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토픽2013. 5. 8.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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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으로(?) 미국 역사를 나누었을때, 고대부터 - 대항해시대 - 정착 및 식민지시대 - 독립혁명 및 확장기 - 제2차 산업혁명 이후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오르는 시기(?)로 나눠서 보는게 나름 합리적인 듯하다. 그래서 그렇게 정리해보기로 했음. 

 

1.아메리카 대륙 발견

(1)콜럼버스의 항해

콜럼버스의 항해 이전에도 아메리카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노르만인이 캐나다 지역에 정착하려고 했던 기록들이 있으나 콜럼버스의 항해를 기점으로 유럽이 아메리카대륙을 본격적으로 탐험하기 시작했고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항해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제노아의 선원출신인 콜럼버스는 토스카넬리와의 서신교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계산오류, 본인의 야심, 다이이 추기경의 지리서 탐독 등의 이유로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항해를 떠나 1492년 8월 3일 팔로스 항을 떠난지 41일만에 바하마에 도착하게 된다. 그 뒤에 4회에 걸쳐 탐험을 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는채 모기제독이라는 야유속에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교황 알렉산더 2세는 1494년 베르데제도 1300km서쪽을 경계선으로 서쪽은 에스파냐, 동쪽은 포르투갈 영토로 하는 토르데실리스조약을 체결한다.

 

(2)존 캐벗의 캐나다 발견

콜럼버스의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 출신의 존 캐벗(John Cabot)은 1496년 헨리7세의 후원으로 캐나다 동해안에 도달했다. 영국은 특허장(charter) 발급으로 항해를 지원했다는 특징이 있다.

(3)아메리고 베스푸치, 발보아의 발견, 마젤란의 세계일주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여러번 중남미 지역을 탐험한 결과 신대륙일 것이라는 의견을 발표해, 신대륙의 이름이 아메리카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발보아는 파나마지협을 횡단해 태평양을 바라보는 발견을 한다. 발보아의 발견으로 신대륙의 폭이 좁다는 의견이 돌아 마젤란이 3년여에 걸친 긴 항해 끝에 최초의 세계일주를 해내게 된다.   

 

 

2.콘퀴스타도르(직업적인 정복인, ex:코르테스와 피사로)에 의한 중남미 파괴

대항해시대기에 멕시코 중부지역에는 아즈텍 문명이 있었다. 아즈텍문명은 상형문자, 달력, 귀금속 채굴, 피라미드형 신전 건조, 인신공양의 관습이 있었다. 아즈텍 문명은 1519년 에스파냐의 하급귀족 출신인 코르테스가 1521년 600명 남짓한 병력을 데리고 아스텍 문명을 파괴했다.

페루지역에는 잉카제국이 성립했는데 태양신을 숭배하는 지배자가 관료와 군대를 거느리고 군림하고 있었다. 잉카제국은 1533년 피사로가 코르테스보다 적은 병력으로 잉카제국의 계승자를 간계로 속여 정복했다.

이후 아스텍, 잉카의 토착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식민지는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과 지방장관이 행정의 책임을 지고, 도시와 지방에는 자치적인 기구가 설립되었다.

식민지 획득에 가장 역할을 한 정복자나 그들의 후손인  지배 계급에게는 '엔코미엔다'라는 원주민으로부터 공납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들 엔코미엔다를 부여받은 엔코멘데로는 거둔 공납으로 각종 유리한 사업을 경영하고 원주민을 강제노동으로 부렸다.

 

3.영국 식민지 13개주의 성립까지

영국인 아메리카 이주민은 몇가지 부류가 있다. 1. 스튜어트 왕조의 전체정치와 종교적 탄압 회피. 2.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모험자. 3.특허장을 받아 식민지 경영에 나서는 사람들.

여러차례 식민지 건설이 시도된 끝에 1607년 현재의 플로리다 북쪽의 체서피크 만 근처에 제임스타운이 건설되고 1620년 메이플라워호는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사추세츠에 도착하는 등 식민지가 속속 건설된다. 영국인들이 에스파냐와 달랐던 점은 에스파냐들은 직접 식민지 경영을 실시한데 비해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내쫓고 거기에 백인마을을 건설하려고 했던 차이가 있다.

영국인 외에도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이 아메리카 탐험을 했다. 오늘날 뉴욕과 허드슨 강 유역에 정착한 것은 네덜란드 인들이었는데 영국은 제1차 영-란전쟁(1652~1654)을 계기로 그 지역을 빼앗아 요크공의 이름을 따서 뉴욕으로 명명한다.

이후 필립 왕 전쟁과 같은 원주민과의 싸움, 베이컨의 반란같은 내부적 반대자와의 싸움들을 거치며 동부의 13주가 성립되게 된다.

 

13개 식민지는 저마다 사정이 달랐으나, 빈부격차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지위의 불평등이 있었으나 유럽과 같은 신분제사회는 아니었다. 남부는 노예경영을 통한 농장경영, 북부는 자영농민과 상공업이 발달해갔다.

영국은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식민지 상류계층의 통치영향이 컸다. 식민지가 애초에 자유를 얻기 위해 떠난만큼 식민지인들은 자유와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각자 주끼리 공동체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메리카에도 본국(영국의)법률이 그대로 실시되고 있었고, 식민지의 무역은 본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제약을 받았고, 본국산업과 경쟁상대가 될 산업은 금지되는 등 중상주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주의적 통제가 본국의 법률을 엄격하게 실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건전한 방임'정책이었다.

그러나 '건전한 방임'정책은 7년전쟁 종결(1763)년 이후 크게 변화하게 된다. 조지 3세가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에 관여하려고 했으며, 7년전쟁에 전쟁비용과 식민지의 방위비용을 식민지부터 걷으려는 재정적 고려 때문에 변화하고 이에 식민지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한다. 결국 혁명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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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토픽2013. 5. 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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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한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는 유럽인의 신항로 개척까지 그들만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15세기 신항로 개척 이전에도 노르만이나 베링해협등을 통해 아시아인들이 건너갔지만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흔적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후 신항로의 발견으로 점차적으로 세계사에 편입(?)되게 된다.

 

1.아메리카 원주민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은 아시아의 몽골 계통 이주민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2만 5천년~ 1만년 정도 빙하기에 '베링 육교'라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동에 대해 2가지 설이 더 있다. 태평양 연안 이동설과 남태평양 이동설이 있는데 요즈음에는 원주민이 다양한 경로를 따라 이동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일단은 베링육교설이 정설이라는거.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정착해 부족 단위로 생활했다. 지역별로 환경에 적응해가며 수렵 채집 등을 하며 생활했으며, 점차 농경과 함께 문명을 형성했다. 16세기까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철기시대 초기쯤의 해당하는 문명 단계에서 반농, 반수렵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

대항해시대 이전의 아메리카의 문명으로 대표적으로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 잉카 제국이 있다. 북아메리카에는 넓은 지역에 다양한 부족이 흩어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중남미에는 왕국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아메리카 문명은 전고전기 후고전기로 나눠 분류해 전고전기의 올멕 문명, 차빈 문명, 후고전기의 테오티와칸 문명, 티아우아나코 문명 등 여러 문명을 더 찾을 수 있지만 일반적인 처음 언급한 세 문명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1)마야 왕국

마야문명은 3세기에서 9세기 무렵까지 현재의 유카탄 반도, 즉 중앙아메리카 멕시코와 과테말라 지역에서 꽃피웠다. 마야 문명은 혈통에 따른 계급 사회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마야문명은 옥수수를 재배하고, 도시가 발달하고, 신성 문자 및 0의 개념, 20진수를 사용하는 등 문화적 수준이 높았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갑자기 멸망했는데 이는 급속한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부족을 주요 원인으로 판단하고 있따.

 

(2)아즈텍 왕국

아즈텍 왕국은 13세기 멕시코 고원에서 융성했다고 전해진다.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30만 인구를 자랑했고, 그림 문자와 달력, 피라미드형 신전을 만들었다. 아즈텍 왕국은 산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 의식으로 유명하다. 제물로 바칠 포로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군대 양성 및 정복지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었다.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해 1년을 365일로 계산했고, 윤년까지 두는 달력, 20진법을 사용했다.

 

(3)잉카 제국

 

15~16세기 페루의 안데스 산지에서 잉카제국이 건설되었다. 잉카 제국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산에 요새를 만들고 도시를 건설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마추픽추가 있다.  잉카 제국은 남아메리카 서부 지역을 지배했지만 1544년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가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살해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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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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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육의 목적이 왜 역사교육을 해야하는가? 에 대한 물음이라면 역사교육의 목표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하위의 대상이다. (이러한 교육목표는 학교교육목표, 교과목표, 학년목표, 단원목표, 수업목표(학습목표)의 순서로 단계를 나눌 수 있다. )

 

역사교육에 목적에 대한 논의의 흐름은 기존 사학자들의 역사에 대한 목적과 연결지어 주장하는 경우에서 1990년대 들어 사회과 통합에 따른 역사교육 위상의 약화라는 배경속에 역사교육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기존 목적론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며 역사적 사고력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와 함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위 목표를 제시되었는데, 초기에는 단순히 일반화된 막연한 목표를 사용했다. 계열성이나 체계성이 없이 그럴듯하게 작성되거나 단순히 블룸, 콜담과 파인즈, 피전, 와이즈먼 등이 제시한 준거에 맞춰 목표가 제시되었다. 이러한 목표체계들은 1990년대 역사교육 이론의 패러다임이 변화한 이후로 비판받았다. 그 대안으로 새롭게 역사적 사고에 기초해 역사교육 목표를 설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즉 1990년대 사회과 통합을 기점으로 역사적 사고력을 매개삼아 잘 정리해 놓아야 될듯)

가장 먼저 역사적 사고력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답하면 어느정도 목표가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구체적으로 역사적 사고력의 하위범주에 대해서 논의가 진행되었다. 기존의 블룸의 교육목표, 콜담과 파인즈 등의 기존 교육 목표 분류학과 역삭육 목표에 관한 연구들을 역사적 사고력이라는 개념에 기초해 해석했다. 이것이 진전되어 역사적 사고력의 하위범주가 일정 구체적으로 제시가 되게 된다. 이후의 발전된 연구들은 이러한 개념을 직접 현장에 실제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있다. 즉 역사적 사고력이 실질적인 교육 목표에 반영되는 것, 역사적 사고력에 기초한 교육 목표 계열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표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도 있다. 교육목표를 중요성을 강조하면 세밀하게 기술된 목표를 제시하지 않으면 교과 내용 선정이나 교수 과정이 막연해지고 타당성이 없어지며 일관성을 잃을 염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교육목표 설정을 반대하는 사람은 목표가 제시되면 어떤 과목의 교육내용도 그 목표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 교사가 명확한 수업목표를 계획하고 수업을 시작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떤 내용을 가르쳐야 하나에 관심이 많으나 교육목표가 없으면 방향을 잃고 지식 중심의 교육이 될 우려가 있으므로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교육목표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역사교육의 목표에 대한 논의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블룸의 교육목표 분류.

블룸은 교육목표를 크게 인지적 영역, 정의적 영역으로 나누었는데, 그를 세분하면

인지적 영역에는 지식, 이해력, 적용력, 분석력, 종합력, 평가력과 함께 그 하위 기능, 정의적 영역에는 감수, 반응, 가치화, 조직화, 인격화와 하위 기능들이 있다. 블룸의 교육목표학은 하나의 뚜렷한 위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2.콜담과 파인즈의 목표 분류

블룸의 목표분류학을 활용해 역사교육의 목표를 정교하게 분류한 사람으로 콜담과 파인즈가 있다. 블룸이 교육의 일반적인 교육목표에 대해서 다루었다면 콜담과 파인즈는 역사교육의 특성을 고려해 작성한 것이다.

3.국가 교육과정의 목표분류

각 국가별로 교육목표를 보아 그 나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적 목표를 살펴볼 수도 있다.

(1)미국 역사과 국가표준

1994년 미국 역사과 국가표준은 역사적 사고기능과 역사적 이해로 나누어 목표를 제시했다. 사고 기능은 과거,현재,미래를 차별화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증거를 찾고 평가하며, 과거사료들을 비교, 분석하고, 역사적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등의 기능을 말한다. 역사적 이해는 가족, 지역사회, 국가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할 사실이다.

미국 역사과 국가표준은 역사적 분석과 해석, 탐구능력, 역사적 쟁점의 분석과 의사결정 등 기능 목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미국 역사과 국가표준의 특징이다. 즉 현대사회의 학생들이 복잡한 사회적 문제들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한 능력을 강조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2)영국 역사교육의 목표

1995년 개정된 영국 국가교육과정의 목표들은 과거 사회 및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고 연결하는 능력, 변화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 역사적 해석의 차이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평가하는 능력, 정보원을 다각적으로 활용하는 능력 등이 중시되고 있다.

(3)우리나라 역사교육의 목표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역사교육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데, 역사교육의 이해에 나온 2001년에 발표된 7차교육과정 개정안 내용은 개정되었음으로, 나중에 다른 내용을 찾아보아야 겠음요(-_-;)

 

 

이것들을 참고해 일반적으로 목표에 나타난 구체적인 행동영역 별 목표 및 준거에 대해서 정리해볼 수 있다. 정리하면 지식의 이해, 기능(탐구, 사고력, 상상적 이해, 의사결정,),가치및 태도로 나눌 수 있다.

 

(1)지식·이해

역사과 목표로 지식 이해는 역사의 기본적 사실, 개념, 일반화, 등을 기억하거나 이해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개념 뿐만 아니라 특수개념과 시간개념들도 포함된다. 블룸은 특수한 것의 지식과 이를 다루는 수단의 지식, 그리고 보편적인것과 추상적인 지식을 예로 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세분 분류하면, 역사적 사실의 이해, 주요용어와 개념을 이해하기, 일반화 및 원리의 이해, 역사적 자료 및 탐구방법의 이해를 들 수 있겠다.

 

(2)기능

기능은 어떤 것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재능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능을 가진다는 것은 곧 어떤 일에 대해 능률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교육에서의 기능은 학생들의 역사적 탐구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의 신장을 위한 중요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구체적 학습능력의 신장과 관련된 기능(역사적 용어, 참고자료, 정보나 관찰 결과, 지도, 연표, 통계를 비롯한 자료해석, 의사 발표, 토론 활동), 고차적 사고력 학습에 관한 기능(학습 문제 확인, 연구 계획, 가설 형성, 가설 검증을 위한 근거 마련, 자료 수집, 결과 예측, 추론하고 증명, 결론 도출, 일반화), 상상적 이해와 관련된 기능(감정이입, 추론, 유추, 보간, 삽입, 해석), 의사결정과정과 관련된 기능(문제인식, 분석, 대안 확인, 결과 예상, 전략 선택 발전, 전략 적용)이 있다.

 

(3)가치 및 태도

역사교육에서는 학생에게 일반적 가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내면화시키며, 실제적 행동에서 나오도록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이를위해 주입보다는 명료화, 가치분석의 방법이 많이 이용되고 있다. 즉 학생들 스스로 가치를 선택하게 하고 그 가치를 소중하게 하며, 나아가서 선택한 가치와 일관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것.

 

 

 

이러한 기능적 근거와 함게 교육목표 설정의 근거로 학문적 측면, 사회적 측면, 학습자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학문적 측면은 교과 전문가의 견해, 사회적 측면은 현대사회에 관한 사실, 학습자 측면은 학습자에 관한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기존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사회적 측면의 역사교육이 강조되었으나 최근에 와서야 지식이해, 기능, 가치태도로 비교적 균형있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학습자 측면을 고려한 목표를 좀더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 목표모형 이론에 너무 종속되어 역사의 특성이 반영되지 못한 점, 중학교 사회과의 민주시민 양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가 제시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다.

역사교육 목표 설정시 학문적 측면을 고려해 역사교육의 목적이나 목표 분류를 준거로 활용 할 수 있다. 지식 이해 영역을 강조해야 하지만 이를 너무 강조할 경우 수업이 천편일률적 진행을 할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세가지 영역을 균형 있게 활용해야 한다.

사회적 측면은 보통 국가적 수준에서 다뤄지므로 학교 수업에서 크게 유념할 필요는 없지만 역사교육이 공동체 문화 유산의 전승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목표설정을 하면 된다.

학습자 측면은 국가적 단계 뿐만 아니라 학교 수업에서도 더욱 중시할 필요가 있다. 국가교육과정에서 학생들의 심리적 측면을 고려하긴 하지만 구체성이 떨어지므로 교사들은 학생수준이나 흥미를 고려해 역사교육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또한 교육목표는 학교급별이나, 추상성과 포괄성의 정도에 따라 몇 단계로 분류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위계화라고 한다. 교육목적과 수업목표를 구분하고, 수업목표를 다시 일반적 수업목표와 명세적 수업목표로 구분할 수 있으며, 초중고등학교 별로 역사교육목표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수준별 차이가 드러나도록 체계화 해야 한다.

 

또한 목표는 가급적 구체적으로 진술되어야 한다. 교육목표의 상세화가 이루어지면 교사는 자기가 가르쳐야 할 내용과 행동을 분명히 파악해서 수업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전개할 수 있다. 또한 학습동기의 유발과 평가문항 작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 보통 명시적인 행동목표라고 하는데 이는 구체적 진술을 위해 행위동사를 이용해 달성해야 할 목표 수준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야 하며, 내용과 행동을 함께, 학생의 행동으로 진술해야 한다.

이에 대한 대안도 제시되어 있는데 이를 구현목표라고 한다. 이는 교사가 학생들을 이끌어가는 특별한 목표나 행동형석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사고-감정-행동의 형식을 이끌어 가도록 의도한 것이다. 구현목표는 목표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수업의 범주만을 규정한 것으로 과정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구현목표는 평가의 어려움과 객관성이 부족이라는 단점을 지닌다. 그러나 역사과의 특성상 명시적 행동목표와 구현목표의 장점을 적절하게 취해 적당한 학습목표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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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각주:1]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욕은 아프리카 전체를 둘러싸고 전개되어 이와 같이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화 되었다. 식민지화 이후의 아프리카는 크게 세부분에 걸쳐서 교과서에 등장한다.

1.세계대전 중심으로 한 열강의 세력 다툼의 한 일면 2.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과 제3세계 구축 3. 지역 분쟁과 내전. 이렇게 나눈 이유는 단순히 교과서에 등장하는 부분으로 나눈 것, 1960년이 될때까지 이집트, 남아공, 에티오피아, 라이베리아 외에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가 없기 때문에 그전까지 크게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음.

 

1.19~20세기 열강의 각축장 아프리카

19세기말 유럽열강의 식민지 확대 경쟁으로 여러 국가의 충돌이 일어나 긴장 관계가 점점 증가했다. 네덜란드계열인 보어인과 영국은 지금의 남아공 지역에서 보어전쟁을 일으켰고(1899~1902), 횡단 정책을 추진하는 프랑스와 종단 정책을 추진하는 영국이 파쇼다에서 부딪쳐 파쇼다 사건(1898)을 일으켰으며, 3B 정책을 추진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황제의 독일과 다른 열강들이 모로코에서 부딪쳐 두차례의 모로코 사건을 일으켰다. (1905, 1911)

제1차 모로코사건은 1905년 독일의 빌헬름2세가 프랑스의 세력권이던 모로코의 탕지르항을 방문해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주장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로인해 에스파냐의 알제시라스에서 프랑스는 영국 및 여러 나라의 지원으로 우월한 지위 보장 및 독일의 양보를 받아낸 사건이다.

 

제2차 모로코사건은 1991년 모로코에서 내란이 발생해 프랑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독일이 모로코의 아가디로 항에 군함을 파견해 일어난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영국이 프랑스를 강력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독일이 양보하고 프랑스가 ㅗ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이후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대전이 발생하기 직전 이탈리아는 이토전쟁을 일으켜 트리폴리를 점령하기도 했다. 대전 중에는 아프리카 식민지의 인력과 물자도 전쟁에 동원되었다. 아프리카는 기간 산업(도로, 철도 등)이 부족해 200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주민들이 군수품, 무기, 부상자 등을 운반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서 병사와 짐꾼으로 복무한 아프리카인이 10만 명 이상 되었다고 한다. 에티오피아와 모로코는 중립국이었지만 대부분의 식민지는 점령국편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 후 상황 정리를 위해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이 확인된다.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패전국인 독일의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열강은 식민지를 대부분 그대로 보유했다. 실제로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단순히 위임 형식으로 독일의 식민지를 재분할하기만 했던 것이다. 결국 콩고 이북의 독일 점령 지역은 프랑스가 가져 가게 된다. 이에 북아프리카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중 영국을 지원하였던 이집트가 독립 운동을 전개해 결국 독립을 하였으며(1922), 모로코, 튀니지 등도 독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림 2. 1차세계대전후 아프리카의 민족운동. (더텍스트 세계사)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아프리카는 희생의 대륙이었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독일은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를 점령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이 예전 패배를 설욕하고자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는데, 이에 국제연맹이 비난하자 이탈리아는 바로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게 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카이로(1943.2), 얄타(1945.2), 포츠담(1945.7)에서 회담이 열리는데 카이로 회담에서는 일본이 침략하고 점령한 곳을 적당한 시기에 (in due course)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각주:2]

 

 

 

2.2차세계대전 이후의 아프리카

-세계 질서의 다원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열강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유지하려고 했지만 미국과 소련은 민족 자결주의를 내세우며 식민지 유지를 반대했다. 이에 따라 전후 20년간 아시아에서 20개국 아프리카에서 33개국이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를 표방한 신생 독립 국가들이 형성되었으며, 70년대 초에는 합쳐 70여개국이 넘었다. 이들 국가는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였으며, 빈곤한 개발도상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미소 양국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제3세계, 또는 비동맹 국가라고 부른다.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1952)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1956)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를 끌여들어 이집트를 공격하기도 했으나(제2차 중동전쟁) 국제 연합의 결의에 따라 철수했다. 이들 주변의 아랍문화권 나라 리비아(1951), 모로코(1956), 알제리(1962)등은 일찍이 독립을 달성했다.

뒤이어 1957년 가나가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린 1960년에만 17개 독립 국가가 생겼다. 이런 기세로 1963년 아프리카통일기구(OAU)가 조직되었다.

모잠비크와 앙골라는(1974~1975)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포르투갈이 이들 식민지를 본국의 연장이라고 주장하며 독립을 강력하게 억제해 뒤늦게 독립했다.

리비아는 1969년 극단주의적 민족주의자인 카다피가 정권을 잡고 독재를 행했는데 국제적 테러를 자행해 미국의 폭격을 받았다. 2011년에 반독재 시위가 일어나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고 과도국가위원회 정부가 출범되어 활동중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는 에스파냐가 광석자원이 풍부한 서부 사하라를 포기하자 이의 병합을 원하는 토착민세력과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치뤘다. 1988년 UN과 OAU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1990년대에도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제3세계의 5개국(인도,미얀마,인도네시아,파키스탄,실론)은 1954년 콜롬보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평화 공존의 5원칙을 제시했다.

다음해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반둥에서 열린 반둥 회의에서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29개국 독립국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평화 10원칙을 발표하고  상호 경제 협력을 체결했다.

점점 이들 국가의 수가 증가하면서 제2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1957)때에는 40여개국이 참가하고, 제 4 차 회의(1973)에는 73개국이 참가했다.

또한 현대의 세계화와 지역화의 흐름은 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 세계의 각국은 지역별로 경제 블록을 형성했는데 아프리카에서도 남아프리카 관세동맹(SACU 1969. 남아공, 보츠와나, 레소토, 나미비아, 스와질랜드)가 결성되었다.

 

3.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현대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내전이 일어났으며 아직도 진행중인 곳이 많다. 열강의 이간질적 식민 통치 및 지리와 환경 및 2000개가 넘는 부족, 800개가 넘는 언어 등 다원성을 무시한별 생각없이 자로 나눈듯한 국경선 분리에 대한 휴우증, 이슬람 극단주의의와 기독교의 대립같은 종교, 백인과 흑인이나 토착 종족간이라는 인종같은 사회 통합의 실패, 자원 문제로 갈등을 일으켜 발생했다. 또한 독립 후에도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1인독재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자체적인 노력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국제 연합(UN)산하의 국제 평화 유지군이 파견되는 등 해결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르완다에서는 1990년대 후투 족과 투치 족간의 분쟁으로 수십만 명이 학살되었고,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 지역은 벨기에가 통치하던 지역이였는데, 벨기에가 소수의 투치 족 지주가 다수의 후투족 영세농을 지배하도록 했던 것이 원인이다. 이후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하면서 다수의 후투 족이 집권해 두 종족간의 분쟁이 반복되었다.

 

수단에서는 2003년 초 다르푸르 지역을 중심으로 북부 아랍계와 남부의 흑인계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영국은 수단을 통치할때 북부 아랍계에게 정경권을 집중시켰고, 서남부의 흑인을 소외시켰는데 독립 후에도 이런 구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분란이 발생하고 있다.

 

이외에도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오의 전쟁, 우간다 내전, 벨기에령 콩고인 자이레의 내전, 나이지리아의 내전, 짐바브웨의 내전끝에 얻은 독립(1980) 등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남아공은 오랫동안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악명 높은 인종 차별 정책으로인해 월드컵 대회 및 올림픽 출전이 금지된 나라일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했다. 아파르트 헤이트는 사람을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 등으로 구분하고, 그에 따라 공공장소 출입과 편의시설 이용부터 교육, 주민등록, 거주 지역 등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정책이다.

1990년 국민당 정부(백인 정부) 구속 중인 만델라는 석방하고 4년만에 다인종 선거에서 승리해 백인 통치는 막을 내렸으며, 만델라가 이끄는 민족 회의는 수십 년 동안 인종 갈등을 치유하면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국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대한 해결책중 하나로 적극적인 과거사정리를 실시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참고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케이스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흐름은 국가간의 빈부 격차도 확대시켰으며, 아프리카에는 가난과 전쟁 등으로 인한 난민, 기아, 질병의 문제가 심각하게 퍼져있어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하다.

 

 그림 4- 세계의 분쟁 지도

그림 5 - 세계의 기아 지도 아.. 아프리카여..  와중에 북한이 눈에 띈다. 전쟁, 기아... 남얘기가 아니다

  1. 세계사 교학사에 있는 그림. 근데 다른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 더 보기 쉬웠는데... 왜 현직학교교사만 교과서를 공유해주는거냐. ㅡ.ㅡ 빡침 [본문으로]
  2. 특히 카이로 선언에서 적당한 시기에 라고 하는 내용때문에 우리나라의 독립후 소련군과 미군정이 진주해 신탁통치안을 제시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얄타 회담은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을 결정한 내용, 포츠담 회담은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재확인 한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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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육의 목적을 밝히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교과적 차원의 논의로 역사교육의 가치 정당화이다. 이는 역사교육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며 포괄적으로 논의된다. 둘째는 내용 선정과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교육의 목표를 체계적이고 명료하게 제시한 것이다. 전자를 목적론, 후자를 목표론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역사교육 개론서중 하나인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최상훈 외 공저, 2007)에서도 목적과 목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목적에 대한 논의는 논란의 여지가 많으므로 일반적인 목적을 다섯가지를 들어 설명했다. 그런데 그중에서 특히 다섯번째 목적인 역사의식과 역사적 사고력의 함양에 대해서는 하위개념까지 좀 더 설명했는데 이는 역사의식과 역사적 사고의 개념이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기존 역사와 대비되는 '역사교육'자체의 목적을 설정하는데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각주:1]

 

1.역사교육의 목적에 대한 논의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우리의 역사교육은 파행적으로 이루어졌다. 해방 후에야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그와함께 역사를 왜 배우는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역사교육의 목적에 대한 논의는 시대와 주체에 따라 각각 다른 방향에서 논의되어 왔다. 우리나라 역사교육 논의의 특징은 역사교육의 교과 외적인 영향력이 많이 있는 상태에서 그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교육에 대한 논의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보다는 "어떻게 역사를 배울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역사교육에 대한 당위성을 전제로 한 채의 논의들이 많이 진행되었다. 시대적으로 역사교육의 목적에 대해서 논할 필요가 없듯이 여겨졌다. 당연히 역사교육의 정당화에 관한 논의도 적게 이루어졌다. 즉 역사관 혹은 역사적 태도의 검토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 이후에 들어 구성주의적 관점, 수요자 중심의 교육 등 다양한 관점과 역사교육의 위상 변화와 함께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즉 역사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도 학자간의 차이가 있다.[각주:2]

이인호 교수는 바람직한 인간성 함양과 정신적 공감의 확대를, 정현백 교수는 역사의 사회비판적 기능을 중시하고 인간해방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논쟁으로 교육의 일반 목적과 역사교육의 교과적 목적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다. 리와 화이트의 논쟁이 있다. 화이트는 학교 교과로의 역사는 민주 시민의 덕목을 기르는 교육의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며, 리는  역사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는 리가 주장하는 역사의 고유한 변형적 목적도 개인이 속한 사회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2.역사교육 목적론의 허실

역사교육계에서는 이러한 목적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양호환은 '역사교육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비판하면서 역사교과의 가치를 정당화 하는 작업이 실제 학교 역사교육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검토했다. 

양호화은 먼저 목적론에 대해

1.역사교육의 문제를 논의하는 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고.-목적을 정한다고 해서 가르칠 내용이 정해지는 것이 아닌데 목적을 정하면 해결될 것처럼 논의하는 것. 

2. 교육과정 혹은 교육방법적 측면에서 역사교육의 의의나 전통적인 역사교육 방식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을때 이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등장했으며

3. 교사의 역할이 배제된채 논의되고 있다.

결국 현재 역사교육의 목적은 실질없이 본질화- 실체가 없는데 목적을 규명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된것- 되어있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역사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먼저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다. 구체적인 이유로는

1.역사교육 문제와 해결을 목적론으로 단순화 하는 견해에 대해 역사교육의 목적을 정한다고 가르칠 내용이 자동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  

2.현재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교육의 목적을 정하는 절차와 방식 속에 역사교육의 내용을 하향식으로 결정하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고, 이 구도하에서 현장과 교사는 배제된다. 또한 목적 위주의 사고방식은 상황과 맥락의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획일적 구도로 역사 학습을 예상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주체적인 입장이 아닌 전달자로서 대상화 되버린다는 것이다.

3.이해 당사자를 배격하면서 '중립성 확보'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현재 교육과정 논의 구도속에서는 역사교과의 가치를 정당화하고 역사교과의 위상강화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즉 현행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역사교육의 목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교과의 가치를 정당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교과의 위치 강화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은 현실화가 어렵다는 말. 현행 교육과정은 교과의 비중을 정하는 것은 교육 과정 연구자이며 이들의 견해가 크게 반영되는 구도에서 역사 교과의 유용성을 주장하는 것은 '영역 이기주의'일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결론은 역사교육의 목적 설정 논의를 좀 더 실질화시켜 쟁론의 과정이 되게 하고,[각주:3] 교사가 가르칠 내용을 재구성할 수 있는 재량과 범주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교과 외적인 영향이 큰 역사교과의 특성상 외부 압력에 대응하는 성격을 지니는 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에 현재 진행되는 논의의 권력구조나 담론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환기시켰다는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일차적으로 역사교육의 위기가 등장하게 된 논의 구도 자체에 대한 검토와 통합사회과측의 논리의 부당성을 항목별로 따지면서 사회과 통합 논리에 대응함과 동시에 교과교육 이론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는 '역사적 사고'를 필두로 다양한 개념들이 등장해 역사교과의 특수성과 정당성에 대해서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역사교육의 목적이 역사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지만 역사교육만의 고유한 영역과도 관련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최근의 개론서인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에서 역사교육의 목적에 대해 정리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교훈의 획득 : 역사는 유용하다고 보고 과거의 사례를 통해 현재 닥친 일에 합리적인 판단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역사는 일회성이나 특수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사례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고,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과 지배층 중심 위주의 역사서술에 대한 위험성 제고, 과거 사건에 대한 관점이나 평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반박이 있다.

 

②유산의 전승 : 한 사회가 조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구성원의 동질감과 정체성이 필요하다. 정체성 확립을 위해 공통의 과거를 이용하는 것이다. 공동 유산의 전수를 역사교육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사회적 또는 정치적, 실용적 목적을 위해 과거를 이용하는 것이라는 관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③현재의 이해 : 역사적 사실의 습득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는다는 점이다. 현재 현상의 이해하는데(원인을 알려는 등) 현상의 과거 혹은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의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

현재의 이해에 대한 견해에는 현재의 특정 문제가 과거의 어떤 역사적 사실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워 막연한 관련성만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비판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방법론보다 다양한 각도,  비판적으로  파악하는데 역사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④인격과 교양의 육성

... 고매한 인격과 풍부한 교양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이런 자화자찬.....ㅋ.ㅋ) 이 견해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에게 엘리트적 역사관이라 비판받았으나 오늘날에는 역사도 일반인의 관심사이며, 보통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되는 상황에 역사가 엘리트의 학문이라는 생각은 바뀌어야 한다.

 

⑤역사의식과 역사적 사고력의 함양

역사교육의 목적으로 외적인 기능이 아닌 자체적인 역사의식과 역사적 사고력의 함양을 들 수 있다. 역사의식은 역사에 대한 견해, 사상, 느낌, 감정을 가리키는 용어로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역사적 사고력은 어떤 문제나 상황에 처했을때 역사학의 특성에 근거해서 생각하는 능력을 일컫는데 이또한 다양하게 정의된다. 굳이 둘의 차이는 역사의식은 역사가 무엇인지, 역사 문제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견해를 의미하는데, 역사적 사고력은 역사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정신활동이라는 차이가 있다.

 

 

 

  1. 그러므로 목적에 대해서 생각할때 역사교육의 외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역사교육"자체의 목적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는것. 그래야 '역사교육" 자체의 가치, 혹은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파팅톤(Geoffrey Partington)이 제시한 전통적인 역사교육의 목적 ①문화유산의 전승 ②도덕 교육 ③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해의 증진. - 파팅톤은 이러한 견해가 선험적 전제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인지, 경험적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불확실하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엔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 역사를 배운다는 사고 과정이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3. 읽으면서 이부분이 이해하기 좀 어려운데 일단은 단순하게 목적은 목표를 결정하고 목표는 구체적인 실행 방법들에 대해서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목적을 옳고 그름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하위 개념으로 나누어 쟁론화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라는 식으로 이해했다. 목적의 쟁론화를 통한 다양화는 실제 현장의 가르치는 방법의 다양화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역사교육의 목적을 역사적 사고력의 함양이다. 라고 주장했을때 이에 관해 주장에 대한 비판 혹은, 하위개념의 제시등으로 담론을 형성해 쟁론화 해야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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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육의 의미는 역사교육의 이론 1장 역사교육의 개념과 연구 영역의 첫 부분. 이를 좀더 구체화 시킨 것이 양호환 선생님의 책 역사교육의 입론과 구상 1장이고, 김한종 선생님의 역사수업의 원리 책 1장 1부에도 약간 다루고 있다. 역사교육의 입론과 구상 1장에서는 역사교육론이 독립적기 위해 필요한 요소인 교수내용 지식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고 역사수업의 원리에서는 역사교육 독자적 학문화에 이르기 까지의 담론에 대해서 서술했다. (사실 나한테 좀더 필요한건 교수내용 지식같으므로 그쪽을 좀더 봐야겠다.)

 

역사교육의 의미에 대해서 논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하면 역사교육이라는 이론적 영역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역사교육'이 단순히 역사의 내용+교육학적 방법이라면 사범대학의 존재의미는 확 떨어진다. 아무튼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의 개념 자체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해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교육이 가지는 의미는 '역사'라는 담론과 '역사교육'이라는 담론의 차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며, 기존의 교육학+역사가 아닌 '역사교육'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역사교육'이 가리키는 영역이 어떤것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각주:1]

 

교과교육학의 의미는 처음 도입될 때 초중등학교에서 가르치는데 유용한 교수 방법의 개발과 적용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었으나 이후 양자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포괄적 결합시도가 이루어졌으며, 일반화된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별도의 이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전제로 한다.  윌슨과 사이크스는 이를 "교과에 특정적(特定的)인 교수지식(subject-specific pedagogical knowledge)"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슐만(Lee S. Shulman, 이승만하고 발음이 비슷하죠잉.-_-ㅋ이슐만이라고 외우시면 간편할듯)이 제시한 교수내용지식과 비슷한 개념이다. 슐만은 교사가 잘 가르치기 위한 지식을 일곱가지 제시한 후(내용지식, 일반교수법적 지식, 교육 과정 지식, 교수 내용지식, 학습자의 특성에 대한 지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맥락에 관한 지식, 교육의 목적 가치 철학적 역사적 근거에 대한 지식)에 다시 세가지로 정리했다. (내용 지식[각주:2], 교수내용 지식, 교육과정 지식[각주:3])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수내용 지식이다. 교수내용 지식의 차이는 강의력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이는 경력교사와 초임교사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각주:4]

교수내용 지식의 세부 영역(?)으로 유추, 은유, 직유, 예증, 감정이입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교과 내용에 관한 지식, 학습자에 대한 이해, 일반 교육학적 지식이 통합적으로 반영된 교수 내용 지식의 산물이다. 이중에서 실제 교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교수 내용 지식으로는 유추와 감정이입이 있다.

 

유추는 학생들이 미리 알고있는 것(기반사례)을 바탕으로 비슷한 유형의 새로운 것(표적사례)을 설명하는 것이다. 방향과 목적이 분명한 유추를 하려면 유추 대상의 공통적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친숙한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 또한 공통점을 가르치고 난 후에 차이점도 가르쳐야 한다.

 

감정이입은 수업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이 과거 상황에 처하게 하거나 과거인과 동일시 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에 파트를 따로 만들어서 정리해야겠다)

 

이러한 교수내용 지식이 적절하게 현장에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수단으로의 유추, 감정이입 등에 대한 특성을 파악하고 사용해야 한다. 교사가 학생들의 특성이나 교과 내용의 파악이 미흡해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교수내용 지식의 범위 안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수내용 지식의 특성파악이 중요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교과특정적 교수지식(교수내용지식)은 전 교과에 걸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적 개념으로 확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각 교과의 특성한 인식론을 기반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잘 가르치려면 무조건 많이 아는 것, 무조건 잘 가르치기만 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와인버그와 윌슨의 연구에서 시사하는 비전공자와 전공자의 차이인 수업에 경험적 산물이자 신념체계까지 반영한다는 인식론적인 측면부터의 차이발생은 교수내용지식의 의미를 뒷받침해주며 특히 우리나라같이 사회과 통합등등 역사교사가 지리,윤리도 가르치기를 원하는 구조의 사회에서 좀더 유의미할것이다.

 

 

  1. 책 내용을 인용하자면 역사교과 교육이론 필요의 당위성과 그것의 구성요소를 밝히는 것. [본문으로]
  2. 과목 자체의 내용에 대한 지식 [본문으로]
  3. 커리큘럼에 관한 지식, 계열성이라든가 단원 구성과 같은 [본문으로]
  4. 이는 미국에서 교사가 되는 과정이 학부 졸업 후 대학원 과정을 따로 거쳐야지 교사가 될 수 있고,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 실험이다. 와인버그,윌슨의 연구, 에번스의 연구, 굿문즈도티와 슐만의 연구모두 경력 교사와 신임 교사의 강의력의 차이는 교수내용지식의 차이라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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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토픽2013. 4. 24.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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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연대

1806 영국 케이프타운 점령 - 1830 프랑스 알제리 점령 - 1847 라이베리아 독립(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 - 1878 스탠리 콩고강 유역 탐험(벨기에의 콩고 점령) -1884 베를린 회의(아프리카 분할 문제 논의) - 1898 파쇼다 사건

 

 

19세기 제2차산업혁명의 발달에 힘입어 열강은 세계를 식민지화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로 크게 나눠서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아프리카는 수난의 역사가 지속... 어쩌면 너무 불행한 역사만 기억하기때문에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를 설명하려면 제국주의의 정의와 배경, 전개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지만 일단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점령했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보기로.

(1)아프리카 탐험 초기

이전까지의 유럽인들은 수면병,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 때문에 아프리카 내륙으로 깊숙히 진출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는 연안 지방을 중심으로 무역 거점을 점령했을 뿐이다. 본격적인 내륙 진출은 풍토병에 대한 치료제 개발 이후부터이다.

또한 탐험가들의 여행도 큰 기여를 했다. 리빙스턴과 스탠리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리빙스턴은 스코트랜드 출신의 선교사로 전도를 목적으로 1840년 남아프리카에 갔다. 그런데 이들의 성향 또한 백인의 책무를 가진(?) 성향이었다. 리빙스턴은 영국 군대와 상인이 들어와야 선교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빙스턴은 1852년 케이프타운을 출발해 육로로 서안의 루안다를 커져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해 켈리마네에 갔다. 중간에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그리고 1856년 귀국해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기라는 책을 펴냈고 이후 1856년 다시 아프리카를 탐험했다. 그는 이때 1856년 유럽인들의 노예사냥 실태를 폭로해 노예무역 금지에 일정 기여했다. 리빙스턴은 1871년 나일 강의 수원을 찾다 실종되었는데 이를 찾기위해 '뉴욕헤럴드'가 미국 출신의 스탠리를 파견했다.  스탠리와 리빙스턴은 1871년 11월 아프리카 중부의 탕가니카 호수 근처의 마을에서 만났다. 그 후 리빙스턴은 스탠리 일행과 조사를 같이하다 1873년 사망했다.

이들의 탐험은 열강의 아프리카 침략에 이용되었다. 리빙스턴의 탐험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스탠리는 벨기에의 왕이던 레오폴드2세에게 고용되어 콩고강 일대를 탐험하고 벨기에의 침략을 도왔다. 벨기에는 콩고를 직접 지배하면서 복리 후생 시설 등을 제공했으나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권리는 무시했다.

백인의 짐

 

백인의 책무를 다하라

그대가 길러낸 가장 훌륭한 후손을 보내라

그대의 자식을들 유배지로 보내라

그대 포로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거칠고 사나운 그대들의 새 백성을 돌보라

무뚝뚝한 그들은 그들은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

 

백인의 책무를 다하라

평화를 위한 격렬한 싸움 속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입을 채우고

질병을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네가 너의 목적을 달성할 떄쯤

너를 원하는 다른 미개인들을 위해

다른 원주민과 이교도에게로 시선을 돌려라

그들의 광기를 끝낸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키플링-

세실 로즈의 유언집(1902)에서

영국은 국토가 좁아 3,6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600만 명만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 영국의 생산품을 팔 수 있는 지구상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영국인이 세계 제1의 인종이고, 우리 영국인이 지배하는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인류가 행복해지며,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 1 세실로즈

 

(2)아프리카 분할의 전개

영국이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로부터 1815년 케이프타운 식민지(희망봉이라고 생각하면됨) 얻자 네덜란드의 후손인 보어인은 북쪽으로 이동해 트랜스바알과 오렌지자유국을 세웠다.

1875년 이집트의 재정난을 이용해서 수에즈 운하의 최대가 되고 이후 아라비 파샤의 민족주의 반란을 제압해 1882년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남북의 기점을 바탕으로 영국은 종단정책을 추진했다.

앞서 영국이 케이프타운 식민지를 얻자 보어인이 트랜스바알과 오린지자유국을 세우는데. 트랜스바알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를 차지하기 위해 보어전쟁을 일으켰다.(1899~1902) 이 결과로 영국은 트랜스바알을 합병하고 남아프리카 전체를 차지한다. 그러나 후에 영연방 자치령인 남아공 연방을 조직하게 된다.(1910)

 

프랑스는 1830년 투르크로부터 알제리를 획득하고 이를 거점으로 동진해 튀니지를 얻었다(1881), 남쪽으로도 진겨개 사하라사막을 포함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와 적도아프리카를 획득하고 홍해 인근에 약간의 땅과 마다가스카르 섬을 얻었다(1896) 이렇게 프랑스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을 세웠으나 파쇼다에서 후퇴해 영국의 이집트 지밸르 인정하는 대신 모로코에 대한 진출을 인정받아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따(1911)

중간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놓고 대립했다. 프랑스인에 의해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했으나 후에 최대 주주는 영국이 되었고 결국 이집트를 영국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은 파쇼다(지금의 수단 중부)에서 마주쳐 파쇼다 사건이 일어났지만(1898) 전술한대로 프랑스가 양보하고 후에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게 된다.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달성한 후 유럽에서 현상유지에 힘쓰나 국가차원이 아닌 개별적 차원에서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이러한 개별적 진출을 토대로 독일은 토고와 카메룬을 얻고(1884~1885),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이후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으로 독일은 크루거 전보사건(1896)을 일으켜 영국과 대립하고, 모로코에서도 2차례의 모로코 사건(1905, 1911)을 일으켜 프랑스와 충돌했다.[각주:1] 이때 1911년 열강의 관심이 모로코 사건에 쏠려 있는 틈을 타 이탈리아가 투르크와 전쟁을 일으켜 트리폴리를 점령하기도 했다.(이토전쟁)

 

이탈리아는 뒤늦게 통일 달성후 제국의 위신을 위해 아프리카로 진출했으나 홍해연안의 에리트리아와 인도양의 이탈리아령 소마릴랜드를 획득했으나, 프랑스에게 튀니지를 선취당하고 에티오피아 군에게 패배했다.(1896, 후에 2차 세계대전때 무솔리니는 이때의 패배를 설욕한다는 명분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에 19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서 트리폴리를 얻고,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스탠리의 탐험을 후원한 벨기에는 콩고자유국을 승인해 (1884) 관리하다가 1908년 식민지로 병합했고,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소유하게 되었다.

 

결국 1914년경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유지하는 나라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였다.

라이베리아는 1841년 흑인 조지프 로버츠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 되었고, 1847년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의 노예제 폐지 이후 해방노예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때 아프리카에 돌아온 해방노예들이 건설한 국가이다. '자유의 나라'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초기엔 미국의 보호국이고 지배층은 백인, 수도는 미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이름을 딴 먼로비아 였다. 즉 미국을 그대로 본뜻것.

 

그림 3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왼쪽 맨위에 모로코가 보임.

 

 

 

(3)아프리카 인의 저항

 

당.연. 히. 아프리카인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인들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30여년간 저항했으며, 프랑스는 10여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겨우 점령할 수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프랑스와 두차례 전쟁 끝에 여왕이 폐위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곳곳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수단에서는 반외세를 주장하는 마흐디 운동 세력이 이집트를 간섭하던 영국을 공격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독일이 지배하던 나미비아 지역에서는 토착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탄자니아 지역에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주술사가 앞장서기도 했다. 1905년 일어난 봉기를 마지(스와힐리어로 물)마지 봉기라고 한다. 독일인들이 면화생산을 위해 탄자니아 인들을 강제동원하자 주술사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이다. 3년간 독일에 맞섰지만 무참히 진압당했다.

에티오피아는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민족 운동을 주도했다.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통일 후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수에즈 운하 개통 후에 에티오피아는 주요 거점이 되어 영,프,이가 차지하려고 했으며, 1890년 이탈리아가 침략했으나 막아냈으며 1896년엔 아도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서부아프리카에서는 사무리 투레가 민족 운동을 이끌었는데 사모리투레는 니제르강 유역에 제국을 건설하고 프랑스에 저항했으나 1898년 사모리 투레가 체포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줄루 왕국의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림3 출처 더텍스트 세계사-

  1. 모로코사건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단순히 아프리카 점령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 세계대전으로 가는 방향에서 열강끼리 부딪힌 사건이므로 제국주의와 연관되어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일것 같다. 교과서마다 아프리카 분할, 제국주의파트별로 다르게 실어 놓았는데 제국주의를 설명할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수월한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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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한문사료2013. 4. 24.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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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이후 교과서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7차교육과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이들 국가의 속성에 대해서 나오지는 않는데 이번 2009개정교과서는 부여, 고구려, 마한의 목지국을 연맹왕국으로 설명하고 있다.[각주:1]이들 각 나라에 대한 것은 중국의 여러 삼국지, 사기, 위서, 후한서 등등에도 나와있지만 교과서는 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인용하고 있는 듯.

초기국가의 특징은 국왕의 출현과 국가체제의 정비, 영토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래의 군장세력이 잔존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부여의 마가구가저가나 고구려의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등의 가에서 고추가를 형성했다는 것은 군장국가 중에서도 유력한 부족의 귀족이 우대되고 일반 군장과 구별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한통) 내용이 많으니 고구려는 다음번에 한꺼번에 봐봐야겠다.

1.부여

(1)영고

以殷正月祭天, ……(中略)……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中略)……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2)4조금법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男女淫 (..)皆殺之.

尤憎妒 已殺, 尸之國南山上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兄死妻嫂, 與匈奴同俗.

(3)부여의 위치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4)부여의 사회

方可二千里 戶八萬 其民土著 有宮室·倉庫·牢獄.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麤大, 性彊勇謹厚, 不寇鈔. 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豬加·狗加 大使·大使者·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大者主數千家, 小者數百家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부여의 건국 설화는 여러개가 있다. 북부여에 관한 설화, 동부여에 관한 설화. 북부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흘승골성(요서)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라고 했으며 그의 아들 부루가 동쪽으로 이동해 동부여를 세웠다는 것이다.

동부여에 관한 다른 설은 북부여왕 해부루의 신하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동해 해변가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우라고 하여 아란불이 왕에게 건의하여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동부여라고 칭했으며, 그후 금와가 뒤를 이었다는 것.

이를통해 부여가 요서 지방에 건국했다 동부여로 이동했다. 동부여는 지금의 장춘시 외곽지역을 말하는듯 북부여의 건국연대가 기원전1세기로 기록된 것은 이 무렵부터 부여가 강력한 왕국으로 등장한 것을 의미한다.

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떄까지 1천년 역사와 전성기의 영토는 북으로 흑룡강 이남, 남으로 백두산에서 요하 상류, 동쪽으로 연해주, 3세기경 영토 사방 2천리 인구 8만호였다고 한다.

주변에 고구려,선비와 국경을 대고 있었다.

세습왕 아래에는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는데 저마다 행정 구역인 사출도를 다스렸다. 부여 초기에는 가들이 모인 평의회에서 주요 국사를 결정해 왕권이 약했으나 점점 왕권이 강화되었다.  

부여는 귀족인 가가 있고 그 밑에 호민으로 불리는 지배층이 있으며, 민과 하호로 불리는 천민층이 있었다.[각주:2] 왕이 죽으면 후하게 장사지냈으며,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고

매년 12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국가의 단합을 도모했다. 이때 국가중대사를 토의하기도 하고, 전쟁시 우제점을 치기도 했다.이 시기의 제천행사들은 국가적인 대행사로 군장국가의 제천행사가 국가적인 행사로 바뀐것을 나타낸다.

고조선의 8조 금법과 비슷한 4조 금법이 전해진다. 이를통해 부여는 엄벌주의, 가부장적 사회 및 사유재산, 노예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위략에는 고구려에도 부여와 같이 도둑질한 자는 12배 배상을 했다 했는데, 이러한 법률은 초기국가 시대 공통된 내용으로 짐작된다.

 

2.고구려

本有五族, 有涓奴部‧ ……(中略)…… 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中略)……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雛加. 涓奴部本國主, 今雖不爲王, 適統代人, 得稱古雛加, 亦得立宗廟, 祠靈星‧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加古雛之號. 諸大加亦自置使者‧皁衣‧先人, 名皆達於王, 如卿大夫之家臣, 會同坐起, 不得與王家使者‧皁衣先人同列.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3.옥저

(1)옥저의 위치와 주변국, 크기

東沃沮在高句麗 蓋馬大山之東, (..중략.)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2)골장제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 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䥶,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

 

(3)민며느리제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4)고구려에 복속되어 공물을 바치는 옥저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中略)…… 使相主領. 又使大加, ……(中略)…… 統責其租稅. 貊布‧魚‧鹽‧ ……(中略)…… 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 ……(中略)…… 以爲婢妾, 遇之如奴僕.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옥저는 함경남도 부근에 위치해 느슨한 연맹국가를 영위하고 있었다. 변방에 위치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었으나 큰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중 옥저현후 세력이 중심세력을 형성했다고 알려졌다.(위지동이전에 보면  불내, 여화, 옥저국이 한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현이 폐지되면서 각기 제후국이 되었는데 옥저현이 중심이 됐다고 알려짐)

 총 5천호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고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다. 이후 한사군 설치후 임둔군 지배하에 있다 낙랑군 밑으로 갔다가 고구려 태조왕 때 고구려에 복속되어 천리길을 걸어 공납으로 바쳤다고 전해진다.

옥저에는 어린 여자가 남편 집에 가서 살다 혼인하는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뼈를 추려서 가족무덤인 목관에 안치하는 풍습이 있었다.(골장제)

 

4.동예

(1)책화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中略)……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2)무천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3)전투에 능하며 단궁과 반어피, 과하마가 유명했다.

能步戰. 樂浪檀弓 出其地. 其海出班魚皮,又出果下馬, 漢 桓時獻之.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동예는 옥저와 같이 느슨한 연맹체국가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파악되며 읍락마다 장수가 읍군 삼로등이 지배했으며, 불내예후국이가장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해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명주 삼베, 단궁이라 불리는 활과 과하마라는 말, 그리고 반어피 등이 특산품이었다.

동예는 총2만호를 거느리는 비교적 큰 나라였으나 왕국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족외혼의 풍습과 각 부족의 구역이 구분되어 책화라는 부족 영역 보호책이 있었다. 동예에도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5.삼한

(1)삼한의 위치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中略)……

(2)마한의 사회정치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中略)…… 凡五十餘國. ……(中略)……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中略)……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中略)……

(3)하호의 존재 (고구려의 하호와 비교된다)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中略)……

(4)강력한 왕권의 부재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中略)……

(5)사회풍속, 기풍제와 시월제, 소도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毛本, 木, 作本, 誤.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진수가 위략을 참고하여 삼한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했는데 삼한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삼한은 예맥족이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등의 연맹왕국과 고대왕국을 건설해 갈때 한강 이남의 한족 사회에서도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에 기초하여 정치적 통합운동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辰국, 기원전 4세기경) 진국은 한나라와 직접 교역했다고도 전해지는데 위만조선의 성립으로 기존 고조선의 유이민이 한강 이남으로 유입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해 삼한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남쪽으로 와 한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삼한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한은 약 50여 개(54개)의 소국으로 이뤄졌고 10만여 호를 거느렸고 가장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고 전해진다. 진한과 변한에 속한 소국은 이보다 적었다.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개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소국은 마한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으로 불렸던 것처럼 왕의 호칭을 가진 존재가 다스리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장수가 통치하였다고 한다.

장수의 명칭은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마한에서는 세력이 강한 이들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고 불렀다.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에서는 이러한 장수에게 관(官)과 인수(印綬)를 주기도 하였는데, 간접적 통제를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한편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등의 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데, 일제강점기 경북 지역에서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이라 새겨진 도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장수 등에 의한 소국의 통치 체계는 “국읍(國邑)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더라도 읍락(邑落)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라는 것으로 미루어 그다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는 곧 삼한의 통치 질서가 완비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 체계적인 국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삼한 사회는 ‘왕’으로 표현된 존재를 정점으로 신지‧읍차 등의 장수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피지배층은 토착 생활을 하며 농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므로 삼한은 일반적인 농업 사회의 특성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후가 따뜻하고 저수지가 많아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해 벽골제, 의림지같은 저수지는 마한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농기구도 발전해 북방이주민에 의한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후 괭이, 보습, 낫, 호미 등 철제농기구가 만들어져 생산력이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의창 다호리의 무덤이 좋은 근거이다. 한편 변한지역의 철은  품질도 좋고 수량도 많이 나와 일본으로 수출도 하고 화폐로도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삼한의 피지배층과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바로 ‘하호(下戶)’이다.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하호가 복속민과 같은 존재로 기록되어 있고, 동예조에는 일반적인 피지배민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한의 하호의 성격을 해명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한편, 삼한에서는 음력 5월에 씨를 뿌리고 10월 농사가 끝난 다음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료상에는 제사의 대상이 단지 ‘귀신’으로 되어 있지만, 이 제사 자체가 농사와 관련 있는 만큼, 이는 바로 ‘농업신’에게 올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 나서 군무를 추는데, 땅을 밟는 동작은 지신(地神)을 즐겁게 하고 땅의 생육력(生育力)을 높여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라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제사는 일종의 축제로 거행되어 구성원 간에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국읍 장수의 정치권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각 국읍에 천군(天君)이 있어 제사를 주관하고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두었다는 점은 삼한 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문제로 중요하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과 유사하므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솟대신앙) 소도를 복원해 보면 현재 서낭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도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이곳으로 도망 온 죄인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도에 죄인이 오면 잡을 수가 없었다는 말. 이는 소도가 신성한 특수 구역임을 말해 주는 동시에 삼한이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분리된 사회였음을 알려 준다. (제정분리사회)

이들은 읍락에 모여 살고, 초가로 지붕을 한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두레를 만들어 농사를 공동으로 짓는 등 공동체적 전통이 있었으며,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부장품을 넣는 풍습이 있었다. 이들의 무덤은 고인돌보다 진화된 움무덤(토광묘)와 돌덧널무덤(석곽묘)가 있었다.  무덤 뿐만 아니라 바위에도 그림을 새겨 자신들의 세계관을 담았다. 경북 고령 양전동 암각화, 언양 천전리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이들을 통해 삼한 사람들의 예술관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그렸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1. 통론에서는 군장국가로 설명하고 있다. 신특,구특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초기국가를 각각 다루지 않고 바로 성립과정에 대해서 언급했다. (부체제로) [본문으로]
  2. 하호에 대해서 여러 논란이 있는데 교과서에서는 천민층으로 기술했고 한국통론은 씨족원의 후신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한 양인신분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그냥 천민과 양인의 논란이 있다고 표현한 책도 있다. 깊게 찾아보기 그러니. 교과서의 내용을 피지배층이라고 완곡하게 이해하는게 일단은 합리적일듯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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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토픽2013. 4. 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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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이슬람 무역 상인들의 활동 범위에 포함되어 알려졌던 중세 아프리카도 신항로 개척으로 본격적으로 유럽인들에게 탐험되기 시작한다. 비록 신항로 개척을 위한 뱃길 위주의 탐험이지만 이때부터 유럽인들이 무력으로 아프리카에 다가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1.신항로 개척

15세기 무터 활발하게 전개된 신항로의 개척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각주:1]

(1)신항로 개척의 배경 

신항로가 개척되게 된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동서 문명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비단과 향신료로 대표되는 동양과의 무역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동양에 대한 유럽인의 호기심을자극했다. 동방의 크리스트교국 존 프레스터의 전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각주:2] 그러나 이 시기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서 오스만제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점도 유럽인이 직접적인 항로를 탐험하게 된 원인중에 하나다. [각주:3]

기술적인 발전도 신항로 개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나침반이 전래되고, 천문학과, 지리학[각주:4]이 발달하고 조선술[각주:5]의 발달로 원거리 항해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화기의 발달과 이를 이용한 해전에서 화포사용은 유럽인의 해외진출을 용이하게 했다.

특히 이러한 중계 무역권에서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신항로를 개척에 뛰어들었다. 이 두 국가는 이슬람과의 다툼에서 왕권(1479년 에스파냐 왕국 성립)을 강화해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계무역에 소외된 지리적 위치가 오히려 대서양 방면의 진출로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배경이 있다.

(2)신항로 개척의 전개

신항로 개척에 앞장 선 사람은 항해왕자로 불리는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1394~1460)였다. 엔리케 왕자는 1420년부터 과학적 탐험대를 정기적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441년 보아도르 압(카나리아 제도 근처에 있는건가? 헷갈림)을 발견하고 이후 시에라 레오네에 도달했다(1462) 1471년에는 적도를 넘었으나 해안선이 남으로 구부러져 실망했다. 이후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탐험이 일시중단되었따.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1487년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인 희망봉을 발견했다. 그는 심한 폭풍우 끝에 이 압을 발견했으나 디아스의 보고를 들은 국왕은 희망봉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콜럼버스가 죽을때까지 인도라고 믿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1492) 그렇지만 포르투갈 왕실은 그것이 인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1498년 캘리컷에 도착한다. 항해동안 2년이 넘는 기간, 3분의1이상의 선원 사망, 300일 연속의 해상 생활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60배 이상의 이윤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무장병력의 파견이 시작되었다. 1500년 포르투갈은 상선대를 파견하고 1502년 바스코 다 가마를 다시 파견해 캘리컷에 무장사격을 가하고 아랍상인들의 함대를 해상에서 격파하는 등 이슬람상인을 배제하고 향료무역에서 우위를 독점하기를 원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전면적인 점령이 아닌 무역거점과 군사기지를 설치하는데 집중했는데 불필요한 마찰과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왕실의 지원을 받아 1492년 8월 바하마 제도에 도착했다. 이후 3회에 걸쳐 항해를 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는 대서양항로의 탐험을 자극했다.

영국의 존 캐보트(발음은 캐벗이라고 하던것 같았는데, 교과서같은데 캐보트라고 나오네)1496년 헨리7세의 후원으로 캐나다를 발견했고,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아메리카 대륙이 신대륙임을 발표했다.

교황 알렉산더 2세는 베르데제도의 서쪽 500km해상에 경계선을 설정하고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한다고 했으나 포르투갈이 1300km 서쪽으로 경계선을 이동시키는 토르데실라스조약이 체결되었다.(1494) 이후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에스파냐는 몰루카제도의 권리를 포르투갈에게 팔아 넘기고 양국의 경계선을 몰루카제도 동방 17도선으로 정하는 조약이 있었다. 즉 기존의 토르데실라스 조약이 베르데제도 1300km지점의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마젤란에 의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되자 그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따라서 몰루카제도 동방 17도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에스파냐령, 서쪽은 포르투갈령이 되는것.

 

시간이 흘러 마젤란은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을 횡단해 에스파냐로 돌아왔다(1522) 1519년에 출발해 3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3)신항로 개척의 결과

신항로 개척으로 가장 큰 영향은 세계적 교역망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유럽-오스만-아시아 의 구조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까지 아우르는 무역망이 연결되었다. 특히 세계적인 화폐로 은의 사용이 확대되었는데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은이 유럽으로 이동하고 다시 중국으로 은이 이동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교역망의 형성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가격 혁명과 상업 혁명이 일어났다.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은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로인해 물가가2~3배로 치솟는 가격 혁명이 일어났으며, 가격혁명으로 인해 지대에 의존하는 지주와 임금노동자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반대로 상인과 금융업자, 농노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고 이는 금융업이 발달을 촉진했다. 어음 교환을 통해 현금을 휴대하지 않고 원거리 무역을 하거나, 자본이 없는 상인도 투자자로부터 돈을 빌려 해왜 진출에 뛰어들게 했다. 결과적으로 근대적 기업 형태의 주식회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은 부와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상업 혁명은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의 상업 자본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나타난 상업활동의 변화를 말한다. 상업혁명으로 유럽의 상업 자본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까지 확대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아메리카의 은을 아시아에 판매했고, 영국의 동인도 회사도 은을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은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시장의 출현과 함께 세계적인 자본주의체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토양이 되었으며 시민계급(중산계급)이 자라게 했다.

유럽인의 생활도 많은 부분 변화했다. 차와 면직물, 감자와 옥수수, 고추, 담배 등이 들어와 일상생활에 자리잡게 되었다. 반대로 유럽에서 소와 말 커피와 사탕수수가 아메리카에 전해졌다. 아프리카에서도 금과 상아 뿐만 아니라 흑상아로 불리는 노예가 많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기호의 변화는 무역의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인의 아메리카 침략과 노예 무역이 형성되는 등 부정적인 일도 자행되었다. 에스파냐 인과 포르투갈인들의 침략으로 토착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매독, 천연두같은 질병이 옮겨졌으며 식민지화로 많은 수탈을 당했다.

 

2.노예무역

항로 개척으로 대서양 교역은 17세기 삼각 무역을 발전시켰다. 유럽에서 설탕과 담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아메리카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과 담배 농장에(대농장 경영) 노동력이 필요했고, 광산의 개발또한 노동력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그래서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노예 무역에 참여하여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묶는 삼각 무역이 전개되었다. 노예 무역은 8세기 중반 이슬람 상인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본격적인 것은 신항로 개척 이후의 일이다.

삼각 무역의 형태는 유럽에서 일용품(공산품), 무기 등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 노예와 교환한 후 아메리카에 가서 파는 것이며 아메리카에서 노예를 팔고 설탕과 담배 등을 사고 유럽으로 돌아와 파는 것이다. 특히 영구이 삼각무역의 덕을 봤는데 영국은 삼각무역을 통해 공업을 발전시켰다.

아메리카에 팔려간 노예는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인간적 존재가 아닌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아메리카에서 만들어진 흑인법(1685)에는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고, 주인의 마음대로 처벌할수 있으며, 주인의 동의없이 결혼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해방되는 노예는 극소수였다.

아메리카에 팔려간 노예는 부두교와 같은 토속 종교, 브레이크 댄스, 블루스, 소울, 재즈 등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그림 1,2 신항로 개척 이후 무역의 형태. 똑같은 내용을 표시하고 있다. 기억해야 될건 신항로 개척으로 오스만의 중개무역이 사라지고 유럽이 아시아와 직접 교역을 했다는 것, 그리고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의 삼각 무역이다. 특히 아시아로 꾸준히 은이 유입되는데 이는 중국의 무역 태도 및 유럽상품에 비해 아시아 상품들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림 3 노예 무역 노예 무역이 17세기에 증가하기 시작해 18세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1은 금성, 2는,3은 천재)

 

노예무역은 19세기에 들어오자 자유와 민권 사상에 눈을 뜬 유럽인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이후 덴마크(1805), 영국(1807), 프랑스(1818)순으로 노예 무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사람들은 비밀리에 노예 무역을 계속 하였고, 영국(1833),프랑스(1848)의 뒤를 이어 노예 노동에 의존하던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도 186~1880년 사이에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1. 대항해시대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오늘날의 젊은세대들은 일본코에이사의 게임인 대항해시대덕분에 대중화가 되어 더더욱 그렇게 느낄수도 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는 오리엔탈리즘적인 느낌이 나기 때문에 좀더 중립적인 대 발견 시대, 대 탐험 시대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본문으로]
  2. 바스코 다 가마는 신항로 개척의 이유를 '향신료와 크리스트교인'이라고 했다. 이는 존 프레스터 전설에 기인한 말인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이슬람과의 싸움과정을 통해 성장한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봐서 동방에서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 이슬람을 타도하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민석홍의 서양사개론에는 오스만의 무역 독점이 신항로개척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엔 무리가 있다고 서술했는데 교과서에는 주요하게 서술했으므로 패스.ㅋㅋ [본문으로]
  4.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개론과 지리학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대탐험시대로 부정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항구에는 전문적 해도학자들이 있었다. [본문으로]
  5. 삼각돛의 도입, 마스트 숫자의 증가, 카라벨선의 등장과 동시에 함에 대포를 장착함으로써 해양전술까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배들의 배수량은 230톤정도밖에 안되는 등 생각보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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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문사료2013. 4. 19.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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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倹立都阿斯逹 經云無葉山, 亦云白岳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髙[각주:1]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庻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即太伯, 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願化爲人. 時神遺霊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㛰之, 孕生子號曰壇君王倹. 以唐髙即位五十年庚寅 唐堯即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亰,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逹,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旀逹,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即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亰, 後還隠於阿斯逹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歳.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真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三國遺事』卷1, 「紀異」1 古朝鮮 王儉朝鮮

 

 

 

-삼국유사 권1 기이 고조선 왕검조선에 내용. 흔히 알고있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신하들과 지상으로 내려와 호랑이와 곰을 만나고 곰이 인간이 되서 결혼해 단군왕검을 낳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위서와 배구전에 수록된 내용을 인용하면서 주석을 달고 있는데 한서에 나온 4군과 배구전에 나온 3군. 그리고 주나라에서 기자가 와서 조선을 통치했다는 설을 의심하고 있다.[각주:2]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 권 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서 기술한 고조선의 모습. 고조선이 주나라가 쇠할 쯤에 넘어온 기자의 후예라는 기자조선설을 주장하지만 위지선비동이와 같이 타자로 취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중국은 자국과 다른 영역으로 고조선을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을 중국의 동북공정이 이용해먹는 것도 알수 있다. 조선이 기자의 후예라는 것, 그리고 주 왕실을 존중하려 했던것.

그리고 연나라와 대립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세력이 강하였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때 대부라는 관직명으로 보아 고조선에도 관직 체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의 영역이 새롭게 개편되는데 (어떤 경로인지는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점점 쇠퇴했다고 하는게 정설. BC4세기경. 사기에 따르면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한 것은 연나라 소왕때인데 이때가 BC4세기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인해 한반도의 청동기문화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서북지역에는 세죽리- 연화보 문화권, 한반도 내에서는 세형동검문화권이라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권이  형성된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도 몇가지 알 수 있는데 연개의 침입으로 2000리를 뺏겼다는 것을 보아 영토가 상당히 넓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만번한은 보통 지금의 평북 박천군 일대를 이야기 하는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영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1. 재 요녕설. 2.재 평양설. 3. 중심지 이동설이다. 현재는 중심지 이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고조선이 멸망했을 때 낙랑군 조선현이 설치된 곳은 지금의 평양 근처이다. (BC108) 그러므로 멸망 전까지의 중심지는 자연 평양 근처가 된다. 그러나 세형동검 문화권에 상한연도에 대한 분석(최대로 올려잡아도 기원전3~4세기), BC4세기 진개의 침략 이전에 영토와 관련지으면(고조선이 연의 침입에 패해 이동한것과 청동기문화의 상한연대가 겹침)만약 중심지가 그전까지 평양이 성립하기 곤란하다. 따라서 평양은 기원전 3세기 정도부터 중심지였으며 그 이전에는 요하 하류의 해성 개주 지역으로 상정되는 지역에 중심지가 위치했다고 하는 것이다.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

……(中略)……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收中國亡命.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위만의 조선 이동에 대해서 기록한 사료이다. 사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교과서마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사료를 수록했다.  부왕이 죽고 준왕이 즉위하고 전국시대가 끝날 무렵 혼란기에 위만이 고조선으로 넘어온다. 그때 호복과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또한 위만정권에 토착민이 많이 등용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위만조선도 중원왕조와 뚜렷하게 다르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樂浪朝鮮民犯禁八條, ……(中略)……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中略)……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燕郡

 

 8조금법에 대한 사료.  한사군 설치 이후의 시점이라 낙랑조선이라 표현한듯 하다.  8조중에 3조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 살인한 자는 즉시 죽인다. 2.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갚는다. 3. 도둑질한자는 노비로 삼는다. 만약 벗어나고 싶으면 1인당 50만을 내야 한다. 비록 내도 수치스러워 결혼할 짝을 취하기 어려웠다.

이를 보아 이 시기의 고조선 사회가 철기문화의 발달로 생산력이 높았으며, 농업 중심의 사회라 노동력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살인, 상해 엄금) 사유재산이 있었으며, 노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정도 노예제가 존재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적으로 신분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일부 사회분화가 된 분위기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적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 降其旁小邑, 眞番‧臨屯 ……(中略)…… 皆來服屬, 方數千里.

……(中略)……

傳子至孫右渠, ……(中略)……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 ……(中略)…… 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中略)…… 朝鮮裨王長, ……(中略)…… 卽渡 , 馳入塞. ……(中略)…… 遂歸報天子曰, 殺朝鮮將, 上爲其名美, ……(中略)…… 卽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中略)……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 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中略)……

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 ……(中略)…… 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幷, 將戰益急. 恐不能與(戰), 王又不肯降. 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 ……(中略)…… 相路人之子最 ……(中略)…… 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下略)……

『史記』卷115, 「朝鮮列傳」55

 

 

위만조선의 전개부터 고조선의 멸망까지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사기는 중국(한나라)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므로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사료의 내적 비판이 필요하다. 처음 읽었을때 왜 위만이 한나라의 외신인지 에서 응? 하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아. 사기는 한나라의 입장에서 쓴 것이지 라고 뒤늦게 떠올랐다. 이때 외신은 후의 조공책봉 관계와 비슷하게 생각해도 될듯.(표적사례, 기반사례.ㅋㅋㅋ) 한나라의 외신이라고 하지만 정치적 군사적 독자성이 확보되었음으로 보아 어느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갖췄다고 봐야 한다. 또한 고조선이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취하고 한나라의 무역을 방해하자 무제의 정벌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자국과는 한나라와는 다른 국가였다고 생각하는게 맞다. 한의 침략에 1년 넘게 항거했으나 왕검성이 함락되었으며, 한사군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있다.

 

 

  1. 고는 중국의 요임금의 이름을 의미한다. 즉 요임금과 같은 때. [본문으로]
  2. 이때의 명칭을 흐름에 따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보통 부정된다. 그 근거는 1. 문헌상으로 한나라 초 복생의 상서대전에서 처음 그러한 기술이 보이고, 이전 기록에는 일체 언급이 없다. 게다가 기자의 묘가 하남성이나 산동성 등지에 있었다는 기록도 보임. 2. 상황론적으로 황하중류와 고조선 사이가 왕래가 쉽지 않은 점. 3. 고고학적으로 고조선등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황하문화의 청동기와 뚜렷한 차이가 난다는 점. 즉 양 문화권의 청동기문화가 상관성이 떨어지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기자조선설을 통해 한4군과 결부시켜 동북공정으로 정리하고 있다. , -한국사특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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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