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3. 5. 2. 12:02
728x90

1.신교육운동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번져간 교육개혁운동을 뜻한다. 형식적, 권위주의적인 학교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민주적 시민사회에 맞게 생활중심, 아동중심으로 개혁하려 한 교육운동.  이를위해 다양한 개별화학습 프로그램, 문제해결법, 구안법, 등을 통해 문제해결에 대한 실천을 통해 지식과 경험을 종합적으로 획득해 현실적인 실제적 생활이나 생활활동을 자연환경 속에서 전개시키는 방법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여러 지역사회학교가 생겨났다.(써머힐, 발도르프, 프레네, 듀이의 실험학교)

 

2.닐(A.S. Neill)과 써머힐

닐은 스코틀랜드의 엄격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권위주의적 교육의 피해를 많이 보았다. 이후 청년기에는 버나드 쇼와 웰즈의 영향으로 문명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후 프로이트파 정신분석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을 중시하게 된다. 닐은 1924년 '아이들을 학교에 맞추는 대신, 아이들에게 맞는 학교'라는 설립 목표하에 실험학교(대안학교)인 서머힐을 설립했다. 서머힐은 지금도 있으며, 많은 교육학 책, 다큐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는것이 가장 큰 특징.[각주:1]

 

(1)아동관

닐은 아동이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 아동은 본래 현명하고 현실적이며, 성실하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자유를 허용하며 아이들의 자신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한다.

2 어린이의 흥미는 직접적이다.

따라서 아동은 현재의 생활에 열중하고 그 생활 자체가 분주해 훗날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사회적 의식이나 사회적 책임감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다.

3. 게으른 아이는 없다. 건강한 아이는 하루종일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4.아이들은 이기적이다.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이타적인 행동은 나중에 생긴다. 이타적인 삶을 강요하면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5.어린이들은 사랑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

 

(2)교육론

①교육목적 : 닐은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발견하는데 있으며 교육의 궁극적 목적도 행복이라고 보았다. 닐은 행복이란 내적인 건강과 균형, 생에 대한 충족감, 억압을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행복은 인간을 속박하는 권위에서 자유로울때에만 얻어지며,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주는 사랑과 인정에 비례한다고 보았다.

 

②사랑의 중시 : 닐은 사랑을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상대방의 편이 되어주는 것 이라고 말했다. 닐은 문제아를 구하는 길은 엄격한 처벌이 아닌 사랑과 이해뿐임을 강조했다.

③자유의 중시 : 닐은 자유를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동시에 자기통제라고 했따. 자기의 자유 의지를 중시하되,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줄 아는 자율적인 어린이가 된다고 보아 자유를 교육론의 기본개념으로 제시했다.

④감성 교육 : 닐은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무의식을 중시했다. 따라서 교육도 두뇌만 강조하는 지적 교육이 아닌 무의식을 중요시하는 감성교육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 하에 놀이를 중시하고 자유, 미술, 공작, 음악, 무용, 연극 등의 창작활동을 할 것을 주장했다.

 

3.슈프랑거의 교육사상

슈프랑거(1882~1963)는 독일의 철학자이며 교육학자로 정신생활의 개념을 문화와 관련시켜 문화적 교육과 문화교육철학의 기본이념을 완성시켰다.

슈프랑거는 교육이란 성숙자와 미성숙자 간의 만남을 통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각성과 같은 것으로 교육을 도야의 개념으로 파악했다. 도야는 스스로 발전하는 정신의 소질 및 생활 영역에 관련된 모든 객관적 가치가 피교육자의 체험, 심정, 창작 능력에서 활발히 성장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슈프란거는 도야의 단계를 나눠 정신발달단계에 따라 기초적, 전문적, 일반적 도야의 3단계로 분류했다.

또한 슈프랑거는 교육의 본질을 문화의 번식으로 보았다. 전대의 문화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다음 세대는 그 문화를 유지하며, 자기 것으로 내면화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으로 창조하여 또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교육의 본질적 기능은 내면적 세계 각성, 인격적 자아 각성, 문화적 책임 각성을 제시함.

 

4.슈타이너와 발도르프 학교

인지학의 창시자인 슈타이너는 1861년 크로아티아의 작은 마을에서 철도 공무원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슈타이너는 빈 공대에 입학해 수학중 괴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괴테의 자연과학적 연구방법에 정통하게 되었다. 이후 1864년 뇌수종을 앓는 아이의 가정교사를 한 그는 이 학생이 김나지움에 입학한 다음 의사가 되는데 기여했으며, 이것을 기초로 교육론을 형성했다. 이후 1919년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아스토리아 담배공장 노동자들에게 공장 노동자들의 자녀교육을 위한 강연을 한 것을 계기로 이들을 위한 학교인 자유 발도르프 학교를 개설했다.

 

슈타이너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초를 두고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본성의 표면 밑에 있는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고 보았다.(인지학적 인간관) 따라서 아동의 형상 외관, 태도로부터 아동의 본성과 본질을 알아내고 이것을 강화시켜 타고난 것을 최상의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발도르프 교육의 주요 목표이다. 그러므로 비슷한 기질의 아이를 묶어 놓는 것이 효과적.또한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방법으로 본보기와 모방의 원리, 감각을 통한 교육, 리듬을 통한 질서의 원리를 이용할 것을 제시했다.

 

슈타이너는 인간의 본질을 물리적 신체, 에테르체(생명체), 아스트랄체(감정체), 자아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본질은 7년을 주기로 순서대로 탄생한다고 했다.

또한 인간이 태어나기 전 정신세계에서 가져 온 것과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적 요소를 결합해 나타난 것을 기질로 규정하고 기질도 구분했다. (심리상담같은거 해보면 가끔 시키는거.ㅋ.ㅋ)

담즙질: 기분이 강하고 뜨겁고 격하고 행동이 실제적

다혈질: 성격이 급하고 충동적이며 감정적.

점액질:기분이 움직임이 적고 침착 평안하다.

우울질:기분이 자기 내면에 있고 감상적이다.

 

발도르프 학교는  온전히 자유로운 정신의 삶의 근거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앞서 '그 인간에게 어떤 소질이 있으며, 무엇이 그 소에서 계발될 수 있을지'물어야 하며 교사는 여혼의 예술가로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변화하고 감동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교육적 이념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교육과정의 방침이 있지만 전적으로 교사가 교육과정을 정하고 가르치는 방법을 정하도록 했으며 대부분 오전에는 사고력과 이해력을 높이는 기본교과를 오후에는 예술활동과 육체적인 힘을 사용하는 교과를 배치했다. 모든 교사는 원칙상 동등한 권리를 같고 목요일마다 교사회의를 통해 이것을 실현중이다.

구체적으로 1~8학년까지는 연속담임제를, 9~12학년을 전문분야의 교사들에 의해 가르쳐지는 두단계로 세분화 되어 있으며, 8년동안 계속해서 담임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기본교과는 3~4주간을 단위로 매일 아침 첫 두시간에 일정한 교과를 집중적으로 지도하는 에포크(epoch)수업을 실시한다. 외국어 교육은 1학년부터 실시하며 성적평가와 유급, 낙제를 폐지한다.

 

5.프레네와 프레네 학교

프랑스의 초등학교 교사이자 프레네 교육학의 창시자인 프레네는 공교육 개혁을 위해 교육방법론을 창안했다. 프레네 교육으 학습시 학생들의 동기와 자발성을 매우 중요시하며, 학생들의 자신의 삶과 경험에 기초해 스스로 학습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배운다.

능력에 따라 가르치거나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와 리듬을 중시하고, 경쟁이 아닌 협동을 중시하며 모든 학생이 낙오하지 않게 돕는다. 교사들이 나눔과 연대를 통해 모든 자료와 철학을 공유하고 발전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같은 방법론이다.

자발성에 기초한 학습을 통해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데 '자기진도조절학습'이라는 공립학교에서 저마다 자기만의 진도를 갖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프레네 교육은 공교육 안에서의 대안적인 교육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별도의 학교를 내세우기 보다는 뜻있는 교사들이 기존의 학교를 프레네 방식으로 운영한다.  예컨대 다른 교사들이 기피하는 열악한 지역의 학교로 프레네 교육을 지향하는 교사들이 집단 전근을 신청해 프레네 학교로 바꾸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도 경기 광주 남한산초, 충남 아산 거산초, 경북 상주 남부초등이 있따.

 

  1. 다큐프라임에서 소개된 적이 있는데 서머힐 학교는 종종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격대상이 되기도 한다. 15년전쯤 영국 교육부(?)와의 마찰로 폐쇄될 위기에 처했었는데 학생,교사,졸업생 등의 노력으로 판결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728x90
Posted by 런닝보이
교육학/논제2013. 5. 2. 01:17
728x90

宰相之職 臣於治典論之矣 然爲宰相者得其君 然後道行於上 而惠及於下 身榮於前 而名顯於後 而君臣之相遇 自古以爲難也(중략……)噫 臣之遇君誠難 而君之遇臣亦難矣 方今明良相遇 誠意交孚 相與共圖 維新之政 千百年之一盛際也 於是作宰相年表 獨書侍中者 亦以見冢宰之兼衆職 而人主之職 在擇一相 百執事以下不與也

-삼봉집-

 

해석: 재상의 직은 신이 치전에서 논했습니다. 그러나 재상이 되는것은  그 군주를 얻고, 도가 그 위에 행해지고 은혜가 아래에 미쳐 앞에 모엔 영화가 있으며 뒤에는 현명한 이름이 남을 것입니다. 따라서 군신의 만남은 옛부터 어렵게 여겨졌습니다. (중략) 아. 신하와 군주의 만남히 지극히 어렵고 군주와 신하가 만나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지금 진심으로 서로 만나 마음을 다해 교류하니 서로 함께 공도를하고 유신지정을 하니 천년에 한번 있을까 합니다. 재상연표를 만드는데 홀로 시중을 적는것은, 또한 총재는 여러 직을 겸임하고, 인주(임금)의 직은 하나(재상)를 선택하는데 있으니 모든 일을 아래와 더불지 않는 것입니다.

(사료는 임용고사 역사 2005년 기출. 고전종합DB에있는 삼봉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저 문항을 찾을 수가 없었다. -_-... 어디 나와있는 걸까.삼봉집 9권 경제문감 재상의직에 있을것 같았는데 아니다. 어디 있는 것일까. 해석도 나같은 초보가 하기엔 어렵다.) 

위 사료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인정사상을 먼저 논한 후에 좋은 군주와 신하가 만나기는 어려운 것을 논하고. 어떤 방식으로 골라야 하는지 논했다. 왕은 재상을 임명하되 다른 정사에는 간여하지 않는 것을 주장했는데(폼떨어진다.. 그런 이유? ㅋㅋ). 이는 재상정치, 의정부 서사제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료의 답으로 의정부 서사제를 논하는 것은 엄밀히 틀린 것. 의정부는 방원이 제2차 왕자의 난(1400)을 평정하고 세자로 책봉된 직후에 사병을 혁파하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세우고 방원이 즉위 후에 본격적으로 6조 직계제를 실시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즉 태조때는 도평의사사에서 재상정치를 행했던 것. (교과서에는 태조 때의 정치가 태조와 정도전 조준 등 소수의 재상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덧붙이면 정도전의 재상정치는 왕권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는 공권적인 측면이다. 왕은 왕으로 군림하지만 사관의 감시를 받으며 공적인 권력만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쨌든 사료에서 말하는 군주는 태조, 재상의 직책은 도평의사사의 재상인 재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개국직후 정도전의 관등 및 관직 은 보국숭록대부 문하시랑찬성사 겸 의흥삼군부사 동판도평의사사사 ............. 쭈욱 많은데 이런걸 답으로 요구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유신지정이란 재상에게 실권을 부여해 왕도를 실현하는 재상 중심의 정치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인 국정을 재상이 총괄하며, 군주상징적인 존재로 남는 정체를 의미한다.

 

해제: 간단하게 정도전이 쓴 글을 모두 모아서 엮어낸 책이라고 보면 된다. 삼봉집은 조선 건국 이념연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사료이기도 하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아들에 의해서 2권으로 간행된 일이 있다. 그 뒤 1465년(세조 11) 그의 증손에 의해서 6책으로 중간되고, 다시 1486년(성종 17) 8책으로 증보되었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삼봉집≫은 1791년(정조 15)에 왕명으로 다시 간행한 책으로서, 구본(舊本)에 누락된 진법(陣法)과 시문을 수록했으며, 정도전의 사실(事實)에 대한 기록을 보완하고 편차를 다시 분류해 14권 7책으로 만든 것

삼봉집에는 그가 쓴 여러가지 잡다한 글부터 조선경국전, 고려국사, 경제문감, 학자지남도, 팔진36변도보 등 사상적,정치적,군사적 이념들이 담겨있다.

이를 통해 조선의 건국이념의 실현라고도 볼 수 있는 유교적 왕정과 중앙집권 관료체제의 과정에 대해서 생각 해 볼 수 있다.

 

신유학의 수용: 고려후기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면서 그것의 정치적 이념도 같이 수용되었다. 신유학은 이상적인 백성의 삶을 개선하여 보장하는 것은 왕정의 임무로 규정했으며, 그것을 인정이라고 했다. 즉 민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왕의 임무라는 것이다. (성리학의 형이상학적인 이념이 드러나는 대목) 이런 취지에서 민본사상-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이념-이 등장했다.

고려말 시대적 배경: 14세기부터 기존의 권력기반과는 다른 사대부-관료, 지식인-층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혁신적이고 현실비판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공민왕때 본격적인 개혁정치가 실시되었을때 이들 사대부층도 많은 부분에 간여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비록 실패했으나 이때부터 사대부층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등을 격퇴하며 성장한 신흥 무인세력(최영,이성계)등과 함께 짝을 맞추면서 개혁을 진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권력싸움에서 승리하고 이를 보좌한 정도전과 조준, 남은등(급진파, 역성혁명파 사대부)이 측근 52명을 규합해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게 된다.

정도전의 건국이념: 정도전은 1394년 조선경국전에서 국정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는데 새 왕조는 유교의 성현의 정치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주역의 인정론에 근거해 새 왕조의 왕위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천지의 덕을 본받아 인정을 행해 천하 사방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성인의 정치를 행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 조선의 중앙관제의 정비에 대해서는 담번에 싹 정리해봐야겠다.

 

728x90

'교육학 > 논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능론과 교육  (0) 2013.05.08
전통유가사상과 교육제도의 발달  (0) 2013.05.06
몬테소리  (0) 2013.05.01
프뢰벨  (0) 2013.05.01
페스탈로치  (0) 2013.04.29
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5. 2. 00:01
728x90

 

그림1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각주:1]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욕은 아프리카 전체를 둘러싸고 전개되어 이와 같이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화 되었다. 식민지화 이후의 아프리카는 크게 세부분에 걸쳐서 교과서에 등장한다.

1.세계대전 중심으로 한 열강의 세력 다툼의 한 일면 2.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과 제3세계 구축 3. 지역 분쟁과 내전. 이렇게 나눈 이유는 단순히 교과서에 등장하는 부분으로 나눈 것, 1960년이 될때까지 이집트, 남아공, 에티오피아, 라이베리아 외에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가 없기 때문에 그전까지 크게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음.

 

1.19~20세기 열강의 각축장 아프리카

19세기말 유럽열강의 식민지 확대 경쟁으로 여러 국가의 충돌이 일어나 긴장 관계가 점점 증가했다. 네덜란드계열인 보어인과 영국은 지금의 남아공 지역에서 보어전쟁을 일으켰고(1899~1902), 횡단 정책을 추진하는 프랑스와 종단 정책을 추진하는 영국이 파쇼다에서 부딪쳐 파쇼다 사건(1898)을 일으켰으며, 3B 정책을 추진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황제의 독일과 다른 열강들이 모로코에서 부딪쳐 두차례의 모로코 사건을 일으켰다. (1905, 1911)

제1차 모로코사건은 1905년 독일의 빌헬름2세가 프랑스의 세력권이던 모로코의 탕지르항을 방문해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주장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로인해 에스파냐의 알제시라스에서 프랑스는 영국 및 여러 나라의 지원으로 우월한 지위 보장 및 독일의 양보를 받아낸 사건이다.

 

제2차 모로코사건은 1991년 모로코에서 내란이 발생해 프랑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독일이 모로코의 아가디로 항에 군함을 파견해 일어난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영국이 프랑스를 강력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독일이 양보하고 프랑스가 ㅗ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이후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대전이 발생하기 직전 이탈리아는 이토전쟁을 일으켜 트리폴리를 점령하기도 했다. 대전 중에는 아프리카 식민지의 인력과 물자도 전쟁에 동원되었다. 아프리카는 기간 산업(도로, 철도 등)이 부족해 200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주민들이 군수품, 무기, 부상자 등을 운반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서 병사와 짐꾼으로 복무한 아프리카인이 10만 명 이상 되었다고 한다. 에티오피아와 모로코는 중립국이었지만 대부분의 식민지는 점령국편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 후 상황 정리를 위해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이 확인된다.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패전국인 독일의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열강은 식민지를 대부분 그대로 보유했다. 실제로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단순히 위임 형식으로 독일의 식민지를 재분할하기만 했던 것이다. 결국 콩고 이북의 독일 점령 지역은 프랑스가 가져 가게 된다. 이에 북아프리카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중 영국을 지원하였던 이집트가 독립 운동을 전개해 결국 독립을 하였으며(1922), 모로코, 튀니지 등도 독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림 2. 1차세계대전후 아프리카의 민족운동. (더텍스트 세계사)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아프리카는 희생의 대륙이었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독일은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를 점령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이 예전 패배를 설욕하고자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는데, 이에 국제연맹이 비난하자 이탈리아는 바로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게 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카이로(1943.2), 얄타(1945.2), 포츠담(1945.7)에서 회담이 열리는데 카이로 회담에서는 일본이 침략하고 점령한 곳을 적당한 시기에 (in due course)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각주:2]

 

 

 

2.2차세계대전 이후의 아프리카

-세계 질서의 다원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열강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유지하려고 했지만 미국과 소련은 민족 자결주의를 내세우며 식민지 유지를 반대했다. 이에 따라 전후 20년간 아시아에서 20개국 아프리카에서 33개국이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를 표방한 신생 독립 국가들이 형성되었으며, 70년대 초에는 합쳐 70여개국이 넘었다. 이들 국가는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였으며, 빈곤한 개발도상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미소 양국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제3세계, 또는 비동맹 국가라고 부른다.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1952)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1956)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를 끌여들어 이집트를 공격하기도 했으나(제2차 중동전쟁) 국제 연합의 결의에 따라 철수했다. 이들 주변의 아랍문화권 나라 리비아(1951), 모로코(1956), 알제리(1962)등은 일찍이 독립을 달성했다.

뒤이어 1957년 가나가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린 1960년에만 17개 독립 국가가 생겼다. 이런 기세로 1963년 아프리카통일기구(OAU)가 조직되었다.

모잠비크와 앙골라는(1974~1975)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포르투갈이 이들 식민지를 본국의 연장이라고 주장하며 독립을 강력하게 억제해 뒤늦게 독립했다.

리비아는 1969년 극단주의적 민족주의자인 카다피가 정권을 잡고 독재를 행했는데 국제적 테러를 자행해 미국의 폭격을 받았다. 2011년에 반독재 시위가 일어나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고 과도국가위원회 정부가 출범되어 활동중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는 에스파냐가 광석자원이 풍부한 서부 사하라를 포기하자 이의 병합을 원하는 토착민세력과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치뤘다. 1988년 UN과 OAU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1990년대에도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제3세계의 5개국(인도,미얀마,인도네시아,파키스탄,실론)은 1954년 콜롬보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평화 공존의 5원칙을 제시했다.

다음해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반둥에서 열린 반둥 회의에서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29개국 독립국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평화 10원칙을 발표하고  상호 경제 협력을 체결했다.

점점 이들 국가의 수가 증가하면서 제2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1957)때에는 40여개국이 참가하고, 제 4 차 회의(1973)에는 73개국이 참가했다.

또한 현대의 세계화와 지역화의 흐름은 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으로 세계의 각국은 지역별로 경제 블록을 형성했는데 아프리카에서도 남아프리카 관세동맹(SACU 1969. 남아공, 보츠와나, 레소토, 나미비아, 스와질랜드)가 결성되었다.

 

3.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현대 아프리카에서는 많은 내전이 일어났으며 아직도 진행중인 곳이 많다. 열강의 이간질적 식민 통치 및 지리와 환경 및 2000개가 넘는 부족, 800개가 넘는 언어 등 다원성을 무시한별 생각없이 자로 나눈듯한 국경선 분리에 대한 휴우증, 이슬람 극단주의의와 기독교의 대립같은 종교, 백인과 흑인이나 토착 종족간이라는 인종같은 사회 통합의 실패, 자원 문제로 갈등을 일으켜 발생했다. 또한 독립 후에도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1인독재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자체적인 노력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국제 연합(UN)산하의 국제 평화 유지군이 파견되는 등 해결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르완다에서는 1990년대 후투 족과 투치 족간의 분쟁으로 수십만 명이 학살되었고,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 지역은 벨기에가 통치하던 지역이였는데, 벨기에가 소수의 투치 족 지주가 다수의 후투족 영세농을 지배하도록 했던 것이 원인이다. 이후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하면서 다수의 후투 족이 집권해 두 종족간의 분쟁이 반복되었다.

 

수단에서는 2003년 초 다르푸르 지역을 중심으로 북부 아랍계와 남부의 흑인계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영국은 수단을 통치할때 북부 아랍계에게 정경권을 집중시켰고, 서남부의 흑인을 소외시켰는데 독립 후에도 이런 구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분란이 발생하고 있다.

 

이외에도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오의 전쟁, 우간다 내전, 벨기에령 콩고인 자이레의 내전, 나이지리아의 내전, 짐바브웨의 내전끝에 얻은 독립(1980) 등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남아공은 오랫동안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악명 높은 인종 차별 정책으로인해 월드컵 대회 및 올림픽 출전이 금지된 나라일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했다. 아파르트 헤이트는 사람을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 등으로 구분하고, 그에 따라 공공장소 출입과 편의시설 이용부터 교육, 주민등록, 거주 지역 등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정책이다.

1990년 국민당 정부(백인 정부) 구속 중인 만델라는 석방하고 4년만에 다인종 선거에서 승리해 백인 통치는 막을 내렸으며, 만델라가 이끄는 민족 회의는 수십 년 동안 인종 갈등을 치유하면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국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대한 해결책중 하나로 적극적인 과거사정리를 실시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참고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케이스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흐름은 국가간의 빈부 격차도 확대시켰으며, 아프리카에는 가난과 전쟁 등으로 인한 난민, 기아, 질병의 문제가 심각하게 퍼져있어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하다.

 

 그림 4- 세계의 분쟁 지도

그림 5 - 세계의 기아 지도 아.. 아프리카여..  와중에 북한이 눈에 띈다. 전쟁, 기아... 남얘기가 아니다

  1. 세계사 교학사에 있는 그림. 근데 다른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 더 보기 쉬웠는데... 왜 현직학교교사만 교과서를 공유해주는거냐. ㅡ.ㅡ 빡침 [본문으로]
  2. 특히 카이로 선언에서 적당한 시기에 라고 하는 내용때문에 우리나라의 독립후 소련군과 미군정이 진주해 신탁통치안을 제시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얄타 회담은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을 결정한 내용, 포츠담 회담은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재확인 한것이다. [본문으로]
728x90
Posted by 런닝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