육 ③이탈리아의 개인적 인문주의와 북유럽의 사회적 인문주의④키케로주의로의 변질이 일어났다.

 

(3)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의 특성

①인간중심주의 : 신 중심에서 벗어나고자 한 인문주의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인간 자신의 자아실현 가능성을 신뢰하고, 내세보다 현세의 삶을 찬미하엿다. 인간은 무한한 자유의 존재이고, 소우주라는 헬레니즘의 인간중심주의를 부활하려고 했다.

②전인교육의 이념 형성: 인간 자아의 존엄성과 그의 실현을 존중하는 인간중심주의가 인간교육으로 발아하기 시작하자, 인간의 지적 도덕적 정서적 능력의 조화로운 발달을 추구하는 전인교육의 이념이 형성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교육을 떠올리면 연관될듯)

③교육적 인간상: 지적 능력, 문학적 취향, 세련된 예법, 지도력, 공적 봉사능력 등을 갖춘 다재다능한 전인을 추구했다. 즉 고대 웅변가의 덕, 중세 기사의 덕 근세 시민의 덕을 갖춘 정치지도자를 교육받은 인간의 표상으로 생각.

 

(4)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교육의 유형

①개인적 인문주의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 지방에서 유행했던 교육유형. 예술과 교양활동을 통해 개인의 교양을 넓히는데 주 목적으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부한 인생을 사는 것이 목표.

이러한 유형의 인문주의는 엘리트 위주의 교육으로 이탈리아의 궁정학교, 프랑스의 콜레와 리세, 영국의 퍼블릭스쿨, 독일의 김나지움 등이 있다.

 

②사회적 인문주의

북유럽 지방으로 전개된 인문주의는 네덜란드에서 성립한 공동생활포교단의 사회적 신앙과 결합하면서 종교적 사회적 경향을 띠었다. 개인적 인문주의보다 사회적인 경향을 띠어 적극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종교적 경향은 고전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이해도 강조하는 등 르네상스의 주된 경향하고 완전히 일치되지 않는 경향도 보인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③키케로주의(언어적 인문주의, 형식적 인문주의, 구술주의 등등으로도 불린다)

형식적 인문주의인 키케로주의는 문학이 가질 수 있는 인간적인 가치는 도외시한 문법이나 문체를 공부하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일인 것처럼 착각하여 키케로 문체를 흉내내는 것을 교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고전의 언어와 문법을 익히고 ,고전의 문장을 암기하는 형태의 언어교육은 19세기 초반까지 서양교육을 지배했다. 키케로주의에 대한 반발은 17세기 실학주의를 불러오기도 했다.

 

(5)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의 한계

①귀족중심 교육 : 인문주의 시대의 교육의 기본은 재력이었다. 재력이 없으면 교육의 기회가 어려웠기 때문에 인문주의 교육은 대중교육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교육이 사회 지배층에게 필요한 능력함양수단으로 전락했다.

②형식적 언어교육 : 키케로주의는 인간교육을 기계적, 획일적 인간 조형으로 흘러가게 하고 교육내용도 편협하게 하며 교육방법도 암기로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종교개혁과 교육

(1)종교개혁의 성격

①신앙해방 : 종교개혁은 중세의 형식적 교권주의에서 벗어나 성서에 의해서 복음을 가질 수 있따는 신앙해방운동이다.

②종교적 자유주의: 구원이 교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잇따는 타율주의가 아닌 성서를 통해(활판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널리 퍼져 성서를 통한 직접 구원) 하나님과 직접 교섭하겠다는 종교적 자유주의 였다.(성직자나 의식의 중계가 필요없다는 신비주의적 신앙)

③교권개혁운동:세속적이된 교회와 타락한 성직자들의 부패를 개혁하겠다는 운동의 성격

 

 

(2)신교의 종교관

①신비주의: 종교개혁 운동은 종교의식과 교회 및 성직자의 권위를 중시하는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에서 탈피해 성서와 직접 접촉해 신과 인간의 직접적 교섭이 가능하다고 했다.

②현세인정: 영혼구원이 최상의 목적이지만 이와달리 현세를 인정해 근면검소한 생활을 해야 된다고 했다.(칼뱅의 예정설과 프로테스탄티즘적 윤리)

③금욕방법: 금욕 대신에 일과 근면을 제시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기도.(엄밀히 말하면 이념적으로 정당화 한것이겠지)

 

 

(3)신교의 교육관

①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 강조: 국가, 사회, 교회를 위해 종교적 도덕적 품성을 기르는 교육은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 사회의 책임으로 여기게 되었다.

②보편적 의무교육: 종교개혁가들은 교육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영혼구원을 얻게 하는 수단이므로 계급과 성에 관계없이 보편적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근대 공교육 제도 성립에 토대가 됨 (독일의 고타 교육령, 미국의 메사추세츠 교육령)

 

(4)종교개혁이 교육에 미친 영향

①교육은 올바른 신앙을 통해 영혼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누구나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대중교육운동을 전개했다.

②신교는 종교교과뿐만 아니라 직업과 생활에 필요한 세속교과도 인정하였기 때문에 종교와 생활이 조화된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③개인의 신앙과 자유에 대한 존중은 피교육자를 존중하는 풍토를 조성했다.

④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고 존중했기 때문에 여성교육과 아동교육에 필요한 여교사의 양성을 권고했고, 가정교육을 중시했으며, 어머니의 교육적 지위도 향상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인권이 그렇게 올라간 것은 아님)

⑤교육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책임을 강조해 모든 지역에서 학교체제가 생겨났다. 또한 학교교육의 조직적 구성에도 영향을 미침(칼이 설립한 학교는 학년별 학급조직을 가지기도)

 

(5)신교와 구교의 교육활동

신교와 구교는 나름대로의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종교개혁기에는 기존 형식주의에서 경시되었던 라틴어교육 중심의 중등학교와 서민을 위한 모국어 학교로 나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이러한 신교의 교육적 경향에 대항해 내부 개혁 운동을 통해 트렌트공의회를 통해 본격적을 개혁이 일어났다. 그 전에 로욜라가 1534년 파리에서 예수회를 창립해 엄격한 군대식 교육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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