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氣元不相離 似是一物 而其所以異者 理無形也氣有形也 理無爲也氣有爲也 無形無爲 而爲有形有爲之主者理也有形有爲 而爲無形無爲之器者氣也……氣之偏則理亦偏 而所偏非理也氣也 氣之全則理亦全 而所全非理也氣也
해석: 이기는 본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흡사 하나의 물체라 할만하나 그것은 다른것으로써 있는바 이는 형제가 없으며 기는 형체가 있다. 이는이룸이 없으며 기는 이룸이 있다. 형체가 없으면서 하는 것도 없고 형체가 있고 하는것의 주인이 이이며, 형체가 있는 것이면 이룸이 있다. 형체가 없고 이룸이 없는 사물은 기이다. 기가 쏠리면 이도 쏠리나 솔리는바는 이가 아니고 기다. 기가 온전하면 역시 이도 온존하나, 이가 온존하지 않은 바는 기이다.
정확히 이 글의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아마도 이이의 이통기국론에 대해서 설명한 것인듯. 율곡전서를 막 찾다보면 나오겠지?
이기는 본디 떨어져 있지 않으니 이기일원론의 입장 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기가 함께 오지만 그 성질이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는데, 기가 온전하면 이가 온전하고 이가 온전하면 기가 아니니. 기가 온전한 상태에서 이가 온전하게 보전됨을 알 수 있으므로 이와 기가 한 물체이지만 기가 온전한 상태에서 이가 온전하게 존재하는 기발이승일도설임을 알 수 있다. (아 사상사는 왜이렇게 어려운걸까. 제대로 이해하는 건지 헷갈리네)
건국 초의 성리학자들 중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인물들은 문물 제도 정비와 부국 강병을 위한 이념으로서 성리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당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후 사림의 본격적인 정계 진출과 맞물려 기존의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는 태도가 나온다. 이때 성리학을 둘러싸고 다양한 학파가 나뉘며 이에 따라 정치적인 태도도 달라진다.
그림 1 사림의 계보도
다음과 같이 고려시대 부터 사림의 계보가 이어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정몽주, 길재 등 온건파 사대부들이 조선 개창후 재야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모든 사림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김종직을 필두로 그의 제자들이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김종직은 성종대까지 산 사람이며 조의제문을 써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네번의 사화를 거치면서도 사림들은 지방의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꿋꿋하게 정계에 진출했으며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럽게 정계를 사림들이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선조대부터 학문적 기반에 따라 붕당이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그 흐름은 아래 그림에 간단하게 나와있다.
그림 2 붕당과 학파의 분화
이황과 조식은 영남학파라고도 하는데 기반이 영남지방이기 때문이다. 이황은 경북 조식은 경남, 그러나 둘이 한번도 만난적은 없고. 편지로만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황보다는 조식학파가 실천을 강조했는데 이는 후학이 곽재우 정인홍 등 임진왜란때 의병장 출신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서인은 기호학파라고도 하는데 경기충청지방에 그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동인보다 실제 현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는 (이이의 십만 양병설, 통치체제이 정비와 수취체제의 개혁 등으로 나타난다.) 이후 이이의 이통기국론과 관련해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논쟁(호락논쟁)까지 이어진다. 또한 여기 있는 붕당이 전부가 아니고 이것저것 대북소북 청남탁남 등등 굉장히 많다. -_-;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념적 정치적 견해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충 거의 다 그런식 나중에 좀더 따로 정치적 분화 과정과 이념적 차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써봐야겠다.)
시기로는 이황과 조식학파가 먼저 형성되고 이후 이이학파와 성혼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과 이이의 비교
성리학은 주돈이로부터 시작해 주희에 의해 집대성 된 이기심성론 중심의 학문체계이다. 이와 기를 가지고 우주를 설명했다. 조선 성리학이 중국 성리학과 차이가 나는 것은 인간본성과 직접 관련되는 4단(인의예지) 7정(희노애락애악욕)과 같은 심성의 문제에 대한 탐구이다. 이황, 기대승, 김인후, 이항, 노수신, 이이, 성혼등이 이 사단칠정 논쟁을 함으로써 심학이 비약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이는 16세기 철학논쟁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이황과 이이를 들 수 있다. 이 차이의 배경을 영남과 기호지방의 경제적 조건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영남은 자급자족적 지주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덕적 명분론이 필요했고, 기호지방은 외부세계와 접촉이 빈번하므로 가시적인 세계와 실리적 학풍에 민감했던 것이다.
(1)이황
이황은 이언적의 철학을 발전시켜 주리론을 수립했다. 이는 우주만물의 본질은 순수하고 착한 형이상의 이로 모든 만물은 그 점에서 착하고 평등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가 형이하로 발현되는 것이 기로, 기의 세계는 천차만별의 불평등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이는 원칙과 규범과 명분을 존중하는 학문으로 발전해갔다. 즉 만물생성의 원리인 이와 변화원인인 기가 상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해 이와 기를 병존적 존재로 파악했는데(이기이원) 이를 주리론이라고 한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했다. 성학십도는 군주 가 스스로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하고 있다.
(2)이이
이이는 이황보다 한세대 늦은 학자이다. 따라서 기존 성리학 주장을 보완해 설명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형이하의 기에 따라 착해지고, 악해지고, 따라서 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주장했다. 이이는 우주의 근본은 이일 뿐이며 원인인 능동적 기가 작용하면 부동의 기는 거기에 항상 내재되어 있다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주기론으로 규정되기도 하며 실천적 행동철학이 된다. 이이는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이 있는데 이는 율곡집에서 묶어서 정리되어 있다. 성학집요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성론
최초의 사단칠정 논쟁은 이황과 기대승이 시작했다. 이 사칠이기문답은 7년에 걸친 논쟁이었으나 상호 양보해 이황의 이기호발설 내지 이발기수설로 귀착되었는데 이황의 초기 입장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승과 논쟁 끝에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거기에 편승하는 것이다로 변하게 된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 모두 정이므로 기발로 봐야 되도 이와 기는 나눌 수 없으므로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른다는 이황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율곡 이이가 보충 설명을 했는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뒤 측은한 마음을 발하므로 그 마음은 기이며 기발이라는 것이며, 측은한 마음의 근본은 인인데 이것은 심이 미발한 상태인 성이고 성은 이이므로 이가 여기에 타는 이승이다 라고 설명했다. 즉 사람의 원래 마음에 이가 있으나 기가 발해야 이가 올라탄다는 말로 기발이승일도설을 제기하여 이기일원론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황이 주자성리학의 이해와 철저한 계승인 반면 이이에 이르러서는 문제점을 보완하여 이론적 심화하며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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