宰相之職 臣於治典論之矣 然爲宰相者得其君 然後道行於上 而惠及於下 身榮於前 而名顯於後 而君臣之相遇 自古以爲難也(중략……)噫 臣之遇君誠難 而君之遇臣亦難矣 方今明良相遇 誠意交孚 相與共圖 ㉮維新之政 千百年之一盛際也 於是作宰相年表 獨書侍中者 亦以見冢宰之兼衆職 而人主之職 在擇一相 百執事以下不與也
-삼봉집-
해석: 재상의 직은 신이 치전에서 논했습니다. 그러나 재상이 되는것은 그 군주를 얻고, 도가 그 위에 행해지고 은혜가 아래에 미쳐 앞에 모엔 영화가 있으며 뒤에는 현명한 이름이 남을 것입니다. 따라서 군신의 만남은 옛부터 어렵게 여겨졌습니다. (중략) 아. 신하와 군주의 만남히 지극히 어렵고 군주와 신하가 만나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지금 진심으로 서로 만나 마음을 다해 교류하니 서로 함께 공도를하고 유신지정을 하니 천년에 한번 있을까 합니다. 재상연표를 만드는데 홀로 시중을 적는것은, 또한 총재는 여러 직을 겸임하고, 인주(임금)의 직은 하나(재상)를 선택하는데 있으니 모든 일을 아래와 더불지 않는 것입니다.
(사료는 임용고사 역사 2005년 기출. 고전종합DB에있는 삼봉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저 문항을 찾을 수가 없었다. -_-... 어디 나와있는 걸까.삼봉집 9권 경제문감 재상의직에 있을것 같았는데 아니다. 어디 있는 것일까. 해석도 나같은 초보가 하기엔 어렵다.)
위 사료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인정사상을 먼저 논한 후에 좋은 군주와 신하가 만나기는 어려운 것을 논하고. 어떤 방식으로 골라야 하는지 논했다. 왕은 재상을 임명하되 다른 정사에는 간여하지 않는 것을 주장했는데(폼떨어진다.. 그런 이유? ㅋㅋ). 이는 재상정치, 의정부 서사제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료의 답으로 의정부 서사제를 논하는 것은 엄밀히 틀린 것. 의정부는 방원이 제2차 왕자의 난(1400)을 평정하고 세자로 책봉된 직후에 사병을 혁파하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세운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즉 태조때는 도평의사사에서 재상정치를 행했던 것. (교과서에는 이태조 때의 정치가 태조와 정도전 조준 등 소수의 재상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덧붙이면 정도전의 재상정치는 왕권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는 공권적인 측면이다. 왕은 왕으로 군림하지만 사관의 감시를 받으며 공적인 권력만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해제: 간단하게 정도전이 쓴 글을 모두 모아서 엮어낸 책이라고 보면 된다. 삼봉집은 조선 건국 이념연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사료이기도 하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아들에 의해서 2권으로 간행된 일이 있다. 그 뒤 1465년(세조 11) 그의 증손에 의해서 6책으로 중간되고, 다시 1486년(성종 17) 8책으로 증보되었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삼봉집≫은 1791년(정조 15)에 왕명으로 다시 간행한 책으로서, 구본(舊本)에 누락된 진법(陣法)과 시문을 수록했으며, 정도전의 사실(事實)에 대한 기록을 보완하고 편차를 다시 분류해 14권 7책으로 만든 것
삼봉집에는 그가 쓴 여러가지 잡다한 글부터 조선경국전, 고려국사, 경제문감, 학자지남도, 팔진36변도보 등 사상적,정치적,군사적 이념들이 담겨있다.
이를 통해 조선의 건국이념의 실현라고도 볼 수 있는 유교적 왕정과 중앙집권 관료체제의 과정에 대해서 생각 해 볼 수 있다.
신유학의 수용: 고려후기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면서 그것의 정치적 이념도 같이 수용되었다. 신유학은 이상적인 백성의 삶을 개선하여 보장하는 것은 왕정의 임무로 규정했으며, 그것을 인정이라고 했다. 즉 민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왕의 임무라는 것이다. (성리학의 형이상학적인 이념이 드러나는 대목) 이런 취지에서 민본사상-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이념-이 등장했다.
고려말 시대적 배경: 14세기부터 기존의 권력기반과는 다른 사대부-관료, 지식인-층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혁신적이고 현실비판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공민왕때 본격적인 개혁정치가 실시되었을때 이들 사대부층도 많은 부분에 간여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비록 실패했으나 이때부터 사대부층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등을 격퇴하며 성장한 신흥 무인세력(최영,이성계)등과 함께 짝을 맞추면서 개혁을 진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권력싸움에서 승리하고 이를 보좌한 정도전과 조준, 남은등(급진파, 역성혁명파 사대부)이 측근 52명을 규합해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게 된다.
정도전의 건국이념: 정도전은 1394년 조선경국전에서 국정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는데 새 왕조는 유교의 성현의 정치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주역의 인정론에 근거해 새 왕조의 왕위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천지의 덕을 본받아 인정을 행해 천하 사방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성인의 정치를 행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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