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적으로(?) 미국 역사를 나누었을때, 고대부터 - 대항해시대 - 정착 및 식민지시대 - 독립혁명 및 확장기 - 제2차 산업혁명 이후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오르는 시기(?)로 나눠서 보는게 나름 합리적인 듯하다. 그래서 그렇게 정리해보기로 했음.
1.아메리카 대륙 발견
(1)콜럼버스의 항해
콜럼버스의 항해 이전에도 아메리카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노르만인이 캐나다 지역에 정착하려고 했던 기록들이 있으나 콜럼버스의 항해를 기점으로 유럽이 아메리카대륙을 본격적으로 탐험하기 시작했고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항해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제노아의 선원출신인 콜럼버스는 토스카넬리와의 서신교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계산오류, 본인의 야심, 다이이 추기경의 지리서 탐독 등의 이유로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항해를 떠나 1492년 8월 3일 팔로스 항을 떠난지 41일만에 바하마에 도착하게 된다. 그 뒤에 4회에 걸쳐 탐험을 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는채 모기제독이라는 야유속에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교황 알렉산더 2세는 1494년 베르데제도 1300km서쪽을 경계선으로 서쪽은 에스파냐, 동쪽은 포르투갈 영토로 하는 토르데실리스조약을 체결한다.
(2)존 캐벗의 캐나다 발견
콜럼버스의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 출신의 존 캐벗(John Cabot)은 1496년 헨리7세의 후원으로 캐나다 동해안에 도달했다. 영국은 특허장(charter) 발급으로 항해를 지원했다는 특징이 있다.
(3)아메리고 베스푸치, 발보아의 발견, 마젤란의 세계일주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여러번 중남미 지역을 탐험한 결과 신대륙일 것이라는 의견을 발표해, 신대륙의 이름이 아메리카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발보아는 파나마지협을 횡단해 태평양을 바라보는 발견을 한다. 발보아의 발견으로 신대륙의 폭이 좁다는 의견이 돌아 마젤란이 3년여에 걸친 긴 항해 끝에 최초의 세계일주를 해내게 된다.
2.콘퀴스타도르(직업적인 정복인, ex:코르테스와 피사로)에 의한 중남미 파괴
대항해시대기에 멕시코 중부지역에는 아즈텍 문명이 있었다. 아즈텍문명은 상형문자, 달력, 귀금속 채굴, 피라미드형 신전 건조, 인신공양의 관습이 있었다. 아즈텍 문명은 1519년 에스파냐의 하급귀족 출신인 코르테스가 1521년 600명 남짓한 병력을 데리고 아스텍 문명을 파괴했다.
페루지역에는 잉카제국이 성립했는데 태양신을 숭배하는 지배자가 관료와 군대를 거느리고 군림하고 있었다. 잉카제국은 1533년 피사로가 코르테스보다 적은 병력으로 잉카제국의 계승자를 간계로 속여 정복했다.
이후 아스텍, 잉카의 토착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식민지는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과 지방장관이 행정의 책임을 지고, 도시와 지방에는 자치적인 기구가 설립되었다.
식민지 획득에 가장 역할을 한 정복자나 그들의 후손인 지배 계급에게는 '엔코미엔다'라는 원주민으로부터 공납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들 엔코미엔다를 부여받은 엔코멘데로는 거둔 공납으로 각종 유리한 사업을 경영하고 원주민을 강제노동으로 부렸다.
3.영국 식민지 13개주의 성립까지
영국인 아메리카 이주민은 몇가지 부류가 있다. 1. 스튜어트 왕조의 전체정치와 종교적 탄압 회피. 2.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모험자. 3.특허장을 받아 식민지 경영에 나서는 사람들.
여러차례 식민지 건설이 시도된 끝에 1607년 현재의 플로리다 북쪽의 체서피크 만 근처에 제임스타운이 건설되고 1620년 메이플라워호는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사추세츠에 도착하는 등 식민지가 속속 건설된다. 영국인들이 에스파냐와 달랐던 점은 에스파냐들은 직접 식민지 경영을 실시한데 비해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내쫓고 거기에 백인마을을 건설하려고 했던 차이가 있다.
영국인 외에도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이 아메리카 탐험을 했다. 오늘날 뉴욕과 허드슨 강 유역에 정착한 것은 네덜란드 인들이었는데 영국은 제1차 영-란전쟁(1652~1654)을 계기로 그 지역을 빼앗아 요크공의 이름을 따서 뉴욕으로 명명한다.
이후 필립 왕 전쟁과 같은 원주민과의 싸움, 베이컨의 반란같은 내부적 반대자와의 싸움들을 거치며 동부의 13주가 성립되게 된다.
13개 식민지는 저마다 사정이 달랐으나, 빈부격차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지위의 불평등이 있었으나 유럽과 같은 신분제사회는 아니었다. 남부는 노예경영을 통한 농장경영, 북부는 자영농민과 상공업이 발달해갔다.
영국은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식민지 상류계층의 통치영향이 컸다. 식민지가 애초에 자유를 얻기 위해 떠난만큼 식민지인들은 자유와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각자 주끼리 공동체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메리카에도 본국(영국의)법률이 그대로 실시되고 있었고, 식민지의 무역은 본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제약을 받았고, 본국산업과 경쟁상대가 될 산업은 금지되는 등 중상주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주의적 통제가 본국의 법률을 엄격하게 실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건전한 방임'정책이었다.
그러나 '건전한 방임'정책은 7년전쟁 종결(1763)년 이후 크게 변화하게 된다. 조지 3세가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에 관여하려고 했으며, 7년전쟁에 전쟁비용과 식민지의 방위비용을 식민지부터 걷으려는 재정적 고려 때문에 변화하고 이에 식민지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한다. 결국 혁명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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