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토픽2013. 4. 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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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이슬람 무역 상인들의 활동 범위에 포함되어 알려졌던 중세 아프리카도 신항로 개척으로 본격적으로 유럽인들에게 탐험되기 시작한다. 비록 신항로 개척을 위한 뱃길 위주의 탐험이지만 이때부터 유럽인들이 무력으로 아프리카에 다가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1.신항로 개척

15세기 무터 활발하게 전개된 신항로의 개척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각주:1]

(1)신항로 개척의 배경 

신항로가 개척되게 된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동서 문명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비단과 향신료로 대표되는 동양과의 무역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동양에 대한 유럽인의 호기심을자극했다. 동방의 크리스트교국 존 프레스터의 전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각주:2] 그러나 이 시기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서 오스만제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점도 유럽인이 직접적인 항로를 탐험하게 된 원인중에 하나다. [각주:3]

기술적인 발전도 신항로 개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나침반이 전래되고, 천문학과, 지리학[각주:4]이 발달하고 조선술[각주:5]의 발달로 원거리 항해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화기의 발달과 이를 이용한 해전에서 화포사용은 유럽인의 해외진출을 용이하게 했다.

특히 이러한 중계 무역권에서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신항로를 개척에 뛰어들었다. 이 두 국가는 이슬람과의 다툼에서 왕권(1479년 에스파냐 왕국 성립)을 강화해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계무역에 소외된 지리적 위치가 오히려 대서양 방면의 진출로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배경이 있다.

(2)신항로 개척의 전개

신항로 개척에 앞장 선 사람은 항해왕자로 불리는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1394~1460)였다. 엔리케 왕자는 1420년부터 과학적 탐험대를 정기적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441년 보아도르 압(카나리아 제도 근처에 있는건가? 헷갈림)을 발견하고 이후 시에라 레오네에 도달했다(1462) 1471년에는 적도를 넘었으나 해안선이 남으로 구부러져 실망했다. 이후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탐험이 일시중단되었따.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1487년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인 희망봉을 발견했다. 그는 심한 폭풍우 끝에 이 압을 발견했으나 디아스의 보고를 들은 국왕은 희망봉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콜럼버스가 죽을때까지 인도라고 믿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1492) 그렇지만 포르투갈 왕실은 그것이 인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1498년 캘리컷에 도착한다. 항해동안 2년이 넘는 기간, 3분의1이상의 선원 사망, 300일 연속의 해상 생활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60배 이상의 이윤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무장병력의 파견이 시작되었다. 1500년 포르투갈은 상선대를 파견하고 1502년 바스코 다 가마를 다시 파견해 캘리컷에 무장사격을 가하고 아랍상인들의 함대를 해상에서 격파하는 등 이슬람상인을 배제하고 향료무역에서 우위를 독점하기를 원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전면적인 점령이 아닌 무역거점과 군사기지를 설치하는데 집중했는데 불필요한 마찰과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왕실의 지원을 받아 1492년 8월 바하마 제도에 도착했다. 이후 3회에 걸쳐 항해를 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는 대서양항로의 탐험을 자극했다.

영국의 존 캐보트(발음은 캐벗이라고 하던것 같았는데, 교과서같은데 캐보트라고 나오네)1496년 헨리7세의 후원으로 캐나다를 발견했고,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아메리카 대륙이 신대륙임을 발표했다.

교황 알렉산더 2세는 베르데제도의 서쪽 500km해상에 경계선을 설정하고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한다고 했으나 포르투갈이 1300km 서쪽으로 경계선을 이동시키는 토르데실라스조약이 체결되었다.(1494) 이후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에스파냐는 몰루카제도의 권리를 포르투갈에게 팔아 넘기고 양국의 경계선을 몰루카제도 동방 17도선으로 정하는 조약이 있었다. 즉 기존의 토르데실라스 조약이 베르데제도 1300km지점의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마젤란에 의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되자 그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따라서 몰루카제도 동방 17도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에스파냐령, 서쪽은 포르투갈령이 되는것.

 

시간이 흘러 마젤란은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을 횡단해 에스파냐로 돌아왔다(1522) 1519년에 출발해 3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3)신항로 개척의 결과

신항로 개척으로 가장 큰 영향은 세계적 교역망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유럽-오스만-아시아 의 구조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까지 아우르는 무역망이 연결되었다. 특히 세계적인 화폐로 은의 사용이 확대되었는데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은이 유럽으로 이동하고 다시 중국으로 은이 이동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교역망의 형성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가격 혁명과 상업 혁명이 일어났다.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은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로인해 물가가2~3배로 치솟는 가격 혁명이 일어났으며, 가격혁명으로 인해 지대에 의존하는 지주와 임금노동자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반대로 상인과 금융업자, 농노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고 이는 금융업이 발달을 촉진했다. 어음 교환을 통해 현금을 휴대하지 않고 원거리 무역을 하거나, 자본이 없는 상인도 투자자로부터 돈을 빌려 해왜 진출에 뛰어들게 했다. 결과적으로 근대적 기업 형태의 주식회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은 부와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상업 혁명은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의 상업 자본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나타난 상업활동의 변화를 말한다. 상업혁명으로 유럽의 상업 자본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까지 확대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아메리카의 은을 아시아에 판매했고, 영국의 동인도 회사도 은을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은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시장의 출현과 함께 세계적인 자본주의체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토양이 되었으며 시민계급(중산계급)이 자라게 했다.

유럽인의 생활도 많은 부분 변화했다. 차와 면직물, 감자와 옥수수, 고추, 담배 등이 들어와 일상생활에 자리잡게 되었다. 반대로 유럽에서 소와 말 커피와 사탕수수가 아메리카에 전해졌다. 아프리카에서도 금과 상아 뿐만 아니라 흑상아로 불리는 노예가 많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기호의 변화는 무역의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인의 아메리카 침략과 노예 무역이 형성되는 등 부정적인 일도 자행되었다. 에스파냐 인과 포르투갈인들의 침략으로 토착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매독, 천연두같은 질병이 옮겨졌으며 식민지화로 많은 수탈을 당했다.

 

2.노예무역

항로 개척으로 대서양 교역은 17세기 삼각 무역을 발전시켰다. 유럽에서 설탕과 담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아메리카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과 담배 농장에(대농장 경영) 노동력이 필요했고, 광산의 개발또한 노동력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그래서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노예 무역에 참여하여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묶는 삼각 무역이 전개되었다. 노예 무역은 8세기 중반 이슬람 상인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본격적인 것은 신항로 개척 이후의 일이다.

삼각 무역의 형태는 유럽에서 일용품(공산품), 무기 등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 노예와 교환한 후 아메리카에 가서 파는 것이며 아메리카에서 노예를 팔고 설탕과 담배 등을 사고 유럽으로 돌아와 파는 것이다. 특히 영구이 삼각무역의 덕을 봤는데 영국은 삼각무역을 통해 공업을 발전시켰다.

아메리카에 팔려간 노예는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인간적 존재가 아닌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아메리카에서 만들어진 흑인법(1685)에는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고, 주인의 마음대로 처벌할수 있으며, 주인의 동의없이 결혼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해방되는 노예는 극소수였다.

아메리카에 팔려간 노예는 부두교와 같은 토속 종교, 브레이크 댄스, 블루스, 소울, 재즈 등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그림 1,2 신항로 개척 이후 무역의 형태. 똑같은 내용을 표시하고 있다. 기억해야 될건 신항로 개척으로 오스만의 중개무역이 사라지고 유럽이 아시아와 직접 교역을 했다는 것, 그리고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의 삼각 무역이다. 특히 아시아로 꾸준히 은이 유입되는데 이는 중국의 무역 태도 및 유럽상품에 비해 아시아 상품들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림 3 노예 무역 노예 무역이 17세기에 증가하기 시작해 18세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1은 금성, 2는,3은 천재)

 

노예무역은 19세기에 들어오자 자유와 민권 사상에 눈을 뜬 유럽인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이후 덴마크(1805), 영국(1807), 프랑스(1818)순으로 노예 무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사람들은 비밀리에 노예 무역을 계속 하였고, 영국(1833),프랑스(1848)의 뒤를 이어 노예 노동에 의존하던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도 186~1880년 사이에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1. 대항해시대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오늘날의 젊은세대들은 일본코에이사의 게임인 대항해시대덕분에 대중화가 되어 더더욱 그렇게 느낄수도 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는 오리엔탈리즘적인 느낌이 나기 때문에 좀더 중립적인 대 발견 시대, 대 탐험 시대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본문으로]
  2. 바스코 다 가마는 신항로 개척의 이유를 '향신료와 크리스트교인'이라고 했다. 이는 존 프레스터 전설에 기인한 말인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이슬람과의 싸움과정을 통해 성장한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봐서 동방에서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 이슬람을 타도하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민석홍의 서양사개론에는 오스만의 무역 독점이 신항로개척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엔 무리가 있다고 서술했는데 교과서에는 주요하게 서술했으므로 패스.ㅋㅋ [본문으로]
  4.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개론과 지리학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대탐험시대로 부정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항구에는 전문적 해도학자들이 있었다. [본문으로]
  5. 삼각돛의 도입, 마스트 숫자의 증가, 카라벨선의 등장과 동시에 함에 대포를 장착함으로써 해양전술까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배들의 배수량은 230톤정도밖에 안되는 등 생각보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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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