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이후 교과서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7차교육과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이들 국가의 속성에 대해서 나오지는 않는데 이번 2009개정교과서는 부여, 고구려, 마한의 목지국을 연맹왕국으로 설명하고 있다.이들 각 나라에 대한 것은 중국의 여러 삼국지, 사기, 위서, 후한서 등등에도 나와있지만 교과서는 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인용하고 있는 듯. 1
초기국가의 특징은 국왕의 출현과 국가체제의 정비, 영토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래의 군장세력이 잔존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부여의 마가구가저가나 고구려의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등의 가에서 고추가를 형성했다는 것은 군장국가 중에서도 유력한 부족의 귀족이 우대되고 일반 군장과 구별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한통) 내용이 많으니 고구려는 다음번에 한꺼번에 봐봐야겠다.
1.부여
以殷正月祭天, ……(中略)……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中略)……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2)4조금법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男女淫 (..)皆殺之.
尤憎妒 已殺, 尸之國南山上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兄死妻嫂, 與匈奴同俗.
(3)부여의 위치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4)부여의 사회
方可二千里 戶八萬 其民土著 有宮室·倉庫·牢獄.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麤大, 性彊勇謹厚, 不寇鈔. 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豬加·狗加 大使·大使者·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大者主數千家, 小者數百家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부여의 건국 설화는 여러개가 있다. 북부여에 관한 설화, 동부여에 관한 설화. 북부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흘승골성(요서)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라고 했으며 그의 아들 부루가 동쪽으로 이동해 동부여를 세웠다는 것이다.
동부여에 관한 다른 설은 북부여왕 해부루의 신하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동해 해변가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우라고 하여 아란불이 왕에게 건의하여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동부여라고 칭했으며, 그후 금와가 뒤를 이었다는 것.
이를통해 부여가 요서 지방에 건국했다 동부여로 이동했다. 동부여는 지금의 장춘시 외곽지역을 말하는듯 북부여의 건국연대가 기원전1세기로 기록된 것은 이 무렵부터 부여가 강력한 왕국으로 등장한 것을 의미한다.
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떄까지 1천년 역사와 전성기의 영토는 북으로 흑룡강 이남, 남으로 백두산에서 요하 상류, 동쪽으로 연해주, 3세기경 영토 사방 2천리 인구 8만호였다고 한다.
주변에 고구려,선비와 국경을 대고 있었다.
세습왕 아래에는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는데 저마다 행정 구역인 사출도를 다스렸다. 부여 초기에는 가들이 모인 평의회에서 주요 국사를 결정해 왕권이 약했으나 점점 왕권이 강화되었다.
부여는 귀족인 가가 있고 그 밑에 호민으로 불리는 지배층이 있으며, 민과 하호로 불리는 천민층이 있었다. 왕이 죽으면 후하게 장사지냈으며,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고 2
매년 12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국가의 단합을 도모했다. 이때 국가중대사를 토의하기도 하고, 전쟁시 우제점을 치기도 했다.이 시기의 제천행사들은 국가적인 대행사로 군장국가의 제천행사가 국가적인 행사로 바뀐것을 나타낸다.
고조선의 8조 금법과 비슷한 4조 금법이 전해진다. 이를통해 부여는 엄벌주의, 가부장적 사회 및 사유재산, 노예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위략에는 고구려에도 부여와 같이 도둑질한 자는 12배 배상을 했다 했는데, 이러한 법률은 초기국가 시대 공통된 내용으로 짐작된다.
2.고구려
本有五族, 有涓奴部‧ ……(中略)…… 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中略)……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雛加. 涓奴部本國主, 今雖不爲王, 適統代人, 得稱古雛加, 亦得立宗廟, 祠靈星‧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加古雛之號. 諸大加亦自置使者‧皁衣‧先人, 名皆達於王, 如卿大夫之家臣, 會同坐起, 不得與王家使者‧皁衣先人同列.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3.옥저
(1)옥저의 위치와 주변국, 크기
東沃沮在高句麗 蓋馬大山之東, (..중략.)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2)골장제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 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䥶,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
(3)민며느리제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4)고구려에 복속되어 공물을 바치는 옥저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中略)…… 使相主領. 又使大加, ……(中略)…… 統責其租稅. 貊布‧魚‧鹽‧ ……(中略)…… 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 ……(中略)…… 以爲婢妾, 遇之如奴僕.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옥저는 함경남도 부근에 위치해 느슨한 연맹국가를 영위하고 있었다. 변방에 위치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었으나 큰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중 옥저현후 세력이 중심세력을 형성했다고 알려졌다.(위지동이전에 보면 불내, 여화, 옥저국이 한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현이 폐지되면서 각기 제후국이 되었는데 옥저현이 중심이 됐다고 알려짐)
총 5천호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고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다. 이후 한사군 설치후 임둔군 지배하에 있다 낙랑군 밑으로 갔다가 고구려 태조왕 때 고구려에 복속되어 천리길을 걸어 공납으로 바쳤다고 전해진다.
옥저에는 어린 여자가 남편 집에 가서 살다 혼인하는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뼈를 추려서 가족무덤인 목관에 안치하는 풍습이 있었다.(골장제)
4.동예
(1)책화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中略)……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2)무천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3)전투에 능하며 단궁과 반어피, 과하마가 유명했다.
能步戰. 樂浪檀弓 出其地. 其海出班魚皮,又出果下馬, 漢 桓時獻之.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동예는 옥저와 같이 느슨한 연맹체국가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파악되며 읍락마다 장수가 읍군 삼로등이 지배했으며, 불내예후국이가장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해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명주 삼베, 단궁이라 불리는 활과 과하마라는 말, 그리고 반어피 등이 특산품이었다.
동예는 총2만호를 거느리는 비교적 큰 나라였으나 왕국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족외혼의 풍습과 각 부족의 구역이 구분되어 책화라는 부족 영역 보호책이 있었다. 동예에도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5.삼한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中略)……
(2)마한의 사회정치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中略)…… 凡五十餘國. ……(中略)……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中略)……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中略)……
(3)하호의 존재 (고구려의 하호와 비교된다)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中略)……
(4)강력한 왕권의 부재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中略)……
(5)사회풍속, 기풍제와 시월제, 소도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毛本, 木, 作本, 誤.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진수가 위략을 참고하여 삼한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했는데 삼한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삼한은 예맥족이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등의 연맹왕국과 고대왕국을 건설해 갈때 한강 이남의 한족 사회에서도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에 기초하여 정치적 통합운동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辰국, 기원전 4세기경) 진국은 한나라와 직접 교역했다고도 전해지는데 위만조선의 성립으로 기존 고조선의 유이민이 한강 이남으로 유입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해 삼한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남쪽으로 와 한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삼한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한은 약 50여 개(54개)의 소국으로 이뤄졌고 10만여 호를 거느렸고 가장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고 전해진다. 진한과 변한에 속한 소국은 이보다 적었다.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개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소국은 마한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으로 불렸던 것처럼 왕의 호칭을 가진 존재가 다스리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장수가 통치하였다고 한다.
장수의 명칭은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마한에서는 세력이 강한 이들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고 불렀다.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에서는 이러한 장수에게 관(官)과 인수(印綬)를 주기도 하였는데, 간접적 통제를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한편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등의 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데, 일제강점기 경북 지역에서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이라 새겨진 도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장수 등에 의한 소국의 통치 체계는 “국읍(國邑)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더라도 읍락(邑落)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라는 것으로 미루어 그다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는 곧 삼한의 통치 질서가 완비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 체계적인 국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삼한 사회는 ‘왕’으로 표현된 존재를 정점으로 신지‧읍차 등의 장수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피지배층은 토착 생활을 하며 농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므로 삼한은 일반적인 농업 사회의 특성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후가 따뜻하고 저수지가 많아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해 벽골제, 의림지같은 저수지는 마한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농기구도 발전해 북방이주민에 의한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후 괭이, 보습, 낫, 호미 등 철제농기구가 만들어져 생산력이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의창 다호리의 무덤이 좋은 근거이다. 한편 변한지역의 철은 품질도 좋고 수량도 많이 나와 일본으로 수출도 하고 화폐로도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삼한의 피지배층과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바로 ‘하호(下戶)’이다.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하호가 복속민과 같은 존재로 기록되어 있고, 동예조에는 일반적인 피지배민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한의 하호의 성격을 해명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한편, 삼한에서는 음력 5월에 씨를 뿌리고 10월 농사가 끝난 다음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료상에는 제사의 대상이 단지 ‘귀신’으로 되어 있지만, 이 제사 자체가 농사와 관련 있는 만큼, 이는 바로 ‘농업신’에게 올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 나서 군무를 추는데, 땅을 밟는 동작은 지신(地神)을 즐겁게 하고 땅의 생육력(生育力)을 높여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라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제사는 일종의 축제로 거행되어 구성원 간에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국읍 장수의 정치권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각 국읍에 천군(天君)이 있어 제사를 주관하고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두었다는 점은 삼한 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문제로 중요하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과 유사하므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솟대신앙) 소도를 복원해 보면 현재 서낭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도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이곳으로 도망 온 죄인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도에 죄인이 오면 잡을 수가 없었다는 말. 이는 소도가 신성한 특수 구역임을 말해 주는 동시에 삼한이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분리된 사회였음을 알려 준다. (제정분리사회)
이들은 읍락에 모여 살고, 초가로 지붕을 한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두레를 만들어 농사를 공동으로 짓는 등 공동체적 전통이 있었으며,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부장품을 넣는 풍습이 있었다. 이들의 무덤은 고인돌보다 진화된 움무덤(토광묘)와 돌덧널무덤(석곽묘)가 있었다. 무덤 뿐만 아니라 바위에도 그림을 새겨 자신들의 세계관을 담았다. 경북 고령 양전동 암각화, 언양 천전리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이들을 통해 삼한 사람들의 예술관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그렸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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