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토픽2013. 4. 24.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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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연대

1806 영국 케이프타운 점령 - 1830 프랑스 알제리 점령 - 1847 라이베리아 독립(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 - 1878 스탠리 콩고강 유역 탐험(벨기에의 콩고 점령) -1884 베를린 회의(아프리카 분할 문제 논의) - 1898 파쇼다 사건

 

 

19세기 제2차산업혁명의 발달에 힘입어 열강은 세계를 식민지화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로 크게 나눠서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아프리카는 수난의 역사가 지속... 어쩌면 너무 불행한 역사만 기억하기때문에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를 설명하려면 제국주의의 정의와 배경, 전개에 대해서 설명해야 되지만 일단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점령했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보기로.

(1)아프리카 탐험 초기

이전까지의 유럽인들은 수면병,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 때문에 아프리카 내륙으로 깊숙히 진출할 수 없었다. 이전까지는 연안 지방을 중심으로 무역 거점을 점령했을 뿐이다. 본격적인 내륙 진출은 풍토병에 대한 치료제 개발 이후부터이다.

또한 탐험가들의 여행도 큰 기여를 했다. 리빙스턴과 스탠리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리빙스턴은 스코트랜드 출신의 선교사로 전도를 목적으로 1840년 남아프리카에 갔다. 그런데 이들의 성향 또한 백인의 책무를 가진(?) 성향이었다. 리빙스턴은 영국 군대와 상인이 들어와야 선교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빙스턴은 1852년 케이프타운을 출발해 육로로 서안의 루안다를 커져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해 켈리마네에 갔다. 중간에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그리고 1856년 귀국해 남아프리카 전도 여행기라는 책을 펴냈고 이후 1856년 다시 아프리카를 탐험했다. 그는 이때 1856년 유럽인들의 노예사냥 실태를 폭로해 노예무역 금지에 일정 기여했다. 리빙스턴은 1871년 나일 강의 수원을 찾다 실종되었는데 이를 찾기위해 '뉴욕헤럴드'가 미국 출신의 스탠리를 파견했다.  스탠리와 리빙스턴은 1871년 11월 아프리카 중부의 탕가니카 호수 근처의 마을에서 만났다. 그 후 리빙스턴은 스탠리 일행과 조사를 같이하다 1873년 사망했다.

이들의 탐험은 열강의 아프리카 침략에 이용되었다. 리빙스턴의 탐험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스탠리는 벨기에의 왕이던 레오폴드2세에게 고용되어 콩고강 일대를 탐험하고 벨기에의 침략을 도왔다. 벨기에는 콩고를 직접 지배하면서 복리 후생 시설 등을 제공했으나 아프리카인의 정치적 권리는 무시했다.

백인의 짐

 

백인의 책무를 다하라

그대가 길러낸 가장 훌륭한 후손을 보내라

그대의 자식을들 유배지로 보내라

그대 포로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거칠고 사나운 그대들의 새 백성을 돌보라

무뚝뚝한 그들은 그들은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

 

백인의 책무를 다하라

평화를 위한 격렬한 싸움 속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입을 채우고

질병을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네가 너의 목적을 달성할 떄쯤

너를 원하는 다른 미개인들을 위해

다른 원주민과 이교도에게로 시선을 돌려라

그들의 광기를 끝낸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키플링-

세실 로즈의 유언집(1902)에서

영국은 국토가 좁아 3,6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600만 명만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 영국의 생산품을 팔 수 있는 지구상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영국인이 세계 제1의 인종이고, 우리 영국인이 지배하는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인류가 행복해지며,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 1 세실로즈

 

(2)아프리카 분할의 전개

영국이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로부터 1815년 케이프타운 식민지(희망봉이라고 생각하면됨) 얻자 네덜란드의 후손인 보어인은 북쪽으로 이동해 트랜스바알과 오렌지자유국을 세웠다.

1875년 이집트의 재정난을 이용해서 수에즈 운하의 최대가 되고 이후 아라비 파샤의 민족주의 반란을 제압해 1882년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남북의 기점을 바탕으로 영국은 종단정책을 추진했다.

앞서 영국이 케이프타운 식민지를 얻자 보어인이 트랜스바알과 오린지자유국을 세우는데. 트랜스바알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를 차지하기 위해 보어전쟁을 일으켰다.(1899~1902) 이 결과로 영국은 트랜스바알을 합병하고 남아프리카 전체를 차지한다. 그러나 후에 영연방 자치령인 남아공 연방을 조직하게 된다.(1910)

 

프랑스는 1830년 투르크로부터 알제리를 획득하고 이를 거점으로 동진해 튀니지를 얻었다(1881), 남쪽으로도 진겨개 사하라사막을 포함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와 적도아프리카를 획득하고 홍해 인근에 약간의 땅과 마다가스카르 섬을 얻었다(1896) 이렇게 프랑스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을 세웠으나 파쇼다에서 후퇴해 영국의 이집트 지밸르 인정하는 대신 모로코에 대한 진출을 인정받아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따(1911)

중간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놓고 대립했다. 프랑스인에 의해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했으나 후에 최대 주주는 영국이 되었고 결국 이집트를 영국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은 파쇼다(지금의 수단 중부)에서 마주쳐 파쇼다 사건이 일어났지만(1898) 전술한대로 프랑스가 양보하고 후에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게 된다.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달성한 후 유럽에서 현상유지에 힘쓰나 국가차원이 아닌 개별적 차원에서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이러한 개별적 진출을 토대로 독일은 토고와 카메룬을 얻고(1884~1885),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이후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으로 독일은 크루거 전보사건(1896)을 일으켜 영국과 대립하고, 모로코에서도 2차례의 모로코 사건(1905, 1911)을 일으켜 프랑스와 충돌했다.[각주:1] 이때 1911년 열강의 관심이 모로코 사건에 쏠려 있는 틈을 타 이탈리아가 투르크와 전쟁을 일으켜 트리폴리를 점령하기도 했다.(이토전쟁)

 

이탈리아는 뒤늦게 통일 달성후 제국의 위신을 위해 아프리카로 진출했으나 홍해연안의 에리트리아와 인도양의 이탈리아령 소마릴랜드를 획득했으나, 프랑스에게 튀니지를 선취당하고 에티오피아 군에게 패배했다.(1896, 후에 2차 세계대전때 무솔리니는 이때의 패배를 설욕한다는 명분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에 19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서 트리폴리를 얻고,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스탠리의 탐험을 후원한 벨기에는 콩고자유국을 승인해 (1884) 관리하다가 1908년 식민지로 병합했고,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소유하게 되었다.

 

결국 1914년경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유지하는 나라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였다.

라이베리아는 1841년 흑인 조지프 로버츠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 되었고, 1847년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의 노예제 폐지 이후 해방노예는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때 아프리카에 돌아온 해방노예들이 건설한 국가이다. '자유의 나라'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초기엔 미국의 보호국이고 지배층은 백인, 수도는 미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이름을 딴 먼로비아 였다. 즉 미국을 그대로 본뜻것.

 

그림 3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왼쪽 맨위에 모로코가 보임.

 

 

 

(3)아프리카 인의 저항

 

당.연. 히. 아프리카인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인들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30여년간 저항했으며, 프랑스는 10여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겨우 점령할 수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프랑스와 두차례 전쟁 끝에 여왕이 폐위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곳곳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수단에서는 반외세를 주장하는 마흐디 운동 세력이 이집트를 간섭하던 영국을 공격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독일이 지배하던 나미비아 지역에서는 토착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탄자니아 지역에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주술사가 앞장서기도 했다. 1905년 일어난 봉기를 마지(스와힐리어로 물)마지 봉기라고 한다. 독일인들이 면화생산을 위해 탄자니아 인들을 강제동원하자 주술사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이다. 3년간 독일에 맞섰지만 무참히 진압당했다.

에티오피아는 동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민족 운동을 주도했다.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통일 후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수에즈 운하 개통 후에 에티오피아는 주요 거점이 되어 영,프,이가 차지하려고 했으며, 1890년 이탈리아가 침략했으나 막아냈으며 1896년엔 아도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서부아프리카에서는 사무리 투레가 민족 운동을 이끌었는데 사모리투레는 니제르강 유역에 제국을 건설하고 프랑스에 저항했으나 1898년 사모리 투레가 체포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줄루 왕국의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림3 출처 더텍스트 세계사-

  1. 모로코사건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단순히 아프리카 점령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 세계대전으로 가는 방향에서 열강끼리 부딪힌 사건이므로 제국주의와 연관되어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일것 같다. 교과서마다 아프리카 분할, 제국주의파트별로 다르게 실어 놓았는데 제국주의를 설명할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수월한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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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