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토픽2013. 4. 1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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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왕조와 악숨왕조가 아프리카의 고대 왕국중에서 눈에 띤다면 후에 나타나는 왕조들은 기록 문헌의 부족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교과서에서 개별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크게 아프리카의 이슬람화, 사하라 교역권, 몽골제국의 교역망, 대항해시대의 발견 및 노예 무역의 활성화 등으로 다른 주제와 연관되어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그렇다고 아프리카가 미개와 야만의 지역은 아니다. 각기 독자적인 도시 문명을 꽃피웠다.) 

이후에 제국주의에 맞선 아프리카의 대항과 함께(그나마 이것도 교육과정이 점차 바뀌면서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점령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서술하던 분위기에서 좀 벗어난 듯 하다.) 열강의 아프리카를 대하는 이중적인 면, 이후에 세계대전을 겪은 후의 아프리카로 크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아프리카의 이슬람왕조.

북부 아프리카는 기존의 지중해 문화권과도 근접한 영역으로 이집트 문명이 발전하는 등 서양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7세기 급속적으로 팽창한 이슬람 세력은 중동지방 뿐만 아니라 북부 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했다. 오늘날에도 북부 아프리카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대다수 인듯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2.사하라 횡단 교역(금, 상아, 소금, 노예)과 이슬람화

(1)사하라 횡단 교역

기원전에 시작된 사하라 횡단 교역은 이슬람교가 사하라 이남까지 전파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를 통해 이슬람교와 토착 문화가 만나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상인들은 금과 상아를 찾아 낙타를 이끌고 오아시스에서 오아시스로 옮겨가며 사하라를 가로질러 갔다.아프리카 사하라 교역권의 주요 물품은 금과, 상아, 소금, 노예이다. (주로 낙타를 이용해 운반. 낙타 2000마리 행렬의 대상인도 있었따는)

금은 사하라 너머 가나와 세네갈, 나이저 강 일대에서 생산 되었으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를 거쳐 북유럽까지 운반되었으며, 이러한 금에 대한 수요는 기존 아프리카 인이 구리로 장신구를 선호한 것을 금으로 바꿨다.

상아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에서 상아 세공업이 발달하면서 거래가 활기를 띠었다. 10세기에 인도와 중국인도 가공하기에 좋은 아프리카산 상아를 수입하면서 수요가 늘었다.

소금음 채색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소금은 금이나 곡식으로 교환되었다.

이슬람 상인은 노예도 잡아서 거래했다. 흔히 노예무역은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인들에 의해 대거 자행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전부터 아프리카 노예를 잡아다 거래했다.  아프리카의 노예는 주인과 함께 살면서 농사를 지을뿐 신분상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그같은 이유로 아프리카 인은 다른 지역의 노예가 얼마나 가혹한지 모르고 상인들에게 노예를 넘겨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노예로 잡힌 아프리카 인은 사막을 걸어서 카이로의 노예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2)이슬람 문화와 토착 문화의 결합 (모스크 설립, 스와힐리어 등)

아프리카의 지배층은 권력 강화, 교역 증대, 전문 인력의 확보 등을 목적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모스크와 대학을 설립해 아랍어를 배우도록 장려했다. 이는 지배층은 이슬람 문화, 하층민은 토착 문화를 유지하는 이원적인 체계를 가지게 했다.

사하라 횡단 교역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은 서아프리카의 가나왕국 등이 성장하게 했고 도시도 발달시켰다. 11세기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에는 11세기 후반 무라비트 왕조, 12세기 전반 무와히드 왕조같은 이슬람 국가가 등장해 사하라 사막 이남에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무라비트 왕조가 가나 왕조를 무너뜨리고 서아프리카의 이슬람화가 촉진되어 말리 왕조, 송가이 왕조같은 이슬람 국가가 등장했다. 13세기 등장한 말리 왕조는 선진적 이슬람 세계의 법률, 행정, 언어등을 받아들였고 사하라사막 교역로를 장악했으며 이후 중남아프리카에도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각주:1]

동부아프리카는 이슬람 상인을 중심으로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모가디슈, 몸바사, 잔지바르, 킬와, 모잠비크 등의 동남부 해안 도시들은 인도양 무역의 관문 역할을 했다.

이슬람 문화의 풍경은 이슬람 신학자들이 코란을 연구하기 위해 학교를 100개 넘게 세웠으며,[각주:2] 아프리카 건축 기술과 이슬람 문화의 결합인 모스크가 세워졌다. 또한 동아프리카 해안에 인도양 무역권에 이슬람 상인들이 드나들었으며, 이슬람 상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퍼져 나가 스와힐리어가 만들어졌다.  후에 동남아시아와 중국 상인들도 왕래하면서 독특한 문화가 나타났다.

 

 

 

 그림 1 아프리카의 이슬람화 - 출처, 금성출판사 세계사(폰카로 엉망으로 찍어서 엉망이네);;

 

 

지금은 아프리카의 사하라 교역과 이슬람화에 대해서만 썼는데 간단하게나마 좀더 알고 싶으면 www.africamuseum.or.kr 에 소개된 것 참조해도 되며, 깊게 알고싶으면 도서관에 아프리카사 책을 참고해야 될 듯.(몇 없지만.)

 

 

 

그림 2 -이븐 바투타의 여행경로.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14세기 이슬람의 입장에서도 잘 서술해 놓아 사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와 비교되는 건 마르코 폴로는 이슬람과 인도지역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르코폴로는 초원길과 비단길로 중국을 다녀왔지만(돌아올때 뱃길이용) 이븐 바투타는 아프리카, 서아시아. 인도, 동남아. 중국을 거쳤다.

  1. 그러나 사하라 이남 지역의 이슬람교는 일부 지배층의 종교이며 토착 종교가 대부분이긴 하다. [본문으로]
  2. 이븐 바투타는 중국 등지도 여행했지만 사하라 사막을 지나 말리 왕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여행기"에서 말리의 토착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묘사했다. 이븐 바투타는 서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뱃길로 동아프리카의 무역 거점을 비롯해 비단길과 인도 뱃길로 원의 수도인 대도까지 여행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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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4. 15.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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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사 시간을 시작할때 인류의 기원을 아프리카에서 찾으면서도 아프리카는 19세기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 전까지는 미지의 대륙이었다. 실제로 고대 아프리카에 대한 기록이 드물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역사도 소략하다.

고대에도 지중해와 홍해 연안 국가들(이집트, 이슬람), 대항해시대의 서부 아프리카 남아공 지방 등등이 알려지고, 노예 무역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내부가 알려진 것은 제국주의가 아프리카를 가지고 짬짜미(-_-;)를 하려 했던 시절부터 내부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세계사 시간에 배울때도 인류의 기원을 할때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최초 발견 된 곳이 아프리카 라고 잠깐 배우기만 할뿐 구체적으로 배우지는 않는다.

 

고교 교육과정에서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고대에 대해서 문명,문화의 형성 파트의 심화학습 부분으로 학습하고 있다. (현재 나온 2009개정교육과정에 따른 4종 교과서 모두 다루지는 않았다.)그러나 내용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고 약간약간 다르다.

일단, 쿠시 왕조, 악숨 왕조, 가나 왕조, 말리 왕조, 콩고 왕조, 루바 왕조, 룬다 왕조. 교과서에 있는 지도에 이렇게 7왕조가 소개되어 있으나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은 쿠시 왕조와 악숨 왕조, 가나왕조 정도이다. (그러나 실제로 굉장히 많은 왕조가 있고 역사도 오래 되었으나. 그리 중요하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으며, 쿠시 왕조, 악숨 왕조, 가나 왕조정도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있지만 단편적인 사실관계지식의 나열정도.)

 

 

크게 동부 아프리카(쿠시 왕조(1100B.C경~ AD350 경, 악숨 왕조(BC300~ AD500년대), 서부 아프리카(가나 왕국 4~11C, 말리 왕조 13~15C), 남부 아프리카(콩고 왕조14~18C, 룬다 왕조, 루바 왕조. (지역에 따른 자의적 구별;;)로 구별할 수 있다. 지역과 함께 시기도 차이가 나니 기억하기 더 편할 듯.

 

 

 

 그림1 아프리카의 왕국(쿠시 왕조와 악숨 왕조가 빠졌는데 쿠시 왕조는 나일상 상류에 걸쳐있고. 악숨 왕조는 그 바로 옆에 홍해의 커브(?)의 왼편 홍해 연안에 위치한다, 룬다 루바왕조는 룬다왕조는 콩고왕국에서 오른쪽 으로 2센치쯤 가면있는 자이르강의 지류에 딸려있고 루바왕국은 잔지바르의 글자 '잔'에 있는 호수? 영역에 걸쳐있다. )

 

(1)쿠시 왕조

기원전 1000년경 이집트 문명(신왕국)의 영향으로 성립. 이집트를 정복했다.(고대 이집트의 25대 파라오왕조) 쿠시 문명은 이집트 문명과 더불어 발전한 아프리카 문명의 하나로 수도 카르마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했으며, 이집트 파라오와 달리 관습법에 따라 통치하고 세습이 아닌 선출을 통해 즉위하는 왕정 제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대 다른 국가에 없었던 혁신적인 왕정 제도였다. 중국, 인도 , 지중해와 교역했다.

 

(2)악숨 왕조

셈족 계열이 현재의 에티오피아 지역에 기원전 120년경 건설했다. 아라비아 반도를 지배하기도 했다. 악숨 왕조는 북아프리카 무역 국가로 인도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상아, 금, 향신료 등을 거래했으며, 3세기 경부터 그 세력을 서부로 확장했다.  독자적 화폐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며 에티오피아 북부에 그 유적이 남아 있으며, 4세기경 크리스트교가 전해져 국교로 전해졌다. 7세기 등장한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점차 쇠퇴하다 10세기경에 멸망했다.(교과서의 서술이 조금 다르다. 하나는 6세기 까지. 하나는 7세기 쇠퇴하다 10세기 멸망)

악숨 왕조의 오벨리스크

 

(3)가나 왕조

최초의 아프리카 토착 왕조. 가나 왕조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8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가나 왕조는 사하라 횡단 무역을 통해  금, 상아, 소금 등을 수출하며 번영했다. 과도한 인구 밀집과 사마라 사막의 팽창으로 식량부족으로 쇠퇴했으며 11세기경 이슬람 세력(모라비드 왕조)과 부족 침입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말리 왕국과 송가이 왕국으로 계승되었다.

 

가나 왕조를 계승한 말리 왕조는 서아프리카에서 1235년부터 1645년까지 존재했던, 만딩고족이 세운 제국이었다. 순디아타 케이타에 의해 세워졌고, 특히 만사 무사의 부로 인해 유명해졌다. 말리 제국은 서아프리카에 문화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나이저 강을 따라 언어, 법, 관습 등을 퍼뜨렸다. 넓은 지역을 다스렸으며, 많은 속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정하였으며, 말리는 지금도 이슬람교가 9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위키백과 - 박승무, 신비의 세계 서아프리카의 역사, )

 

 

(4)콩고 및 룬다, 루바왕조

콩고와 룬다, 루비왕조에 대해서는 최근에 알려졌다. 8세기경 룬다 루바왕조가 전성기였으나 13~15세기에는 콩고 왕국이 전성기였다고 전해진다. 1414년 포르투갈 항해단에 의해서 그 존재가 유럽에 알려졌다. 그 이후 몇개의 왕조가 교체되고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18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면서 제국주의의 영향력에 들어가게 된다.

 

 

아프리카 고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시기상 쿠시 왕조, 악숨 왕조, 가나 왕조가 포함되므로 이 왕조에 대해서 알아두면 될듯. 나머지 말리왕조, 콩고왕조 등은 시기적으로 유럽이 중세 이후에 나타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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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한문사료2013. 4. 11.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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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氣元不相離 似是一物 而其所以異者 理無形也氣有形也 理無爲也氣有爲也 無形無爲 而爲有形有爲之主者理也有形有爲 而爲無形無爲之器者氣也……氣之偏則理亦偏 而所偏非理也氣也 氣之全則理亦全 而所全非理也氣也

 

 

해석: 이기는 본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흡사 하나의 물체라 할만하나 그것은 다른것으로써 있는바 이는 형제가 없으며 기는 형체가 있다. 이는이룸이 없으며 기는 이룸이 있다. 형체가 없으면서 하는 것도 없고 형체가 있고 하는것의 주인이 이이며, 형체가 있는 것이면 이룸이 있다.  형체가 없고 이룸이 없는 사물은 기이다. 기가 쏠리면 이도 쏠리나 솔리는바는 이가 아니고 기다. 기가 온전하면  역시 이도 온존하나, 이가 온존하지 않은 바는 기이다.

 

정확히 이 글의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아마도 이이의 이통기국론에 대해서 설명한 것인듯. 율곡전서를 막 찾다보면 나오겠지?

이기는 본디 떨어져 있지 않으니 이기일원론의 입장 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기가 함께 오지만 그 성질이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는데, 기가 온전하면 이가 온전하고 이가 온전하면 기가 아니니. 기가 온전한 상태에서 이가 온전하게 보전됨을 알 수 있으므로 이와 기가 한 물체이지만 기가 온전한 상태에서 이가 온전하게 존재하는 기발이승일도설임을 알 수 있다. (아 사상사는 왜이렇게 어려운걸까. 제대로 이해하는 건지 헷갈리네)

 

 

건국 초의 성리학자들 중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인물들은 문물 제도 정비와 부국 강병을 위한 이념으로서 성리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당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후 사림의 본격적인 정계 진출과 맞물려 기존의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는 태도가 나온다. 이때 성리학을 둘러싸고 다양한 학파가 나뉘며 이에 따라 정치적인 태도도 달라진다.

 

 그림 1 사림의 계보도

 

다음과 같이 고려시대 부터 사림의 계보가 이어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정몽주, 길재 등 온건파 사대부들이 조선 개창후 재야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모든 사림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김종직을 필두로 그의 제자들이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김종직은 성종대까지 산 사람이며 조의제문을 써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네번의 사화를 거치면서도 사림들은 지방의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꿋꿋하게 정계에 진출했으며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럽게 정계를 사림들이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선조대부터 학문적 기반에 따라 붕당이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그 흐름은 아래 그림에 간단하게 나와있다.

 

 

그림 2 붕당과 학파의 분화

이황과 조식은 영남학파라고도 하는데 기반이 영남지방이기 때문이다. 이황은 경북 조식은 경남, 그러나 둘이 한번도 만난적은 없고. 편지로만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황보다는 조식학파가 실천을 강조했는데 이는 후학이 곽재우 정인홍 등 임진왜란때 의병장 출신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서인은 기호학파라고도 하는데 경기충청지방에 그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동인보다 실제 현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는 (이이의 십만 양병설, 통치체제이 정비와 수취체제의 개혁 등으로 나타난다.) 이후 이이의 이통기국론과 관련해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논쟁(호락논쟁)까지 이어진다. 또한 여기 있는 붕당이 전부가 아니고 이것저것 대북소북 청남탁남 등등 굉장히 많다. -_-;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념적 정치적 견해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충 거의 다 그런식 나중에 좀더 따로 정치적 분화 과정과 이념적 차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써봐야겠다.)

 

시기로는 이황과 조식학파가 먼저 형성되고 이후 이이학파와 성혼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과 이이의 비교

 

성리학은 주돈이로부터 시작해 주희에 의해 집대성 된 이기심성론 중심의 학문체계이다. 이와 기를 가지고 우주를 설명했다. 조선 성리학이 중국 성리학과 차이가 나는 것은 인간본성과 직접 관련되는 4단(인의예지) 7정(희노애락애악욕)과 같은 심성의 문제에 대한 탐구이다. 이황, 기대승, 김인후, 이항, 노수신, 이이, 성혼등이 이 사단칠정 논쟁을 함으로써 심학이 비약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이는 16세기 철학논쟁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이황과 이이를 들 수 있다. 이 차이의 배경을 영남과 기호지방의 경제적 조건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영남은 자급자족적 지주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덕적 명분론이 필요했고, 기호지방은 외부세계와 접촉이 빈번하므로 가시적인 세계와 실리적 학풍에 민감했던 것이다.

(1)이황

이황은 이언적의 철학을 발전시켜 주리론을 수립했다. 이는 우주만물의 본질은 순수하고 착한 형이상의 이로 모든 만물은 그 점에서 착하고 평등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가 형이하로 발현되는 것이 기로, 기의 세계는 천차만별의 불평등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이는 원칙과 규범과 명분을 존중하는 학문으로 발전해갔다.  즉 만물생성의 원리인 이와 변화원인인 기가 상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해 이와 기를 병존적 존재로 파악했는데(이기이원) 이를 주리론이라고 한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했다. 성학십도는 군주 가 스스로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하고 있다.

 

(2)이이

이이는 이황보다 한세대 늦은 학자이다. 따라서 기존 성리학 주장을 보완해 설명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형이하의 기에 따라 착해지고, 악해지고, 따라서 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주장했다. 이이는 우주의 근본은 이일 뿐이며 원인인 능동적 기가 작용하면 부동의 기는 거기에 항상 내재되어 있다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주기론으로 규정되기도 하며 실천적 행동철학이 된다. 이이는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이 있는데 이는 율곡집에서 묶어서 정리되어 있다. 성학집요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성론

최초의 사단칠정 논쟁은 이황과 기대승이 시작했다. 이 사칠이기문답은 7년에 걸친 논쟁이었으나 상호 양보해 이황의 이기호발설 내지 이발기수설로 귀착되었는데 이황의 초기 입장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승과 논쟁 끝에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거기에 편승하는 것이다로 변하게 된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 모두 정이므로 기발로 봐야 되도 이와 기는 나눌 수 없으므로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른다는 이황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율곡 이이가 보충 설명을 했는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뒤 측은한 마음을 발하므로 그 마음은 기이며 기발이라는 것이며, 측은한 마음의 근본은 인인데 이것은 심이 미발한 상태인 성이고 성은 이이므로 이가 여기에 타는 이승이다 라고 설명했다. 즉 사람의 원래 마음에 이가 있으나 기가 발해야 이가 올라탄다는 말로 기발이승일도설을 제기하여 이기일원론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황이 주자성리학의 이해와 철저한 계승인 반면 이이에 이르러서는 문제점을 보완하여 이론적 심화하며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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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한문사료2013. 4. 10.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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宰相之職 臣於治典論之矣 然爲宰相者得其君 然後道行於上 而惠及於下 身榮於前 而名顯於後 而君臣之相遇 自古以爲難也(중략……)噫 臣之遇君誠難 而君之遇臣亦難矣 方今明良相遇 誠意交孚 相與共圖 維新之政 千百年之一盛際也 於是作宰相年表 獨書侍中者 亦以見冢宰之兼衆職 而人主之職 在擇一相 百執事以下不與也

-삼봉집-

 

해석: 재상의 직은 신이 치전에서 논했습니다. 그러나 재상이 되는것은  그 군주를 얻고, 도가 그 위에 행해지고 은혜가 아래에 미쳐 앞에 모엔 영화가 있으며 뒤에는 현명한 이름이 남을 것입니다. 따라서 군신의 만남은 옛부터 어렵게 여겨졌습니다. (중략) 아. 신하와 군주의 만남히 지극히 어렵고 군주와 신하가 만나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지금 진심으로 서로 만나 마음을 다해 교류하니 서로 함께 공도를하고 유신지정을 하니 천년에 한번 있을까 합니다. 재상연표를 만드는데 홀로 시중을 적는것은, 또한 총재는 여러 직을 겸임하고, 인주(임금)의 직은 하나(재상)를 선택하는데 있으니 모든 일을 아래와 더불지 않는 것입니다.

 

(사료는 임용고사 역사 2005년 기출. 고전종합DB에있는 삼봉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저 문항을 찾을 수가 없었다. -_-... 어디 나와있는 걸까.삼봉집 9권 경제문감 재상의직에 있을것 같았는데 아니다. 어디 있는 것일까. 해석도 나같은 초보가 하기엔 어렵다.) 

 

위 사료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인정사상을 먼저 논한 후에 좋은 군주와 신하가 만나기는 어려운 것을 논하고. 어떤 방식으로 골라야 하는지 논했다. 왕은 재상을 임명하되 다른 정사에는 간여하지 않는 것을 주장했는데(폼떨어진다.. 그런 이유? ㅋㅋ). 이는 재상정치, 의정부 서사제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료의 답으로 의정부 서사제를 논하는 것은 엄밀히 틀린 것. 의정부는 방원이 제2차 왕자의 난(1400)을 평정하고 세자로 책봉된 직후에 사병을 혁파하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세운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즉 태조때는 도평의사사에서 재상정치를 행했던 것. (교과서에는 이태조 때의 정치가 태조와 정도전 조준 등 소수의 재상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덧붙이면 정도전의 재상정치는 왕권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는 공권적인 측면이다. 왕은 왕으로 군림하지만 사관의 감시를 받으며 공적인 권력만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해제: 간단하게 정도전이 쓴 글을 모두 모아서 엮어낸 책이라고 보면 된다. 삼봉집은 조선 건국 이념연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사료이기도 하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아들에 의해서 2권으로 간행된 일이 있다. 그 뒤 1465년(세조 11) 그의 증손에 의해서 6책으로 중간되고, 다시 1486년(성종 17) 8책으로 증보되었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삼봉집≫은 1791년(정조 15)에 왕명으로 다시 간행한 책으로서, 구본(舊本)에 누락된 진법(陣法)과 시문을 수록했으며, 정도전의 사실(事實)에 대한 기록을 보완하고 편차를 다시 분류해 14권 7책으로 만든 것

삼봉집에는 그가 쓴 여러가지 잡다한 글부터 조선경국전, 고려국사, 경제문감, 학자지남도, 팔진36변도보 등 사상적,정치적,군사적 이념들이 담겨있다.

이를 통해 조선의 건국이념의 실현라고도 볼 수 있는 유교적 왕정과 중앙집권 관료체제의 과정에 대해서 생각 해 볼 수 있다.

 

신유학의 수용: 고려후기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면서 그것의 정치적 이념도 같이 수용되었다. 신유학은 이상적인 백성의 삶을 개선하여 보장하는 것은 왕정의 임무로 규정했으며, 그것을 인정이라고 했다. 즉 민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왕의 임무라는 것이다. (성리학의 형이상학적인 이념이 드러나는 대목) 이런 취지에서 민본사상-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이념-이 등장했다.

고려말 시대적 배경: 14세기부터 기존의 권력기반과는 다른 사대부-관료, 지식인-층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혁신적이고 현실비판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공민왕때 본격적인 개혁정치가 실시되었을때 이들 사대부층도 많은 부분에 간여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비록 실패했으나 이때부터 사대부층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등을 격퇴하며 성장한 신흥 무인세력(최영,이성계)등과 함께 짝을 맞추면서 개혁을 진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권력싸움에서 승리하고 이를 보좌한 정도전과 조준, 남은등(급진파, 역성혁명파 사대부)이 측근 52명을 규합해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게 된다.

정도전의 건국이념: 정도전은 1394년 조선경국전에서 국정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는데 새 왕조는 유교의 성현의 정치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주역의 인정론에 근거해 새 왕조의 왕위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천지의 덕을 본받아 인정을 행해 천하 사방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성인의 정치를 행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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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문사료2013. 4. 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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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其大對盧, 則以彊弱相陵, 奪而自爲之, 不由王之署置也.

 -주서, 이역열전, 고구려

 

其國建官有九等, 其一曰吐捽.比一品, 舊名大對慮, 惣知國事, 三年一[伐=>代]、若稱軄者不拘年限、交替之日. 或不相服, 皆勒兵相攻,勝者爲之. 其王但閇宮自守,不能制御. 次曰太大兄、比二品,一名莫何何羅支. 次折, 比從二品, 華言主薄. 次大夫使者,比正三品, 亦名謂謁奢. 次皂衣頭大兄, 比從三品:一名中裏皂衣頭大兄 .....以前五官, 掌機密謀[改=>政]事.徵發兵,選授官爵

 

-한원, 번이전, 고구려중 

 

해석: 1.그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으로 서로를 넘었으며 빼앗아 스스로 대대로가 되었다. 왕의 임명에 말미암지 않는다.

2.그국가는 관등을 구등을 지었다, 그 일은 토졸. 일품에 비한다. 옛명칭은 대대로다, 국사의 전반적인 것을 총괄한다. 삼년에 한번 임명한다. 만약 직위를 칭한자가 연한을 지키지 않으면 서로 바꾼다.  만약 불상복시 서로 병사를 일으켜 이긴자가 그것이 된다.(의역죄송 -_-;머리가 아파서.;) 대대로는 단지 궁문을 스스로 닫을 수 있으나 왕을 제압하진 못한다. 다음은 태대형이며 이품에 비한다. 막하하나지라고도 하고 다음 종이품에 비한다.중국말로 주부라고 한다. 다음은 대부사자이다. 정삼품에 비한다. 역시 갈?라 한다. 다음조의대대형이고 종3품에 비한다. 이명 중의조의두대형 ,.... 이 앞선 다섯관등으로 정치기밀을 장악하고 징병하고 관작을 선택해 받을 수 있다.(거칠은 해석 ㅈㅅ -_-..)  대충 핵심 내용은 대대로가 국사의 전반적인 것을 총괄하며, 삼년에 한번 선출하는데 귀족끼리 다퉈서 승리하는 자가 대대로가 되기도 한다. 왕에 버금가는 권력이지만 왕보다는 아래이다는 것이며, 그리고 다음 관등 쭈욱 나오다가 여태 설명한 5품까지 지방태수가 되서 정병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말로 생각됨.

-이를통해 대대로는 귀족들의 연합정치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권력이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 고구려는 가장먼저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했다. 그 근거로 고구려는 계루부의 고씨가 세습적으로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제로 바뀌는 등 왕권이 공고해졌음을 알 수 있다. 부여와 비슷하게 고상가, 고추가 등 대가들이 있었으며(위지에 나오는 것은 대가들인 듯. 대가들과 대가들의 관직명이 그대로 관등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각 부마다 자체적으로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2.귀족연합기의 정치 : 기존의 5부의 족장들은 귀족으로 전화하여 고위관직에 임명되고 정치에 참여했다. (즉 귀족의 행정관료화가 이루어졌다.)왕족인 계루부가 제1귀족이 되었고, 소노부와 절노부의 대가들이 고추가의 존칭을 받고 귀족신분의 중심을 이루는 등 왕과 귀족이 연합해 정치를 주도해나갔다.

3.관등조직: 고구려는 가장 먼저 관등조직을 성립시켰다. 고구려의 관등조직은 시대에 따라 변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 근거는 중국의 사서들에서 고구려의 관등체계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을 표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한통p.97 및 삼국사기 잡지 베꼇음 ㅡㅜ)

 

〈표 1〉                  고구려 관등조직표

 魏 志


周 書

隋 書

新 唐 書

翰       苑

三國史記職官志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皂衣)

선인(先人)


大對盧
太大兄
大兄 
小兄 
意俟奢
烏拙 
太大使者
大使者
小使者
褥奢
,屬
仙人
褥薩
(13등)

太大兄
大兄
小兄
對盧
意侯奢
烏拙
太大使者
大使者
小使者
褥奢
,屬
仙人
(12등)

大對盧
鬱折
太大使者
,衣頭大兄
大使者
大兄
上位使者
諸兄
小使者
小兄
仙人
古雛大加
(12등)

大對盧(吐卒)
太大兄(莫何何羅支)
鬱折(主簿)
大夫使者(謁奢)
,衣頭大兄(中裏,衣頭大兄)
大使者(大奢)
大兄(,支)
拔位使者(儒奢)
上位使者(契達奢使者, 乙奢)
小兄(失之)
諸兄(,屬, 伊紹, 河紹還)
過節
不節
先人(先元, 庶人)
(14등)


主簿:(一吉飡) 
大相:(沙飡) 
位頭大兄:(級飡) 
從大相:(級飡)    
小相:(奈麻)    

狄相:(奈麻)    

小兄:(大舍)    

諸兄:(舍知)      
先人:(吉次)    

自位:(烏知) 

각 사서의 시기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갈수록 후대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고구려 관등체계와 변화, 그리고 변화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초기국가 시절 <위지>동이전에 기록된 대로 상가 등 10개 관등이 마련되었다가 점점 주서의 13관등 수서의 12관등, 당서의 12, 한원의 14관등으로 점차 정비되어 갔다. 이러한 관등은 고대국가에 들어와 대가 세력을 왕권 아래 통합 분화정비 시킨 것이다.

(1)형과 사자의 차이: 고구려 관등에서 특징적인 것은 兄 계열과 使者 계열로 관등이 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형'은 연장자 내지는 가부장적 족장의 뜻을 가진 것으로 종래의 족장세력이 집권적인 왕권 아래 통합 편제되어 있는 것이고 사자는 원래 조부를 걷어들이는 사람의 뜻을 가지는 것으로 행정적인 관리출신이다. 고구려의 관등은 이 두 계열이 하나의 관등체계 안에 편성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시대가 변할떄마다 형과 사자계열 관등이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는 고구려의 정치권력의 변동하고 관련이 있다. 즉 수서가 기록하고 있는 6세기 무렵엔 사자계 계열이 관등이 높은 것으로 보아 왕권이 강력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2)귀족연합적 성격: 형과 사자계 계열이 번갈아가면서 관등이 조직되었어도 1품관등은 대대로이다. 이는 대대로가 수상으로서 국사를 총괄했고, 귀족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맨위 사료 참조). 이것은 귀족의 합좌제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고구려는 제가회의)이고 당시 정치가 귀족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 제5관등인 조의두대형 이상만 국가 기밀사무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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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문사료2013. 4. 4.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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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 伊湌 龍春 一云 龍樹 之子也. 唐書 以爲 眞德 之弟誤也. 母 天明夫人 眞平王女 妃 文明夫人 舒玄角湌女也. 王儀表英偉 幼有濟丗志事 眞德位歷伊湌  唐帝授以特進 及 眞德薨羣臣請 閼川 伊湌攝政 閼川 固讓曰 臣老矣無德行可稱 今之德望崇重莫若春秋 公實可謂濟世英傑矣 遂奉爲王 春秋 三讓不得已而就位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권 태종무열왕전

 

해석: 태종무열왕이 왕이에 올랐으니 이름은 춘추이다.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 당서 진덕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오역이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이고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각찬 서현의 딸이다. 왕의 의표는 영위하였으며 어릴때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 진덕을 섬겨 이찬을 역임했고 당나라 황제가 특진을 제수했다. 진덕여왕이 죽은뒤 여러 신하들이 알천이찬이 섭정할것을 청했다. 알천은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늙고 이렇다 칭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의 덕행이 높은건 춘추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만한 인물이라 할수 있습니다. 마친내 춘추가 왕에 봉해지고 세번 사양끝에 왕위에 올랐다.

신라사회는 골품제를 기초로 한 폐쇄적 신분사회였다. 폐쇄적 신분사회일수록 특권층을 적게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는 6세기 이후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골족이 성골과 진골로 나뉜것으로 알수 있다.(6세기 현 왕가가 다른 왕족과 차별하기 위해 성골을 만든것으로 파악됨)결국 7세기에 이르러 성골남자가 소멸하게 되어 선덕,진덕왕이 즉위하기에 이른다.[각주:1] 이후 즉위한 무열왕 이후 그의 직계 자손이 왕위에 올라 왕권의 전제화를 진행하게 된다.[각주:2]  따라서 김씨 왕족은 왕권 옹호 세력으로 변질되고 박씨 세력과 가야 및 고구려계 귀족은 점차 정권에서 소외되고 진골 귀족에게 억눌려있던 6두품 계층이 대두된다.[각주:3]

 

  1. 한길 골품제 [본문으로]
  2. 한통p123 [본문으로]
  3. 7차 국사 p6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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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문사료2013. 4. 3.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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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夏之制, 不可不遵. 然四方習俗, 各隨土性, 似難盡變. 其禮樂詩書之敎, 君臣·父子之道, 宜法中華, 以革卑陋, 其餘車馬·衣服制度, 可因土風, 使奢儉得中, 不必苟同.

최승로열전 . 시무 28조중 11번째 내용

 

 

해석: 화하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수가 없으나, 사방의 습속은 각각의 토성을 따르므로 완전히 변화시킬수 없습니다. 군신부자의 도는 중화의 법을 따라서 비루함을 고치고, 그 나머지 차마의복제도는 토풍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사치와 검소가 중용을 얻게해 반드시 굳이 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즉 중국의 제도를 따르되 습속까지 따를 필요는 없음을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시대적 배경: 광종의 정치개혁은 완결로 끝나지 않았으며 이후 경종대에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다.(976년 경종이 광종대 참소를 입은 자손들의 복수를 허락). 이후 신구세력이 어느정도 균형을 맞는 정국 가운데 성종이 즉위했는데(981) 이 시기에 최승로, 김심언 등 신라 6두품 출신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지배체제 정비에 일조한다. 성종은 즉위년에 교서를 내려 신하들에게 봉사를 올리도록 했는데 이에 대해 최승로가 국가 시책으로 왕에게 시무 28조를 지어 올린 것이다. 시무 28조는 현재 22조만 전해진다. 이외에도 최승로는 오조치적평이라는 글을 올려 이전왕들의 치적에 대해서 평가하기도 했다.

 

-성종대의 지배체제 정비

 

1.통치기구를 재편(중앙기구 및 지방제도)

성종 2년(983)에 3성6부가 설치가 되었다. 12목 설치 처음으로 중앙에서 외관 파견하여 호족들이 향리의 지위로 격하.

1)중앙기구- 성종대에 일련의 정치제도가 완비되기는 하지만 지금 배우는 것처럼 완전한 것은 아니며, 보통의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은 문종대에 이르러서 완비된 내용을 다루는 것이다.

중앙기구는 당송의 제도를 상당부분 수용해 2성6부체제를 갖추었다. 먼저 중서문하성이 원년과 2년에 걸쳐 성립되었으며, 뒤이어 상서성과 중추원, 대간제도, 문산계 등이 성종 당대에 제정되었다.

식목도감은 성종말정도 시작되어 현종대에 그 제기능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며, 도병마사는 현종대에 설치되었으며, 중추원은 목종대 설치되었다.

①중서문하성 : 고려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과 문하시중이 있고 2품 이상의 재신과 낭사(언관)가 소속되어 있다.

②중추원(후대의 추밀원) : 종2품과 정3품 추밀은 재신가는 다음 지위로 재신과 함꼐 국정을 논했다. 정3품 승선은 국왕의 비서 기능을 함. 승선은 정3품이나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짐.

③상서도성 : 상서6부를 통할하는 역할 상서성은 형식상 2품이상의 재상 관부이나 실제 지위는 추밀에도 못미쳤던 것으로 파악

④도병마사: 대외적인 국방 군사제도에 관한 일을 논의

⑤식목도감: 법제에 관련된 일을 다룸

⑥삼사 : 재정과 녹봉을 담당

⑦어사대: 백관의 규찰과 탄핵을 담당

 

고려시대 중앙정치제도의 특징

-성,시,서 등 관서 명칭이 관서의 고하와 맞지 않았다. 원래 관서의 고하는 그 관서의 최고짬(-_-;)의 따라 결정되는 것이나 실제 권력의 유무의 따라 정해진것으로 보임.(ex 상서성은 2품 이상의 재상 관부이나 추밀에도 못미치는 지위로 판단) 이것으로 보아 통치조직의 체계성은 다소 미흡한 것으로 여겨지는 점.

-문산계와 무산계를 받아들였지만 제수의 대상이 다르고 관직 임명의 기준도 아니었다. 고려는 관계가 그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직이 그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특권의 수혜자를 최소화 하려는 의도로 파악 가능하다.

2)지방제도

-12주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직개혁을 단행해 지방호족을 중앙관료로 흡수하려는 시도를 했다. 

성종2(983년)에 12주목에 외관을 파견했다. 이후 성종14(995년)에 12주목이 12군 절도사로 변경되어 59곳에 도단련사등의 외관이 설치되는 등 외관이 정비되었다. 이후 1005년, 1012년에 외관 명칭과 인원 조정이 있은뒤 1018년(현종9, 거란의 3차 침입이 있었찌용) 4도호부,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이 설치되어 지방제도 개편이 일단락되었따.

고려 지방제도의 특징은 주현보다 속현이 많았다는 것. 이는 려말선초 호족의 통합(?)과정으로 고려가 성립되었던 특징 때문에 건국초기에는 일정기간 지방의 호족의 세력 정도에 따라 계서적 입장을 취했다. 또한 국경 지역인 양계에 일찍부터 병마사가 설치되고 외관이 많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국경 방어의 중요도 때문에 그렇다. 외관의 유무가 지방의 계서를 결정하기도 했다.

또한 군에는 외관이 없는데 현에는 외관이 있는등 행정적 체계성이 떨어졌는데 이는 호족의 대소와 당시 지배 관계를 설명해주는 근거가 된다. 즉 주요 거점에만 외관을 보내고 나머지 지역은 토착 세력에게 맡기는 제도를 실시했다.

2.교육제도 정비 - 국자감 정비 및 지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 파견, 과거제도 정비

지방호족의 자제를 교육시켜 중앙관료로 파견하기 위한 취지에서 교육제도가 정비되었다.  성종 11년(992)에 개경에 국자감을, 도서관으로 비서성을 세우고 서경에도 수서원이라는 도서권을 설치했으며, 문신월과법이라는 관리에게 시와 부를 지어 바치게 했다.

지방교육은 성종6년(987)지방의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했다.

3.유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의 교육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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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문사료2013. 4. 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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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啓言 帽子廛市民 康德一等原情 以爲渠廛行貨之物貨卽各色香三升氈軸帽子針子等諸種而針子一種近爲床廛人所盜賣

蓋床廛人符同本署書員 偸竊市案 刀擦床廛物貨中貫子之貫字冒錄渠廛物貨中針子之針字事竟發覺…

床廛人反生利之計屢訴本署而有反案之題則稱以亂廛無慮四五百人持木椎喊突入無論老少見輒亂打…

 - 일성록, 정조12년(1788) 9월 4일 임술

以爲: ~라 만들다 , ~라 생각하다.

原情: 사연을 하소연함

竊:훔칠 절 刀擦: 잘못된 것 따위를 칼로 긁어 냄

 

 

-해석 우계가 말하길: 모자전 시민 강덕일등이 원정하길, 거모전에서 바로 각색향, 삼승, 모전, 모자, 침자 등의 종류를 팔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자중의 한종을 요근래 상전인이 훔쳐팔은바,  상전인이 평시서와 짜고 덮었으며, 시안을 훔쳐다 상전인의 물건중에 관자의 관자를 파내고 저희 물품중의 침자를 모록했고, 일이 알려졌습니다.

상전인은 도리어 이익을 도거리할 계책을 내어 본서에 누차 호소하고 번안하는 제사가 있자 바로 난전이라고 칭하고 무려 4,5백명이 나무몽둥이를 들고 고함을 지르며 안으로 돌진해와 늙고 어림을 막론하고 마구잡이로 때렸습니다.

 

-일성록은 왕의 입장에서 일기를 기록한 것으로 사적인 문서같지만 국가의 공적 기록물이다. 정조대 문화진흥정책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판본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을..껄?, 영조때부터 고종때까지의 기록이 담겨져 있다.

-윗글은 일성록에 나와있는 한 소송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성록은 아직 인터넷사이트에서 원문을 볼 수는 없고 국역으로만 한국고전종합DB에서 서비스중이다. 뭘 얘기하는지 알겠지만 해석하기는 어렵구나. ㅜㅜ.

 

-이 이야기는 정조가 신하들로부터 소송이 올라온 것에 대해서 보고 판결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상업구조의 흐름부터, 육의전 및 시전체제와 이에 맞서 수공업과 상업의 발전으로 나타난 여러 종류의 난전들, 다시 금난전권으로 난전을 금지하고, 시전상인들이 금난전권을 남용하여 사상들및 국가가 시전상인을 통제하는데 애를 먹자 결국 신해통공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흐름과 함께 난전의 종류, 신해통공의 특징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조선은 초기부터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육의전과 시전 상인에게 그 보상으로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이 규정을 어기고 마음대로 상행위를 하면 난전이라 하여 금지시켰다.[각주:1] 즉 직역의 대가로 특권을 가진 상인이 아니면 모두 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생겨난 난전의 종류를 굳이 구별하자면

1.서울의 교통의 요지인 남대문 밖 칠패, 이현등의 새로운 시장들.

2.사상도고가 연 서울 외곽의 송파, 동작직,노원점,송우점 등. 삼남 동북지방에서 올라운 상품을 매점하여 서울 성안의 난전 상인에게 넘기는 행위

3.지방의 사상(송상만상등)

4.군병 및 각 영문의 비특권적 수공업자와 권세가와 그들의 가노, 관아의 저리등이 연 난전층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봉건 특권층과 결탁해 난전을 열고 시전상인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행위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시전상인들의 상소로 금난전권이 부여되었다. 그런데 금난전권은 소상품 생산자와 소상인층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로막았으며, 이로 인해 나타나는 물가고로 도시 빈민층의 피해가 컸다. 이러한 유통 질서 문란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롭게 상품을 매매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1791년(정조 15년)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주창에 의해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을 폐지하고,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는데, 이를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 한다. 이에 사상인층에 의해 주도된 조선 후기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각주:2]

시전상인들도 그들은 국가에 대한 직역의 부담이 있는 가운데서 난전이 마구 성행하자 아예 그들과 경쟁하더라도 직역에 대한 부담을 떨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난전은 조선 후기에 성장한 비특권적인 수공업자와 상인에 의해 봉건적인 상업 구조가 허물어지던 도시 상업 발전의 반영이었다. 통공발매 정책은 기존의 봉건적 제도로는 이러한 상업발전을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준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성과도 거두었는데 시전상인에 의해 일어나던 인플레이션의 저지와 도시빈민층, 영세상인, 소생산자가 보호받을 수 있었으며 상업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다른 난전에 대한 사료

諸廛旣有分役, 且是都民恒業之所係. 故各廛物種之非廛人而私自買賣者 許令廛人捉納法司 謂之亂廛. 正宗辛亥 蔡濟恭啓曰, 近來遊手之輩自作廛號 人生日用物種 無不都庫. 凡物之貴五倍於昔. 請零瑣新設之廛號 一並革罷, 六矣廛外勿許亂廛.

甲寅 左議政金履素建白 以內魚物廛靑布廛降付六矣之外 以布廛陞付矣. 當宁辛酉 沈煥之捧甘平巿 以內魚物廛復陞六矣 亂廛復舊 與外魚物廛合爲一矣. 布廛則與苧布廛合爲一矣. 以備六矣之數.

『萬機要覽』, 財用編5, 各廛, 亂廛

輩: 무리배 零瑣: 자질구레하다 . 영쇄 捧甘 : 봉감하다. 상부서에서 하부에 문서를 내리다.

 

해석:모든 시전에는 각기 나눠진 역이 있으며, 옛부터 도민은  항상그 업이 전해져 왔다. 그러므로 각 시전물건종류를 비시전인이 사사로이 방매하는것은 시전상인이 법사에 잡아들일 수 있게 했으며 이것을 난전이라고 한다. 정종신해년에 채제공이 일러말하길 근래 떠돌아니는 무리들이 스스로 점포를 열어 생활용품을 도고하지 아님이 없습니다. 물건이 다섯배나 귀해졌습니다. 청컨대 자질구레하게 새로 만드는 점포는 모두 혁파하고 육의전 외 난전을 허하지 마옵소서(이게 육의전 외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인지? 아니면 육의전 외 모든 시전을 없애버린것인지. 그래서 형식적으로 육의전만 금난전권이 있는 정식 시전이고 나머지 시전이 없어진 것인지. 즉 육의전만 금난전권이 남고 나머지는 시전이 아니기 때문에 금난전권이 없어지는 신해통공이 되는건지 판단이 안되네.)

정조18년 좌의정김이소가 건의하여  어물전청포전은 육의전 외으로 내리고, 포전은 올려붙였다. 순조1년 심환지가 평시서봉감해 어물전을 다시 육의전으로 올리고 난전을 다시 복구해 외어물전과 합해 1주비를 만들었다. 포전은 바로저포전과 합해 1주비를 만들었다 이로서 육의전의 수가 되었다.

 

이 사료는 서영보(徐榮輔, 1759~1816)·심상규(沈象奎, 1766~1838) 등이 왕명에 의해 저술한 『만기요람(萬機要覽)』재용편(財用編)에 기록된 난전(亂廛)에 관한 내용이다. 난전은 조선 후기 전안에 등록되지 않거나, 허가된 상품 이외의 것을 몰래 파는 가게를 말한다. 난전은 조선 후기 상업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비시전계(非市廛系) 사상인(私商人)이 상업 활동을 하여 봉건적 상업 구조를 어지럽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 금난전권의 주체(?)인 시전특권상인층은 노론벌열과 결탁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탕평을 위해서는 이들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남인소론들은 소상인과 수공업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본문으로]
  2.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던 논의는 이전부터 1764년(영조 40)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금난전권을 제한하려는 통공발매의 이론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통공발매론은 1787년(정조 11)에 일부 시행된바, 이를 정미통공(丁未通共)이라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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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한문사료2013. 4. 1.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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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문왕2년 六月立 囯學 置卿一人

 

 

2.四年春 始定 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 若 禮記 若 文選 而能通其義兼明 論語 孝經 者爲上讀 曲禮 論語 孝經 者爲中讀 曲禮 孝經 者爲下 若愽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超擢用之

 

前祇 [校勘 001] 以弓箭選人至是攺之

 

해석

1.신문왕 2년 6월(682년 6월을 뜻함) 국학을 세우고 경 한명을 두었다.  

置: 둘치. 두다 라는 의미로 쓰임.

 

2.원성왕4년봄(788년을 뜻함) 독서삼품과를 처음으로 정해 이로써 관직을 주었다.(의역 -_-;) 춘추좌씨전 혹은 예기 중 문장을 선택해 그 의미에 통달하며 논어 효경 에 밝은 자는 상독, 곡례 논어 효경인자는 중독으로 삼고,  곡례 효경을 읽은자는 하독으로 삼았다 만약 오경과 삼사 제자백가 전부에 통달한 자면 초탁하여 등용했다.

若: 만약 약. 혹은 이라는 의미로도 쓰임. 超擢 : 초탁. 지위를 초월해 발탁하다.

 

내용은 그렇다 치고 국학과 독서삼품과의 설치에 대해 논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두가지 정책은 삼국 통일 이후 꾸준히 진행되 온 왕권강화 정책의 일환중의 하나로 통치조직의 정비와 더불어 유교적 정치 사상 도입 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유교정치사상은 진흥왕순수비와 같이 통일 이전의 소박한 이해단계를 거쳐 중대사회에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는데, 이는 왕의 명칭이 이전의 불교식에서 통일 이후의 유교식으로 변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682년(신문왕2) 국가교육기관인 국학 설립, 711년(성덕왕10) 왕이 유교적 교훈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백관잠[각주:1]을 지어 신하들에게 보였고 이후 716년(성덕왕 16)에는 국학에 공자와 10철, 공자의 72제자의 화상을 당에서 가져와 안치하여 유교교육기관임을 확실히 했다. 8세기 중엽 경덕왕때는 국학을 태학감으로 바꾸고 박사와 조교를 두고, 교육과목을 논어와 효경, 5경과 문선을 선택과목으로 하는 삼과체제를 실시하는 등 유교교육이 전문화 되가는 과정을 거친다. 788년(원성왕4) 국학의 졸업시험이면서 관리등용시험인 독서삼품과를 마련해 유교정치 이념의 확립을 도모했다.(신특 p37),(다시찾는 우리역사 p.159)

하지만 골품제의 폐해로 진골이 주요 관직을 독점했으며 신분에 따라 승진에 차등이 있는 등 능력보다 혈통이 중요시 되는 사회적 모순때문에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이어 선덕왕(780~785)부터 시작되는 하대사회가 오게된다.   

신문왕의 국학 설치는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들을 숙청하고 왕권의 전제화를 위해 정치세력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실시된 것이다.

※신문왕대 왕권 전제화 정책

㉠중앙 정치 기구와 군사 조직을 정비

㉡9주 5소경 체제를 완비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

㉣녹읍을 폐지.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해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국학을 설립했다.

이에 대한 결과로 김씨 왕족은 왕권 옹호 세력으로 변질되고, 박씨 세력 및 가야 고구려계 귀족 정권소외,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해 상대적으로 부각하게 된다.  

 

 

  1.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열전에 왕이 백관의 잠계(箴戒)를 지어 나누어주었다고 나오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아마도 왕이 백관이 지켜야할 도리. 등을 지시하는 등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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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