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3. 4. 16.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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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國 自中世以來 奸壬用事 士禍相繼 前有戊午甲子之戮 後有己卯乙巳之殘 一時忠賢 騈死於洪流 猶未有朋堂之號 自宣廟以來 一分爲二 二分爲四 四又分爲八

 

성호이익, 『곽우록』과『성호전집』권 45 붕당론에 실려 있다.

 

 

해석: 우리나라는 중세부터 지금까지 간임용사(임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음..간신이 국사를 써써라고 해석해도 될듯) 사회가 계속 끊이지 않았다. 전에는 갑오갑자의 살육이 있었고, 후에는 기묘을사의 도륙이 있었다. 한번에 충현(충신과 현신)이 모두 홍류(함께 휩쓸려)에 죽었다. 아직 붕당이라는 이름이 있지 않았으나, 선조대부터 지금까지 한개가 두개로 나눠고 두개가 네개로 나뉘고 또 네개가 여덟개로 나뉘었다.

 

 1519년 중종 14   기묘사화  

 1545년 인종 원년

  을사사화  
 1575년 선조 8   심의겸과 김효원에 의해 동서 분당

 동서 대립

 1589년 선조 22

  정여립 모반 사건  서인 집권
 1591년 선조 24   동인이 남북인으로 나뉨

 북인 집권

 1608년 광해군 원년

  대북파 정권 장악  

 1623년 인조 원년

  서인에 의한 인조 반정  

 1674년 숙종 원년

  갑인예송(2차예송)으로 남인 집권  

 1683년 숙종 9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

 경술환국 직후

 1689년 숙종 15

 세자 책봉 문제로 노론 실각, 남인 집권  남인 집권

 1694년 숙종 20

 인헌왕후 복위 문제로 노론 집권

 노론 집권

 1724년 영조 원년

  영조 즉위  탕평

붕당계보도, 연표 출처 - 아틀라스 한국사 (이밖에 청남탁남 한당산당 이것저것 널리긴 했는데 이정도만 알아도 크게 문제없을듯)

 

1.붕당정치

사림은 몇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향촌 사회에 서원과 농장 등 인적,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계를 장악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훈구세력이 쇠퇴하면서 사림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사림 세력은 의견이 나눠지기 시작했고 의견이 나뉨과 동시에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정치적 모임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붕당이다. 조선 초기엔 붕당은 유교적 원리에 따라 금기시하였으나, 성리학이 구양수의 붕당론을 수용하면서 조선 사회에서 붕당이 인정받고 붕당 정치가 활발하게 되었다.

 

2.붕당의 전개

1)붕당의 발생(동인과 서인, 김효원과 심의겸, 이조전랑)

최초 붕당은 1575년(선조 8) 김효원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신진 사림인 김효원의 집이 동쪽이라 동인 기성 사림인 심의겸이 집이 서쪽이라 서인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들은 하급 문반관인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정랑과 좌랑) 자리를 놓고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과 김효원이 경쟁한데서 발생했다.

서인과 동인의 차이는 서인은 치인에 역점을 두고 제도개혁을 통한 부국안민을 주장한 반면 동인은 수기를 통한 도덕성 제고를 역점에 두었다.

분당 초기에는 이이가 서인과 동인의 갈등을 조정해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선조 17년(1584) 이이가 죽자 유성룡, 이산해, 이발 등의 동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 그러나 선조22년 (1589)에 동인인 전주출신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켯다 발각되어 다수의 동인이 처형되었다.

정철의 세자 책봉: 그러나 동인은 2년뒤인 1591년 서인 좌의정 정철이 세자 책봉을 선조에게 건의하자 동인은 이를 문제삼아 서인파를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서인에 대해 기축옥사 때 피해를 많이 입은 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강경한 입장을 가진 전자를 북인, 온건한 입장을 가진 이들를 남인이라고 불렀다.  

 

2)광해군대의 대북의 집권

신분(명분)의 차이 때문에 북인의 분당 : 서인 몰락 후 정치 상황이 북인이 우세한 가운데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때 선조는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왜를 막게 했다. 그러나 왜란이 끝나고 인목대비가 뒤늦게 영창대군을 낳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실리주의자)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명분주의자)으로 갈렸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항일전쟁을 주도한 대북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후궁인 공빈김씨의 소생인 광해군대의 정치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계축옥사: 광해군은 붕당극복을 위해 남인도 고루 등용했다. 그러나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과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1613년(광해군5)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 이를 계축옥사라 한다. 이때문에 광해군은 후대에 성리학적 법도에 어긋나는 패륜으로 불리게 된다.

1611년 급진개혁: 정인홍의 주장으로 남인의 추앙을 받던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제사에서 삭제하고 이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축출한 사건은 반발을 더 크게 했다.

 

3)인조반정과 서인정권

인조반정: 1623년 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들은 광해군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 소생인 원종의 아들 능양군을 추대해 왕으로 삼았으며 폐모살제의 명분으로 광해군을 유배되고 대북파는 모두 처형되었다. 이를 인조반정이라 한다.

이괄의 난(1624): 이괄이 자기의 공로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까지 점령했으나 평안남도 군사에게 진압되었다. 이 난 평정후에 서인은 패도에서 왕도로 돌아서 남인파를 등용해 붕당연합을 결성했고, 광해군대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했다. 이때 이괄의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가 부당하게 즉위했다고 호소하는 사건은 후금의 신경을 건드렸다.

정묘호란: 결국 후금의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1627년 쳐들어왔다.  이후 조정은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주화론자와 소장파 관인들인 주전론자로 나뉜다.

병자호란 : 결국 1636년(인조14)에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청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소현 봉림대군을 데려갔다.  후에 봉림대군이 돌아와 효종으로 즉위한다. 원래 소현세자가 왕세자였으나 그의 친청태도가 문제되어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이 시기 서인은 호위청, 총융청, 수어청, 정초군 등의 새로운 부대 설치를 통해 권력기반을 유지해나간다.

 

효종과 서인정권 : 효종 즉위 후에도 서인정권은 계속된다. 그러나 허목 윤선도 같은 저명한 남인 인사도 등용되어 조화를 이루었다. 효종정권대 붕당의 관계가 요동치는 정도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4)현종대 1차 예송논쟁

1차예송:  현종 즉위시 남인들이 효종의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들고 나와 서인을 공격했으나 서인이 승리했다. 이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남인과 (3년복) 신권을 강화하려는 서인 (1년복,기년복)의 대립에서 서인이 승리했다.

 

5)숙종과 환국정치

2차예송: 숙종초에 왕권강화를 주장해온 남인의 의견이 채택되어 서인이 실각하게 된다. 효종비 사망을 계기로 효종의 어머니(조대비)가 입어야 될 상복을 서인은 대공복(9개월)로 주장했고 남인은 기년복(1년)을 주장했는데 숙종이 기년복을 채택했다. (남인승리 이후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어 정치전개)

 

경신환국(숙종6 1680) : 허적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허적 윤휴를 사형시키고 서인이 남인을 몰아낸 사건으로 서인이 집권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다. 노론은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민생안정과 자치자강을, 소론은 실리와 북방개척을 주장했다. 이때 노론이 정치를 주도했다.

기사환국(숙종15 1689) : 노론이 남인계의 후궁(장희빈)이 낳은 왕자가(경종)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

갑술환국(숙종20 1694) : 숙종이 폐위된 민비,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장희빈을 사사하자 노론과 소론이 다시 집권한 사건. 이후 권력이 노론과 소론 사이 왔다갔다 하는 시기가 된다.

6)영정정조대 탕평론

영조대 완론탕평: 소론의 지지를 받은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했다. 즉위직후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의 도전을 받았으나 극복하고 이 과정에서 임오화변(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임)이 일어난다. 이때 노론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임오화변을 찬성하는 벽파로 나뉘게 된다.  이후 어느 당파를 가리지 않고 온건한 세력을 등용하는 완론탕평을 실시했다.

정조대 준론탕평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겪은 정조는 당파를 꺾지 않고는 탕평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해 초월적 군주가 되어 신하를 양성하고 재교육 시키는 방향의 정책을 펼쳤다. 이를 준론탕평이라 한다.

 

각 시대별로 있었던 당파들의 정책과 정치적 전개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뤄야 하지만 대충 흐름만 봤다.

큰것만 정리하면 동서인 분당 →정여립 모반 사건(동인처형) →정철의 선조 세자 책봉 문제(동인이 다시 복권)→임진왜란(광해군 및 대북세력 집권) → 인조반정(서인중심 남인 일부 참여) → 예송논쟁(1차 서인 2차 남인 승리)→ 경신환국(서인 승리 이후 노론소론으로 분당) →기사환국(남인 승리) →갑술환국(서인승리 남인의 완전 몰락) → 탕평론의 전개로 대충 정리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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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교육학/논제2013. 4. 1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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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

 

(1)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인간의 삶의 모든 수준, 즉 가장 원초적인 수준과 가장 진보적인 수준에서 작용하고 있는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간성의 법칙을 찾고자 하는 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법칙은 개개인의 역할보다는 전체 체계를 구성한 후에 그 체계 안에서 각각의 구성원의 관계를 구성하게 된다. 즉 개인의 행위나 인식을 규명하기 위해 그것의 기반이 되는 전체 체계와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론과 실증론과는 뚜렷한 차이가 난다. 구조주의는 사회 구조와 시스템, 의미론 등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구조주의는 분야가 넓으며 통일된 이론이라고 볼 수 없다. 철학적 사유임과 동시에 학문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2)구조주의의 전개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기호언어학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인간은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이 기호와 언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언어는 그 각각의 단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언어의 세계 속에서 다른 요소와의 관계를 통해 그 위치를 규정받는다. 이러한 논리는 구조주의의 기반을 마련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실존주의와 함게 구조주의가 더욱 더 각광받았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 분야에서 구조주의적 사유를 전개했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은 기존의 제국주의의 통치를 정당화하던 인류학이 아니라, 객관주의적 사유를 통해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는 현실에 처해 인간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시선을 제기하고자 했다. 이후 바르트, 알튀세르, 푸코 등의 학자가 주도하는 분야로 이어져 전개된다.

 

(3)구조주의의 기본입장

①주체는 구조의 산물: 구조주의는 인간의 주체성과 역사성을 내세우는 실존주의와 대립되는 사상이다. 실존주의가 인간이 스스로 선택에 의해 자신의 내용과 본질을 만들어 간다고 보는 반면 구조주의는 주체를 구조의 산물로 본다.

②보편적 구조가 존재: 인간의 언어, 사회구조, 정신 등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구조가 존재하며 개개인의 특성은 보편적인 구조에 의해 마련된 가능성을 일정하게 조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주의는 시간과 문화적 상황(통시성)이 아니라 상황(공시성)에 주도된다고 본다. 즉 구조는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것

③연구대상: 구조주의는 연구대상을 개별적 사실보다는 사실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규정되는 체제를 대상으로 한다. 사회생활에서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규정하는 심층적 구조를 밝히고자 한다. 주체보다 구조, 실체보다 관계, 내용보다 구조를 파악했다. 라캉은 무의식을 구조주의적으로 파헤쳐 주체철학에 타격을 가하고 주체를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현대사상의 전개에 영향을 미침. 구조주의가 주체보다는 구조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구조를 옹호하는 입장이 아니라 파헤쳐 비판하는 목적이 더 크다.

 

(4)후기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가 주장하는 보편적 구조를 해체하려는 보다 급진적 흐름이다. 구조주의는 개념에 대한 구조화이고, 탈구조주의는 구조의 절대화에 반발한다. 보편적 이성과 절대적 진리가 초래한 전체주의적 억압을 문제로 삼고, 개별,우연, 단절, 차이 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따라서 구조주의에서 구조의 공시성에 주목했다면 탈구조주의는 역사성과 상대성에 주목한다.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의 역사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구조를 선험적,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초기구조주의와 견해가 다르다. 이 일부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린다.

대표적으로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리오타르가 있다.

 

2.후기 구조주의 학자

(1)리오타르

리오타르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보편화된 거대담론을 의심하고 지엽적이고 국지적인 지식이나 관점을 중시하는 사상이라고 했다.

리오타르는 기존 서구의 사회이론은 특정 가치를 합리화하거나 그럴싸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몰두해왔다고 주장하고 보편적 진리를 부정했다.

과학이나 권위 있는 이론이 여러 이론을 내놓지만, 그 이론은 사실 그들이 처한 현실이나 주장을 다른 이들에게 부과하려는 것에 불과하고 이를 '주체의 정치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주장했다.

 

(2)데리다. - 해체주의자

데리다는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전통지식을 해체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일상 언어는 절대 중립적일수 없다고 주장하며 언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지식은 해체해야 되며, 텍스트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서브텍스트나 하위 텍스트를 해체해야 한다고 보았다.  소쉬르가 주장한 차이 라는 개념에 연기라는 개념을 도입해 기표와 기호 내용의 관계는 논리적, 필연적 이 아니라 시간적 임의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념은 텍스트의 다양한 의미를 해독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텍스트는 독자와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므로 이러한 분석 과정을 해체라고 한다. 해체는 우리 안에 형성된 개념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어떤 사회적 장치나 지적인 아이디어의 저변에 깔린 가정, 판단, 가치들을 분석하고 명확히 드러내며, 타자의 경험에 비추어 그 사건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텍스트와 진리가 일치한다는 견해를 부정하며 서브텍스트를 읽고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3)푸코의 훈육론

푸코는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 사상에 걸쳐 있는 학자이다.  주로 사회학적인 영역이나 그의 담론은 다른 분야에도 적용 할 수 있다.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 지식과 권력, 담론 등의 개념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배제된 자, 침묵을 강요한 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려 했다. 광기, 동성애 등의 말은 비정상적 인간을 연구하는 중립적 개념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타자화 시키고 억압하고 배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즉 지식,권력이 자신과 남을 구분짓는 경계를 만들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타자화 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푸코는 지식-권력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따라서 지식은 끊임없이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근대사회의 이성과 합리성은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도구가 되었으며, 결국 지식-권력은 공범인 것이다.

①훈육론

인간은 권력장치와 그것이 만들어 낸 지식에 의해 통제하고 억압당한다. 효율적 통치를 위해 권력이 사용하는 다양한 기법과전술을 규율(훈육)이라고 표현했다. 대표적으로 감옥, 군대, 학교, 병원, 공장, 회사 등이 있다.

②훈육을 위한 도구

훈육을 위한 도구로 관찰과 감시, 규범적 판단, 시험(검사)를 꼽았따. 관찰과 감시는 파놉티콘(원형감시 감옥)과 유사하다고 했는데 학교 구조를 오픈하는 것은 사람들을 눈에 잘띠게 감시하려고 하는 것이며, 규범을 정해 벌칙을 주는 식으로 구성원을 통제하며, 시험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해 타자화 시키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③교육적 시사점

푸코의 훈육론을 근거로 오늘날의 학교에서 감시와 제제의 메커니즘과 권력의 실체를 분석할 수 있다. 오늘날 학교에서 실시하는 지능검사, 심리검사, 적성검사, 시험 등이 권력으로 작동되는 역할을 밝혔는데 이들이 학생을 관찰해 정상성 수준을 판단하는 기초가 되고 하나의 감시 권력이 되었다고 본다.

 

푸코의 훈육론을 통해서 현재의 학교 교육이 학생들을 어떤 식으로 구별화 하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학교교육이 학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을때, 학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훈육적인 개념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훈육이 어떻게 학교에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대학 서열화, 입시제도, 시험을 통해 학교에 그대로 주입시키고 이는 입시 위주의 학교교육의 파행적 운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학교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기본적인 생각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그대로 영향을 받아 충실하게 따르게 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하의 무한경쟁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발전을 자극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반대로 물질만능주의에 따른 인간을 소외시키는 역기능도 있다. 최소한 학교 교육이 이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장소가 아니라 역기능을 방지 할 수 있는 역할, 아니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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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4. 15.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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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사 시간을 시작할때 인류의 기원을 아프리카에서 찾으면서도 아프리카는 19세기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 전까지는 미지의 대륙이었다. 실제로 고대 아프리카에 대한 기록이 드물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역사도 소략하다.

고대에도 지중해와 홍해 연안 국가들(이집트, 이슬람), 대항해시대의 서부 아프리카 남아공 지방 등등이 알려지고, 노예 무역을 설명하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내부가 알려진 것은 제국주의가 아프리카를 가지고 짬짜미(-_-;)를 하려 했던 시절부터 내부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세계사 시간에 배울때도 인류의 기원을 할때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최초 발견 된 곳이 아프리카 라고 잠깐 배우기만 할뿐 구체적으로 배우지는 않는다.

 

고교 교육과정에서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고대에 대해서 문명,문화의 형성 파트의 심화학습 부분으로 학습하고 있다. (현재 나온 2009개정교육과정에 따른 4종 교과서 모두 다루지는 않았다.)그러나 내용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고 약간약간 다르다.

일단, 쿠시 왕조, 악숨 왕조, 가나 왕조, 말리 왕조, 콩고 왕조, 루바 왕조, 룬다 왕조. 교과서에 있는 지도에 이렇게 7왕조가 소개되어 있으나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은 쿠시 왕조와 악숨 왕조, 가나왕조 정도이다. (그러나 실제로 굉장히 많은 왕조가 있고 역사도 오래 되었으나. 그리 중요하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으며, 쿠시 왕조, 악숨 왕조, 가나 왕조정도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있지만 단편적인 사실관계지식의 나열정도.)

 

 

크게 동부 아프리카(쿠시 왕조(1100B.C경~ AD350 경, 악숨 왕조(BC300~ AD500년대), 서부 아프리카(가나 왕국 4~11C, 말리 왕조 13~15C), 남부 아프리카(콩고 왕조14~18C, 룬다 왕조, 루바 왕조. (지역에 따른 자의적 구별;;)로 구별할 수 있다. 지역과 함께 시기도 차이가 나니 기억하기 더 편할 듯.

 

 

 

 그림1 아프리카의 왕국(쿠시 왕조와 악숨 왕조가 빠졌는데 쿠시 왕조는 나일상 상류에 걸쳐있고. 악숨 왕조는 그 바로 옆에 홍해의 커브(?)의 왼편 홍해 연안에 위치한다, 룬다 루바왕조는 룬다왕조는 콩고왕국에서 오른쪽 으로 2센치쯤 가면있는 자이르강의 지류에 딸려있고 루바왕국은 잔지바르의 글자 '잔'에 있는 호수? 영역에 걸쳐있다. )

 

(1)쿠시 왕조

기원전 1000년경 이집트 문명(신왕국)의 영향으로 성립. 이집트를 정복했다.(고대 이집트의 25대 파라오왕조) 쿠시 문명은 이집트 문명과 더불어 발전한 아프리카 문명의 하나로 수도 카르마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했으며, 이집트 파라오와 달리 관습법에 따라 통치하고 세습이 아닌 선출을 통해 즉위하는 왕정 제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대 다른 국가에 없었던 혁신적인 왕정 제도였다. 중국, 인도 , 지중해와 교역했다.

 

(2)악숨 왕조

셈족 계열이 현재의 에티오피아 지역에 기원전 120년경 건설했다. 아라비아 반도를 지배하기도 했다. 악숨 왕조는 북아프리카 무역 국가로 인도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상아, 금, 향신료 등을 거래했으며, 3세기 경부터 그 세력을 서부로 확장했다.  독자적 화폐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며 에티오피아 북부에 그 유적이 남아 있으며, 4세기경 크리스트교가 전해져 국교로 전해졌다. 7세기 등장한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점차 쇠퇴하다 10세기경에 멸망했다.(교과서의 서술이 조금 다르다. 하나는 6세기 까지. 하나는 7세기 쇠퇴하다 10세기 멸망)

악숨 왕조의 오벨리스크

 

(3)가나 왕조

최초의 아프리카 토착 왕조. 가나 왕조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8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가나 왕조는 사하라 횡단 무역을 통해  금, 상아, 소금 등을 수출하며 번영했다. 과도한 인구 밀집과 사마라 사막의 팽창으로 식량부족으로 쇠퇴했으며 11세기경 이슬람 세력(모라비드 왕조)과 부족 침입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말리 왕국과 송가이 왕국으로 계승되었다.

 

가나 왕조를 계승한 말리 왕조는 서아프리카에서 1235년부터 1645년까지 존재했던, 만딩고족이 세운 제국이었다. 순디아타 케이타에 의해 세워졌고, 특히 만사 무사의 부로 인해 유명해졌다. 말리 제국은 서아프리카에 문화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나이저 강을 따라 언어, 법, 관습 등을 퍼뜨렸다. 넓은 지역을 다스렸으며, 많은 속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정하였으며, 말리는 지금도 이슬람교가 9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위키백과 - 박승무, 신비의 세계 서아프리카의 역사, )

 

 

(4)콩고 및 룬다, 루바왕조

콩고와 룬다, 루비왕조에 대해서는 최근에 알려졌다. 8세기경 룬다 루바왕조가 전성기였으나 13~15세기에는 콩고 왕국이 전성기였다고 전해진다. 1414년 포르투갈 항해단에 의해서 그 존재가 유럽에 알려졌다. 그 이후 몇개의 왕조가 교체되고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18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면서 제국주의의 영향력에 들어가게 된다.

 

 

아프리카 고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시기상 쿠시 왕조, 악숨 왕조, 가나 왕조가 포함되므로 이 왕조에 대해서 알아두면 될듯. 나머지 말리왕조, 콩고왕조 등은 시기적으로 유럽이 중세 이후에 나타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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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