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토픽2013. 5. 8.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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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으로(?) 미국 역사를 나누었을때, 고대부터 - 대항해시대 - 정착 및 식민지시대 - 독립혁명 및 확장기 - 제2차 산업혁명 이후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오르는 시기(?)로 나눠서 보는게 나름 합리적인 듯하다. 그래서 그렇게 정리해보기로 했음. 

 

1.아메리카 대륙 발견

(1)콜럼버스의 항해

콜럼버스의 항해 이전에도 아메리카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노르만인이 캐나다 지역에 정착하려고 했던 기록들이 있으나 콜럼버스의 항해를 기점으로 유럽이 아메리카대륙을 본격적으로 탐험하기 시작했고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항해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제노아의 선원출신인 콜럼버스는 토스카넬리와의 서신교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계산오류, 본인의 야심, 다이이 추기경의 지리서 탐독 등의 이유로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항해를 떠나 1492년 8월 3일 팔로스 항을 떠난지 41일만에 바하마에 도착하게 된다. 그 뒤에 4회에 걸쳐 탐험을 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는채 모기제독이라는 야유속에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교황 알렉산더 2세는 1494년 베르데제도 1300km서쪽을 경계선으로 서쪽은 에스파냐, 동쪽은 포르투갈 영토로 하는 토르데실리스조약을 체결한다.

 

(2)존 캐벗의 캐나다 발견

콜럼버스의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 출신의 존 캐벗(John Cabot)은 1496년 헨리7세의 후원으로 캐나다 동해안에 도달했다. 영국은 특허장(charter) 발급으로 항해를 지원했다는 특징이 있다.

(3)아메리고 베스푸치, 발보아의 발견, 마젤란의 세계일주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여러번 중남미 지역을 탐험한 결과 신대륙일 것이라는 의견을 발표해, 신대륙의 이름이 아메리카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발보아는 파나마지협을 횡단해 태평양을 바라보는 발견을 한다. 발보아의 발견으로 신대륙의 폭이 좁다는 의견이 돌아 마젤란이 3년여에 걸친 긴 항해 끝에 최초의 세계일주를 해내게 된다.   

 

 

2.콘퀴스타도르(직업적인 정복인, ex:코르테스와 피사로)에 의한 중남미 파괴

대항해시대기에 멕시코 중부지역에는 아즈텍 문명이 있었다. 아즈텍문명은 상형문자, 달력, 귀금속 채굴, 피라미드형 신전 건조, 인신공양의 관습이 있었다. 아즈텍 문명은 1519년 에스파냐의 하급귀족 출신인 코르테스가 1521년 600명 남짓한 병력을 데리고 아스텍 문명을 파괴했다.

페루지역에는 잉카제국이 성립했는데 태양신을 숭배하는 지배자가 관료와 군대를 거느리고 군림하고 있었다. 잉카제국은 1533년 피사로가 코르테스보다 적은 병력으로 잉카제국의 계승자를 간계로 속여 정복했다.

이후 아스텍, 잉카의 토착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식민지는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과 지방장관이 행정의 책임을 지고, 도시와 지방에는 자치적인 기구가 설립되었다.

식민지 획득에 가장 역할을 한 정복자나 그들의 후손인  지배 계급에게는 '엔코미엔다'라는 원주민으로부터 공납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들 엔코미엔다를 부여받은 엔코멘데로는 거둔 공납으로 각종 유리한 사업을 경영하고 원주민을 강제노동으로 부렸다.

 

3.영국 식민지 13개주의 성립까지

영국인 아메리카 이주민은 몇가지 부류가 있다. 1. 스튜어트 왕조의 전체정치와 종교적 탄압 회피. 2.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모험자. 3.특허장을 받아 식민지 경영에 나서는 사람들.

여러차례 식민지 건설이 시도된 끝에 1607년 현재의 플로리다 북쪽의 체서피크 만 근처에 제임스타운이 건설되고 1620년 메이플라워호는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사추세츠에 도착하는 등 식민지가 속속 건설된다. 영국인들이 에스파냐와 달랐던 점은 에스파냐들은 직접 식민지 경영을 실시한데 비해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내쫓고 거기에 백인마을을 건설하려고 했던 차이가 있다.

영국인 외에도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이 아메리카 탐험을 했다. 오늘날 뉴욕과 허드슨 강 유역에 정착한 것은 네덜란드 인들이었는데 영국은 제1차 영-란전쟁(1652~1654)을 계기로 그 지역을 빼앗아 요크공의 이름을 따서 뉴욕으로 명명한다.

이후 필립 왕 전쟁과 같은 원주민과의 싸움, 베이컨의 반란같은 내부적 반대자와의 싸움들을 거치며 동부의 13주가 성립되게 된다.

 

13개 식민지는 저마다 사정이 달랐으나, 빈부격차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지위의 불평등이 있었으나 유럽과 같은 신분제사회는 아니었다. 남부는 노예경영을 통한 농장경영, 북부는 자영농민과 상공업이 발달해갔다.

영국은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식민지 상류계층의 통치영향이 컸다. 식민지가 애초에 자유를 얻기 위해 떠난만큼 식민지인들은 자유와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각자 주끼리 공동체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메리카에도 본국(영국의)법률이 그대로 실시되고 있었고, 식민지의 무역은 본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제약을 받았고, 본국산업과 경쟁상대가 될 산업은 금지되는 등 중상주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주의적 통제가 본국의 법률을 엄격하게 실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건전한 방임'정책이었다.

그러나 '건전한 방임'정책은 7년전쟁 종결(1763)년 이후 크게 변화하게 된다. 조지 3세가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에 관여하려고 했으며, 7년전쟁에 전쟁비용과 식민지의 방위비용을 식민지부터 걷으려는 재정적 고려 때문에 변화하고 이에 식민지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한다. 결국 혁명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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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토픽2013. 5. 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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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한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는 유럽인의 신항로 개척까지 그들만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15세기 신항로 개척 이전에도 노르만이나 베링해협등을 통해 아시아인들이 건너갔지만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흔적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후 신항로의 발견으로 점차적으로 세계사에 편입(?)되게 된다.

 

1.아메리카 원주민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은 아시아의 몽골 계통 이주민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2만 5천년~ 1만년 정도 빙하기에 '베링 육교'라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동에 대해 2가지 설이 더 있다. 태평양 연안 이동설과 남태평양 이동설이 있는데 요즈음에는 원주민이 다양한 경로를 따라 이동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일단은 베링육교설이 정설이라는거.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정착해 부족 단위로 생활했다. 지역별로 환경에 적응해가며 수렵 채집 등을 하며 생활했으며, 점차 농경과 함께 문명을 형성했다. 16세기까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철기시대 초기쯤의 해당하는 문명 단계에서 반농, 반수렵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

대항해시대 이전의 아메리카의 문명으로 대표적으로 마야 문명, 아즈텍 문명, 잉카 제국이 있다. 북아메리카에는 넓은 지역에 다양한 부족이 흩어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중남미에는 왕국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아메리카 문명은 전고전기 후고전기로 나눠 분류해 전고전기의 올멕 문명, 차빈 문명, 후고전기의 테오티와칸 문명, 티아우아나코 문명 등 여러 문명을 더 찾을 수 있지만 일반적인 처음 언급한 세 문명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1)마야 왕국

마야문명은 3세기에서 9세기 무렵까지 현재의 유카탄 반도, 즉 중앙아메리카 멕시코와 과테말라 지역에서 꽃피웠다. 마야 문명은 혈통에 따른 계급 사회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마야문명은 옥수수를 재배하고, 도시가 발달하고, 신성 문자 및 0의 개념, 20진수를 사용하는 등 문화적 수준이 높았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갑자기 멸망했는데 이는 급속한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부족을 주요 원인으로 판단하고 있따.

 

(2)아즈텍 왕국

아즈텍 왕국은 13세기 멕시코 고원에서 융성했다고 전해진다.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30만 인구를 자랑했고, 그림 문자와 달력, 피라미드형 신전을 만들었다. 아즈텍 왕국은 산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 의식으로 유명하다. 제물로 바칠 포로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군대 양성 및 정복지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었다.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해 1년을 365일로 계산했고, 윤년까지 두는 달력, 20진법을 사용했다.

 

(3)잉카 제국

 

15~16세기 페루의 안데스 산지에서 잉카제국이 건설되었다. 잉카 제국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산에 요새를 만들고 도시를 건설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마추픽추가 있다.  잉카 제국은 남아메리카 서부 지역을 지배했지만 1544년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가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살해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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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5. 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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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각주:1]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욕은 아프리카 전체를 둘러싸고 전개되어 이와 같이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화 되었다. 식민지화 이후의 아프리카는 크게 세부분에 걸쳐서 교과서에 등장한다.

1.세계대전 중심으로 한 열강의 세력 다툼의 한 일면 2.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과 제3세계 구축 3. 지역 분쟁과 내전. 이렇게 나눈 이유는 단순히 교과서에 등장하는 부분으로 나눈 것, 1960년이 될때까지 이집트, 남아공, 에티오피아, 라이베리아 외에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가 없기 때문에 그전까지 크게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음.

 

1.19~20세기 열강의 각축장 아프리카

19세기말 유럽열강의 식민지 확대 경쟁으로 여러 국가의 충돌이 일어나 긴장 관계가 점점 증가했다. 네덜란드계열인 보어인과 영국은 지금의 남아공 지역에서 보어전쟁을 일으켰고(1899~1902), 횡단 정책을 추진하는 프랑스와 종단 정책을 추진하는 영국이 파쇼다에서 부딪쳐 파쇼다 사건(1898)을 일으켰으며, 3B 정책을 추진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황제의 독일과 다른 열강들이 모로코에서 부딪쳐 두차례의 모로코 사건을 일으켰다. (1905, 1911)

제1차 모로코사건은 1905년 독일의 빌헬름2세가 프랑스의 세력권이던 모로코의 탕지르항을 방문해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주장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로인해 에스파냐의 알제시라스에서 프랑스는 영국 및 여러 나라의 지원으로 우월한 지위 보장 및 독일의 양보를 받아낸 사건이다.

 

제2차 모로코사건은 1991년 모로코에서 내란이 발생해 프랑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독일이 모로코의 아가디로 항에 군함을 파견해 일어난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영국이 프랑스를 강력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독일이 양보하고 프랑스가 ㅗ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이후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대전이 발생하기 직전 이탈리아는 이토전쟁을 일으켜 트리폴리를 점령하기도 했다. 대전 중에는 아프리카 식민지의 인력과 물자도 전쟁에 동원되었다. 아프리카는 기간 산업(도로, 철도 등)이 부족해 200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주민들이 군수품, 무기, 부상자 등을 운반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서 병사와 짐꾼으로 복무한 아프리카인이 10만 명 이상 되었다고 한다. 에티오피아와 모로코는 중립국이었지만 대부분의 식민지는 점령국편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 후 상황 정리를 위해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이 확인된다.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패전국인 독일의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열강은 식민지를 대부분 그대로 보유했다. 실제로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단순히 위임 형식으로 독일의 식민지를 재분할하기만 했던 것이다. 결국 콩고 이북의 독일 점령 지역은 프랑스가 가져 가게 된다. 이에 북아프리카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중 영국을 지원하였던 이집트가 독립 운동을 전개해 결국 독립을 하였으며(1922), 모로코, 튀니지 등도 독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림 2. 1차세계대전후 아프리카의 민족운동. (더텍스트 세계사)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아프리카는 희생의 대륙이었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독일은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를 점령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이 예전 패배를 설욕하고자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는데, 이에 국제연맹이 비난하자 이탈리아는 바로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게 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카이로(1943.2), 얄타(1945.2), 포츠담(1945.7)에서 회담이 열리는데 카이로 회담에서는 일본이 침략하고 점령한 곳을 적당한 시기에 (in due course)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각주:2]

 

 

 

2.2차세계대전 이후의 아프리카

-세계 질서의 다원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열강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유지하려고 했지만 미국과 소련은 민족 자결주의를 내세우며 식민지 유지를 반대했다. 이에 따라 전후 20년간 아시아에서 20개국 아프리카에서 33개국이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를 표방한 신생 독립 국가들이 형성되었으며, 70년대 초에는 합쳐 70여개국이 넘었다. 이들 국가는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였으며, 빈곤한 개발도상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미소 양국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제3세계, 또는 비동맹 국가라고 부른다.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1952)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1956)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를 끌여들어 이집트를 공격하기도 했으나(제2차 중동전쟁) 국제 연합의 결의에 따라 철수했다. 이들 주변의 아랍문화권 나라 리비아(1951), 모로코(1956), 알제리(1962)등은 일찍이 독립을 달성했다.

뒤이어 1957년 가나가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린 1960년에만 17개 독립 국가가 생겼다. 이런 기세로 1963년 아프리카통일기구(OAU)가 조직되었다.

모잠비크와 앙골라는(1974~1975)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포르투갈이 이들 식민지를 본국의 연장이라고 주장하며 독립을 강력하게 억제해 뒤늦게 독립했다.

리비아는 1969년 극단주의적 민족주의자인 카다피가 정권을 잡고 독재를 행했는데 국제적 테러를 자행해 미국의 폭격을 받았다. 2011년에 반독재 시위가 일어나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고 과도국가위원회 정부가 출범되어 활동중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는 에스파냐가 광석자원이 풍부한 서부 사하라를 포기하자 이의 병합을 원하는 토착민세력과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치뤘다. 1988년 UN과 OAU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1990년대에도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제3세계의 5개국(인도,미얀마,인도네시아,파키스탄,실론)은 1954년 콜롬보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평화 공존의 5원칙을 제시했다.

다음해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반둥에서 열린 반둥 회의에서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29개국 독립국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평화 10원칙을 발표하고  상호 경제 협력을 체결했다.

점점 이들 국가의 수가 증가하면서 제2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1957)때에는 40여개국이 참가하고, 제 4 차 회의(1973)에는 73개국이 참가했다.

또한 현대의 세계화와 지역화의 흐름은 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 세계의 각국은 지역별로 경제 블록을 형성했는데 아프리카에서도 남아프리카 관세동맹(SACU 1969. 남아공, 보츠와나, 레소토, 나미비아, 스와질랜드)가 결성되었다.

 

3.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현대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내전이 일어났으며 아직도 진행중인 곳이 많다. 열강의 이간질적 식민 통치 및 지리와 환경 및 2000개가 넘는 부족, 800개가 넘는 언어 등 다원성을 무시한별 생각없이 자로 나눈듯한 국경선 분리에 대한 휴우증, 이슬람 극단주의의와 기독교의 대립같은 종교, 백인과 흑인이나 토착 종족간이라는 인종같은 사회 통합의 실패, 자원 문제로 갈등을 일으켜 발생했다. 또한 독립 후에도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1인독재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자체적인 노력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국제 연합(UN)산하의 국제 평화 유지군이 파견되는 등 해결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르완다에서는 1990년대 후투 족과 투치 족간의 분쟁으로 수십만 명이 학살되었고,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 지역은 벨기에가 통치하던 지역이였는데, 벨기에가 소수의 투치 족 지주가 다수의 후투족 영세농을 지배하도록 했던 것이 원인이다. 이후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하면서 다수의 후투 족이 집권해 두 종족간의 분쟁이 반복되었다.

 

수단에서는 2003년 초 다르푸르 지역을 중심으로 북부 아랍계와 남부의 흑인계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영국은 수단을 통치할때 북부 아랍계에게 정경권을 집중시켰고, 서남부의 흑인을 소외시켰는데 독립 후에도 이런 구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분란이 발생하고 있다.

 

이외에도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오의 전쟁, 우간다 내전, 벨기에령 콩고인 자이레의 내전, 나이지리아의 내전, 짐바브웨의 내전끝에 얻은 독립(1980) 등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남아공은 오랫동안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악명 높은 인종 차별 정책으로인해 월드컵 대회 및 올림픽 출전이 금지된 나라일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했다. 아파르트 헤이트는 사람을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 등으로 구분하고, 그에 따라 공공장소 출입과 편의시설 이용부터 교육, 주민등록, 거주 지역 등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정책이다.

1990년 국민당 정부(백인 정부) 구속 중인 만델라는 석방하고 4년만에 다인종 선거에서 승리해 백인 통치는 막을 내렸으며, 만델라가 이끄는 민족 회의는 수십 년 동안 인종 갈등을 치유하면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국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대한 해결책중 하나로 적극적인 과거사정리를 실시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참고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케이스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흐름은 국가간의 빈부 격차도 확대시켰으며, 아프리카에는 가난과 전쟁 등으로 인한 난민, 기아, 질병의 문제가 심각하게 퍼져있어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하다.

 

 그림 4- 세계의 분쟁 지도

그림 5 - 세계의 기아 지도 아.. 아프리카여..  와중에 북한이 눈에 띈다. 전쟁, 기아... 남얘기가 아니다

  1. 세계사 교학사에 있는 그림. 근데 다른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 더 보기 쉬웠는데... 왜 현직학교교사만 교과서를 공유해주는거냐. ㅡ.ㅡ 빡침 [본문으로]
  2. 특히 카이로 선언에서 적당한 시기에 라고 하는 내용때문에 우리나라의 독립후 소련군과 미군정이 진주해 신탁통치안을 제시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얄타 회담은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을 결정한 내용, 포츠담 회담은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재확인 한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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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4. 24.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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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연대

1806 영국 케이프타운 점령 - 1830 프랑스 알제리 점령 - 1847 라이베리아 독립(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 - 1878 스탠리 콩고강 유역 탐험(벨기에의 콩고 점령) -1884 베를린 회의(아프리카 분할 문제 논의) - 1898 파쇼다 사건

 

 

19세기 제2차산업혁명의 발달에 힘입어 열강은 세계를 식민지화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로 크게 나눠서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아프리카는 수난의 역사가 지속... 어쩌면 너무 불행한 역사만 기억하기때문에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를 설명하려면 제국주의의 정의와 배경, 전개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지만 일단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점령했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보기로.

(1)아프리카 탐험 초기

이전까지의 유럽인들은 수면병,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 때문에 아프리카 내륙으로 깊숙히 진출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는 연안 지방을 중심으로 무역 거점을 점령했을 뿐이다. 본격적인 내륙 진출은 풍토병에 대한 치료제 개발 이후부터이다.

또한 탐험가들의 여행도 큰 기여를 했다. 리빙스턴과 스탠리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리빙스턴은 스코트랜드 출신의 선교사로 전도를 목적으로 1840년 남아프리카에 갔다. 그런데 이들의 성향 또한 백인의 책무를 가진(?) 성향이었다. 리빙스턴은 영국 군대와 상인이 들어와야 선교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빙스턴은 1852년 케이프타운을 출발해 육로로 서안의 루안다를 커져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해 켈리마네에 갔다. 중간에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그리고 1856년 귀국해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기라는 책을 펴냈고 이후 1856년 다시 아프리카를 탐험했다. 그는 이때 1856년 유럽인들의 노예사냥 실태를 폭로해 노예무역 금지에 일정 기여했다. 리빙스턴은 1871년 나일 강의 수원을 찾다 실종되었는데 이를 찾기위해 '뉴욕헤럴드'가 미국 출신의 스탠리를 파견했다.  스탠리와 리빙스턴은 1871년 11월 아프리카 중부의 탕가니카 호수 근처의 마을에서 만났다. 그 후 리빙스턴은 스탠리 일행과 조사를 같이하다 1873년 사망했다.

이들의 탐험은 열강의 아프리카 침략에 이용되었다. 리빙스턴의 탐험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스탠리는 벨기에의 왕이던 레오폴드2세에게 고용되어 콩고강 일대를 탐험하고 벨기에의 침략을 도왔다. 벨기에는 콩고를 직접 지배하면서 복리 후생 시설 등을 제공했으나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권리는 무시했다.

백인의 짐

 

백인의 책무를 다하라

그대가 길러낸 가장 훌륭한 후손을 보내라

그대의 자식을들 유배지로 보내라

그대 포로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거칠고 사나운 그대들의 새 백성을 돌보라

무뚝뚝한 그들은 그들은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

 

백인의 책무를 다하라

평화를 위한 격렬한 싸움 속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입을 채우고

질병을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네가 너의 목적을 달성할 떄쯤

너를 원하는 다른 미개인들을 위해

다른 원주민과 이교도에게로 시선을 돌려라

그들의 광기를 끝낸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키플링-

세실 로즈의 유언집(1902)에서

영국은 국토가 좁아 3,6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600만 명만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 영국의 생산품을 팔 수 있는 지구상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영국인이 세계 제1의 인종이고, 우리 영국인이 지배하는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인류가 행복해지며,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 1 세실로즈

 

(2)아프리카 분할의 전개

영국이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로부터 1815년 케이프타운 식민지(희망봉이라고 생각하면됨) 얻자 네덜란드의 후손인 보어인은 북쪽으로 이동해 트랜스바알과 오렌지자유국을 세웠다.

1875년 이집트의 재정난을 이용해서 수에즈 운하의 최대가 되고 이후 아라비 파샤의 민족주의 반란을 제압해 1882년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남북의 기점을 바탕으로 영국은 종단정책을 추진했다.

앞서 영국이 케이프타운 식민지를 얻자 보어인이 트랜스바알과 오린지자유국을 세우는데. 트랜스바알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를 차지하기 위해 보어전쟁을 일으켰다.(1899~1902) 이 결과로 영국은 트랜스바알을 합병하고 남아프리카 전체를 차지한다. 그러나 후에 영연방 자치령인 남아공 연방을 조직하게 된다.(1910)

 

프랑스는 1830년 투르크로부터 알제리를 획득하고 이를 거점으로 동진해 튀니지를 얻었다(1881), 남쪽으로도 진겨개 사하라사막을 포함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와 적도아프리카를 획득하고 홍해 인근에 약간의 땅과 마다가스카르 섬을 얻었다(1896) 이렇게 프랑스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을 세웠으나 파쇼다에서 후퇴해 영국의 이집트 지밸르 인정하는 대신 모로코에 대한 진출을 인정받아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따(1911)

중간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놓고 대립했다. 프랑스인에 의해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했으나 후에 최대 주주는 영국이 되었고 결국 이집트를 영국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은 파쇼다(지금의 수단 중부)에서 마주쳐 파쇼다 사건이 일어났지만(1898) 전술한대로 프랑스가 양보하고 후에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게 된다.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달성한 후 유럽에서 현상유지에 힘쓰나 국가차원이 아닌 개별적 차원에서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이러한 개별적 진출을 토대로 독일은 토고와 카메룬을 얻고(1884~1885),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이후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으로 독일은 크루거 전보사건(1896)을 일으켜 영국과 대립하고, 모로코에서도 2차례의 모로코 사건(1905, 1911)을 일으켜 프랑스와 충돌했다.[각주:1] 이때 1911년 열강의 관심이 모로코 사건에 쏠려 있는 틈을 타 이탈리아가 투르크와 전쟁을 일으켜 트리폴리를 점령하기도 했다.(이토전쟁)

 

이탈리아는 뒤늦게 통일 달성후 제국의 위신을 위해 아프리카로 진출했으나 홍해연안의 에리트리아와 인도양의 이탈리아령 소마릴랜드를 획득했으나, 프랑스에게 튀니지를 선취당하고 에티오피아 군에게 패배했다.(1896, 후에 2차 세계대전때 무솔리니는 이때의 패배를 설욕한다는 명분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에 19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서 트리폴리를 얻고,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스탠리의 탐험을 후원한 벨기에는 콩고자유국을 승인해 (1884) 관리하다가 1908년 식민지로 병합했고,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소유하게 되었다.

 

결국 1914년경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유지하는 나라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였다.

라이베리아는 1841년 흑인 조지프 로버츠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 되었고, 1847년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의 노예제 폐지 이후 해방노예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때 아프리카에 돌아온 해방노예들이 건설한 국가이다. '자유의 나라'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초기엔 미국의 보호국이고 지배층은 백인, 수도는 미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이름을 딴 먼로비아 였다. 즉 미국을 그대로 본뜻것.

 

그림 3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왼쪽 맨위에 모로코가 보임.

 

 

 

(3)아프리카 인의 저항

 

당.연. 히. 아프리카인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인들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30여년간 저항했으며, 프랑스는 10여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겨우 점령할 수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프랑스와 두차례 전쟁 끝에 여왕이 폐위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곳곳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수단에서는 반외세를 주장하는 마흐디 운동 세력이 이집트를 간섭하던 영국을 공격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독일이 지배하던 나미비아 지역에서는 토착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탄자니아 지역에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주술사가 앞장서기도 했다. 1905년 일어난 봉기를 마지(스와힐리어로 물)마지 봉기라고 한다. 독일인들이 면화생산을 위해 탄자니아 인들을 강제동원하자 주술사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이다. 3년간 독일에 맞섰지만 무참히 진압당했다.

에티오피아는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민족 운동을 주도했다.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통일 후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수에즈 운하 개통 후에 에티오피아는 주요 거점이 되어 영,프,이가 차지하려고 했으며, 1890년 이탈리아가 침략했으나 막아냈으며 1896년엔 아도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서부아프리카에서는 사무리 투레가 민족 운동을 이끌었는데 사모리투레는 니제르강 유역에 제국을 건설하고 프랑스에 저항했으나 1898년 사모리 투레가 체포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줄루 왕국의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림3 출처 더텍스트 세계사-

  1. 모로코사건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단순히 아프리카 점령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 세계대전으로 가는 방향에서 열강끼리 부딪힌 사건이므로 제국주의와 연관되어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일것 같다. 교과서마다 아프리카 분할, 제국주의파트별로 다르게 실어 놓았는데 제국주의를 설명할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수월한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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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4. 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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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이슬람 무역 상인들의 활동 범위에 포함되어 알려졌던 중세 아프리카도 신항로 개척으로 본격적으로 유럽인들에게 탐험되기 시작한다. 비록 신항로 개척을 위한 뱃길 위주의 탐험이지만 이때부터 유럽인들이 무력으로 아프리카에 다가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1.신항로 개척

15세기 무터 활발하게 전개된 신항로의 개척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각주:1]

(1)신항로 개척의 배경 

신항로가 개척되게 된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동서 문명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비단과 향신료로 대표되는 동양과의 무역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동양에 대한 유럽인의 호기심을자극했다. 동방의 크리스트교국 존 프레스터의 전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각주:2] 그러나 이 시기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서 오스만제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점도 유럽인이 직접적인 항로를 탐험하게 된 원인중에 하나다. [각주:3]

기술적인 발전도 신항로 개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나침반이 전래되고, 천문학과, 지리학[각주:4]이 발달하고 조선술[각주:5]의 발달로 원거리 항해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화기의 발달과 이를 이용한 해전에서 화포사용은 유럽인의 해외진출을 용이하게 했다.

특히 이러한 중계 무역권에서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신항로를 개척에 뛰어들었다. 이 두 국가는 이슬람과의 다툼에서 왕권(1479년 에스파냐 왕국 성립)을 강화해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계무역에 소외된 지리적 위치가 오히려 대서양 방면의 진출로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배경이 있다.

(2)신항로 개척의 전개

신항로 개척에 앞장 선 사람은 항해왕자로 불리는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1394~1460)였다. 엔리케 왕자는 1420년부터 과학적 탐험대를 정기적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441년 보아도르 압(카나리아 제도 근처에 있는건가? 헷갈림)을 발견하고 이후 시에라 레오네에 도달했다(1462) 1471년에는 적도를 넘었으나 해안선이 남으로 구부러져 실망했다. 이후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탐험이 일시중단되었따.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1487년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인 희망봉을 발견했다. 그는 심한 폭풍우 끝에 이 압을 발견했으나 디아스의 보고를 들은 국왕은 희망봉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콜럼버스가 죽을때까지 인도라고 믿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1492) 그렇지만 포르투갈 왕실은 그것이 인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1498년 캘리컷에 도착한다. 항해동안 2년이 넘는 기간, 3분의1이상의 선원 사망, 300일 연속의 해상 생활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60배 이상의 이윤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무장병력의 파견이 시작되었다. 1500년 포르투갈은 상선대를 파견하고 1502년 바스코 다 가마를 다시 파견해 캘리컷에 무장사격을 가하고 아랍상인들의 함대를 해상에서 격파하는 등 이슬람상인을 배제하고 향료무역에서 우위를 독점하기를 원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전면적인 점령이 아닌 무역거점과 군사기지를 설치하는데 집중했는데 불필요한 마찰과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왕실의 지원을 받아 1492년 8월 바하마 제도에 도착했다. 이후 3회에 걸쳐 항해를 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는 대서양항로의 탐험을 자극했다.

영국의 존 캐보트(발음은 캐벗이라고 하던것 같았는데, 교과서같은데 캐보트라고 나오네)1496년 헨리7세의 후원으로 캐나다를 발견했고,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아메리카 대륙이 신대륙임을 발표했다.

교황 알렉산더 2세는 베르데제도의 서쪽 500km해상에 경계선을 설정하고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한다고 했으나 포르투갈이 1300km 서쪽으로 경계선을 이동시키는 토르데실라스조약이 체결되었다.(1494) 이후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에스파냐는 몰루카제도의 권리를 포르투갈에게 팔아 넘기고 양국의 경계선을 몰루카제도 동방 17도선으로 정하는 조약이 있었다. 즉 기존의 토르데실라스 조약이 베르데제도 1300km지점의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마젤란에 의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되자 그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따라서 몰루카제도 동방 17도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에스파냐령, 서쪽은 포르투갈령이 되는것.

 

시간이 흘러 마젤란은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을 횡단해 에스파냐로 돌아왔다(1522) 1519년에 출발해 3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3)신항로 개척의 결과

신항로 개척으로 가장 큰 영향은 세계적 교역망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유럽-오스만-아시아 의 구조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까지 아우르는 무역망이 연결되었다. 특히 세계적인 화폐로 은의 사용이 확대되었는데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은이 유럽으로 이동하고 다시 중국으로 은이 이동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교역망의 형성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가격 혁명과 상업 혁명이 일어났다.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은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로인해 물가가2~3배로 치솟는 가격 혁명이 일어났으며, 가격혁명으로 인해 지대에 의존하는 지주와 임금노동자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반대로 상인과 금융업자, 농노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고 이는 금융업이 발달을 촉진했다. 어음 교환을 통해 현금을 휴대하지 않고 원거리 무역을 하거나, 자본이 없는 상인도 투자자로부터 돈을 빌려 해왜 진출에 뛰어들게 했다. 결과적으로 근대적 기업 형태의 주식회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은 부와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상업 혁명은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의 상업 자본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나타난 상업활동의 변화를 말한다. 상업혁명으로 유럽의 상업 자본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까지 확대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아메리카의 은을 아시아에 판매했고, 영국의 동인도 회사도 은을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은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시장의 출현과 함께 세계적인 자본주의체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토양이 되었으며 시민계급(중산계급)이 자라게 했다.

유럽인의 생활도 많은 부분 변화했다. 차와 면직물, 감자와 옥수수, 고추, 담배 등이 들어와 일상생활에 자리잡게 되었다. 반대로 유럽에서 소와 말 커피와 사탕수수가 아메리카에 전해졌다. 아프리카에서도 금과 상아 뿐만 아니라 흑상아로 불리는 노예가 많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기호의 변화는 무역의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인의 아메리카 침략과 노예 무역이 형성되는 등 부정적인 일도 자행되었다. 에스파냐 인과 포르투갈인들의 침략으로 토착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매독, 천연두같은 질병이 옮겨졌으며 식민지화로 많은 수탈을 당했다.

 

2.노예무역

항로 개척으로 대서양 교역은 17세기 삼각 무역을 발전시켰다. 유럽에서 설탕과 담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아메리카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과 담배 농장에(대농장 경영) 노동력이 필요했고, 광산의 개발또한 노동력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그래서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노예 무역에 참여하여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묶는 삼각 무역이 전개되었다. 노예 무역은 8세기 중반 이슬람 상인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본격적인 것은 신항로 개척 이후의 일이다.

삼각 무역의 형태는 유럽에서 일용품(공산품), 무기 등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 노예와 교환한 후 아메리카에 가서 파는 것이며 아메리카에서 노예를 팔고 설탕과 담배 등을 사고 유럽으로 돌아와 파는 것이다. 특히 영구이 삼각무역의 덕을 봤는데 영국은 삼각무역을 통해 공업을 발전시켰다.

아메리카에 팔려간 노예는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인간적 존재가 아닌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아메리카에서 만들어진 흑인법(1685)에는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고, 주인의 마음대로 처벌할수 있으며, 주인의 동의없이 결혼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해방되는 노예는 극소수였다.

아메리카에 팔려간 노예는 부두교와 같은 토속 종교, 브레이크 댄스, 블루스, 소울, 재즈 등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그림 1,2 신항로 개척 이후 무역의 형태. 똑같은 내용을 표시하고 있다. 기억해야 될건 신항로 개척으로 오스만의 중개무역이 사라지고 유럽이 아시아와 직접 교역을 했다는 것, 그리고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의 삼각 무역이다. 특히 아시아로 꾸준히 은이 유입되는데 이는 중국의 무역 태도 및 유럽상품에 비해 아시아 상품들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림 3 노예 무역 노예 무역이 17세기에 증가하기 시작해 18세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1은 금성, 2는,3은 천재)

 

노예무역은 19세기에 들어오자 자유와 민권 사상에 눈을 뜬 유럽인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이후 덴마크(1805), 영국(1807), 프랑스(1818)순으로 노예 무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사람들은 비밀리에 노예 무역을 계속 하였고, 영국(1833),프랑스(1848)의 뒤를 이어 노예 노동에 의존하던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도 186~1880년 사이에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1. 대항해시대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오늘날의 젊은세대들은 일본코에이사의 게임인 대항해시대덕분에 대중화가 되어 더더욱 그렇게 느낄수도 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는 오리엔탈리즘적인 느낌이 나기 때문에 좀더 중립적인 대 발견 시대, 대 탐험 시대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본문으로]
  2. 바스코 다 가마는 신항로 개척의 이유를 '향신료와 크리스트교인'이라고 했다. 이는 존 프레스터 전설에 기인한 말인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이슬람과의 싸움과정을 통해 성장한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봐서 동방에서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 이슬람을 타도하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민석홍의 서양사개론에는 오스만의 무역 독점이 신항로개척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엔 무리가 있다고 서술했는데 교과서에는 주요하게 서술했으므로 패스.ㅋㅋ [본문으로]
  4.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개론과 지리학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대탐험시대로 부정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항구에는 전문적 해도학자들이 있었다. [본문으로]
  5. 삼각돛의 도입, 마스트 숫자의 증가, 카라벨선의 등장과 동시에 함에 대포를 장착함으로써 해양전술까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배들의 배수량은 230톤정도밖에 안되는 등 생각보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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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4. 1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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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왕조와 악숨왕조가 아프리카의 고대 왕국중에서 눈에 띤다면 후에 나타나는 왕조들은 기록 문헌의 부족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교과서에서 개별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크게 아프리카의 이슬람화, 사하라 교역권, 몽골제국의 교역망, 대항해시대의 발견 및 노예 무역의 활성화 등으로 다른 주제와 연관되어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그렇다고 아프리카가 미개와 야만의 지역은 아니다. 각기 독자적인 도시 문명을 꽃피웠다.) 

이후에 제국주의에 맞선 아프리카의 대항과 함께(그나마 이것도 교육과정이 점차 바뀌면서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점령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서술하던 분위기에서 좀 벗어난 듯 하다.) 열강의 아프리카를 대하는 이중적인 면, 이후에 세계대전을 겪은 후의 아프리카로 크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아프리카의 이슬람왕조.

북부 아프리카는 기존의 지중해 문화권과도 근접한 영역으로 이집트 문명이 발전하는 등 서양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7세기 급속적으로 팽창한 이슬람 세력은 중동지방 뿐만 아니라 북부 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했다. 오늘날에도 북부 아프리카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대다수 인듯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2.사하라 횡단 교역(금, 상아, 소금, 노예)과 이슬람화

(1)사하라 횡단 교역

기원전에 시작된 사하라 횡단 교역은 이슬람교가 사하라 이남까지 전파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를 통해 이슬람교와 토착 문화가 만나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상인들은 금과 상아를 찾아 낙타를 이끌고 오아시스에서 오아시스로 옮겨가며 사하라를 가로질러 갔다.아프리카 사하라 교역권의 주요 물품은 금과, 상아, 소금, 노예이다. (주로 낙타를 이용해 운반. 낙타 2000마리 행렬의 대상인도 있었따는)

금은 사하라 너머 가나와 세네갈, 나이저 강 일대에서 생산 되었으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를 거쳐 북유럽까지 운반되었으며, 이러한 금에 대한 수요는 기존 아프리카 인이 구리로 장신구를 선호한 것을 금으로 바꿨다.

상아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에서 상아 세공업이 발달하면서 거래가 활기를 띠었다. 10세기에 인도와 중국인도 가공하기에 좋은 아프리카산 상아를 수입하면서 수요가 늘었다.

소금음 채색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소금은 금이나 곡식으로 교환되었다.

이슬람 상인은 노예도 잡아서 거래했다. 흔히 노예무역은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인들에 의해 대거 자행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전부터 아프리카 노예를 잡아다 거래했다.  아프리카의 노예는 주인과 함께 살면서 농사를 지을뿐 신분상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그같은 이유로 아프리카 인은 다른 지역의 노예가 얼마나 가혹한지 모르고 상인들에게 노예를 넘겨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노예로 잡힌 아프리카 인은 사막을 걸어서 카이로의 노예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2)이슬람 문화와 토착 문화의 결합 (모스크 설립, 스와힐리어 등)

아프리카의 지배층은 권력 강화, 교역 증대, 전문 인력의 확보 등을 목적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모스크와 대학을 설립해 아랍어를 배우도록 장려했다. 이는 지배층은 이슬람 문화, 하층민은 토착 문화를 유지하는 이원적인 체계를 가지게 했다.

사하라 횡단 교역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은 서아프리카의 가나왕국 등이 성장하게 했고 도시도 발달시켰다. 11세기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는 11세기 후반 무라비트 왕조, 12세기 전반 무와히드 왕조같은 이슬람 국가가 등장해 사하라 사막 이남에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무라비트 왕조가 가나 왕조를 무너뜨리고 서아프리카의 이슬람화가 촉진되어 말리 왕조, 송가이 왕조같은 이슬람 국가가 등장했다. 13세기 등장한 말리 왕조는 선진적 이슬람 세계의 법률, 행정, 언어등을 받아들였고 사하라사막 교역로를 장악했으며 이후 중남아프리카에도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각주:1]

동부아프리카는 이슬람 상인을 중심으로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모가디슈, 몸바사, 잔지바르, 킬와, 모잠비크 등의 동남부 해안 도시들은 인도양 무역의 관문 역할을 했다.

이슬람 문화의 풍경은 이슬람 신학자들이 코란을 연구하기 위해 학교를 100개 넘게 세웠으며,[각주:2] 아프리카 건축 기술과 이슬람 문화의 결합인 모스크가 세워졌다. 또한 동아프리카 해안에 인도양 무역권에 이슬람 상인들이 드나들었으며, 이슬람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퍼져 나가 스와힐리어가 만들어졌다.  후에 동남아시아와 중국 상인들도 왕래하면서 독특한 문화가 나타났다.

 

 

 

 그림 1 아프리카의 이슬람화 - 출처, 금성출판사 세계사(폰카로 엉망으로 찍어서 엉망이네);;

 

 

지금은 아프리카의 사하라 교역과 이슬람화에 대해서만 썼는데 간단하게나마 좀더 알고 싶으면 www.africamuseum.or.kr 에 소개된 것 참조해도 되며, 깊게 알고싶으면 도서관에 아프리카사 책을 참고해야 될 듯.(몇 없지만.)

 

 

 

그림 2 -이븐 바투타의 여행경로.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14세기 이슬람의 입장에서도 잘 서술해 놓아 사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와 비교되는 건 마르코 폴로는 이슬람과 인도지역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르코폴로는 초원길과 비단길로 중국을 다녀왔지만(돌아올때 뱃길이용) 이븐 바투타는 아프리카, 서아시아. 인도, 동남아. 중국을 거쳤다.

  1. 그러나 사하라 이남 지역의 이슬람교는 일부 지배층의 종교이며 토착 종교가 대부분이긴 하다. [본문으로]
  2. 이븐 바투타는 중국 등지도 여행했지만 사하라 사막을 지나 말리 왕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여행기"에서 말리의 토착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묘사했다. 이븐 바투타는 서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뱃길로 동아프리카의 무역 거점을 비롯해 비단길과 인도 뱃길로 원의 수도인 대도까지 여행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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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4. 15.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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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사 시간을 시작할때 인류의 기원을 아프리카에서 찾으면서도 아프리카는 19세기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 전까지는 미지의 대륙이었다. 실제로 고대 아프리카에 대한 기록이 드물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역사도 소략하다.

고대에도 지중해와 홍해 연안 국가들(이집트, 이슬람), 대항해시대의 서부 아프리카 남아공 지방 등등이 알려지고, 노예 무역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내부가 알려진 것은 제국주의가 아프리카를 가지고 짬짜미(-_-;)를 하려 했던 시절부터 내부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세계사 시간에 배울때도 인류의 기원을 할때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최초 발견 된 곳이 아프리카 라고 잠깐 배우기만 할뿐 구체적으로 배우지는 않는다.

 

고교 교육과정에서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고대에 대해서 문명,문화의 형성 파트의 심화학습 부분으로 학습하고 있다. (현재 나온 2009개정교육과정에 따른 4종 교과서 모두 다루지는 않았다.)그러나 내용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고 약간약간 다르다.

일단, 쿠시 왕조, 악숨 왕조, 가나 왕조, 말리 왕조, 콩고 왕조, 루바 왕조, 룬다 왕조. 교과서에 있는 지도에 이렇게 7왕조가 소개되어 있으나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은 쿠시 왕조와 악숨 왕조, 가나왕조 정도이다. (그러나 실제로 굉장히 많은 왕조가 있고 역사도 오래 되었으나. 그리 중요하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으며, 쿠시 왕조, 악숨 왕조, 가나 왕조정도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있지만 단편적인 사실관계지식의 나열정도.)

 

 

크게 동부 아프리카(쿠시 왕조(1100B.C경~ AD350 경, 악숨 왕조(BC300~ AD500년대), 서부 아프리카(가나 왕국 4~11C, 말리 왕조 13~15C), 남부 아프리카(콩고 왕조14~18C, 룬다 왕조, 루바 왕조. (지역에 따른 자의적 구별;;)로 구별할 수 있다. 지역과 함께 시기도 차이가 나니 기억하기 더 편할 듯.

 

 

 

 그림1 아프리카의 왕국(쿠시 왕조와 악숨 왕조가 빠졌는데 쿠시 왕조는 나일상 상류에 걸쳐있고. 악숨 왕조는 그 바로 옆에 홍해의 커브(?)의 왼편 홍해 연안에 위치한다, 룬다 루바왕조는 룬다왕조는 콩고왕국에서 오른쪽 으로 2센치쯤 가면있는 자이르강의 지류에 딸려있고 루바왕국은 잔지바르의 글자 '잔'에 있는 호수? 영역에 걸쳐있다. )

 

(1)쿠시 왕조

기원전 1000년경 이집트 문명(신왕국)의 영향으로 성립. 이집트를 정복했다.(고대 이집트의 25대 파라오왕조) 쿠시 문명은 이집트 문명과 더불어 발전한 아프리카 문명의 하나로 수도 카르마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했으며, 이집트 파라오와 달리 관습법에 따라 통치하고 세습이 아닌 선출을 통해 즉위하는 왕정 제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대 다른 국가에 없었던 혁신적인 왕정 제도였다. 중국, 인도 , 지중해와 교역했다.

 

(2)악숨 왕조

셈족 계열이 현재의 에티오피아 지역에 기원전 120년경 건설했다. 아라비아 반도를 지배하기도 했다. 악숨 왕조는 북아프리카 무역 국가로 인도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상아, 금, 향신료 등을 거래했으며, 3세기 경부터 그 세력을 서부로 확장했다.  독자적 화폐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며 에티오피아 북부에 그 유적이 남아 있으며, 4세기경 크리스트교가 전해져 국교로 전해졌다. 7세기 등장한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점차 쇠퇴하다 10세기경에 멸망했다.(교과서의 서술이 조금 다르다. 하나는 6세기 까지. 하나는 7세기 쇠퇴하다 10세기 멸망)

악숨 왕조의 오벨리스크

 

(3)가나 왕조

최초의 아프리카 토착 왕조. 가나 왕조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8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가나 왕조는 사하라 횡단 무역을 통해  금, 상아, 소금 등을 수출하며 번영했다. 과도한 인구 밀집과 사마라 사막의 팽창으로 식량부족으로 쇠퇴했으며 11세기경 이슬람 세력(모라비드 왕조)과 부족 침입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말리 왕국과 송가이 왕국으로 계승되었다.

 

가나 왕조를 계승한 말리 왕조는 서아프리카에서 1235년부터 1645년까지 존재했던, 만딩고족이 세운 제국이었다. 순디아타 케이타에 의해 세워졌고, 특히 만사 무사의 부로 인해 유명해졌다. 말리 제국은 서아프리카에 문화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나이저 강을 따라 언어, 법, 관습 등을 퍼뜨렸다. 넓은 지역을 다스렸으며, 많은 속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정하였으며, 말리는 지금도 이슬람교가 9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위키백과 - 박승무, 신비의 세계 서아프리카의 역사, )

 

 

(4)콩고 및 룬다, 루바왕조

콩고와 룬다, 루비왕조에 대해서는 최근에 알려졌다. 8세기경 룬다 루바왕조가 전성기였으나 13~15세기에는 콩고 왕국이 전성기였다고 전해진다. 1414년 포르투갈 항해단에 의해서 그 존재가 유럽에 알려졌다. 그 이후 몇개의 왕조가 교체되고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18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면서 제국주의의 영향력에 들어가게 된다.

 

 

아프리카 고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시기상 쿠시 왕조, 악숨 왕조, 가나 왕조가 포함되므로 이 왕조에 대해서 알아두면 될듯. 나머지 말리왕조, 콩고왕조 등은 시기적으로 유럽이 중세 이후에 나타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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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