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 自中世以來 奸壬用事 士禍相繼 前有戊午甲子之戮 後有己卯乙巳之殘 一時忠賢 騈死於洪流 猶未有朋堂之號 自宣廟以來 一分爲二 二分爲四 四又分爲八
성호이익, 『곽우록』과『성호전집』권 45 붕당론에 실려 있다.
해석: 우리나라는 중세부터 지금까지 간임용사(임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음..간신이 국사를 써써라고 해석해도 될듯) 사회가 계속 끊이지 않았다. 전에는 갑오갑자의 살육이 있었고, 후에는 기묘을사의 도륙이 있었다. 한번에 충현(충신과 현신)이 모두 홍류(함께 휩쓸려)에 죽었다. 아직 붕당이라는 이름이 있지 않았으나, 선조대부터 지금까지 한개가 두개로 나눠고 두개가 네개로 나뉘고 또 네개가 여덟개로 나뉘었다.
1519년 중종 14 | 기묘사화 | |
1545년 인종 원년 |
을사사화 | |
1575년 선조 8 | 심의겸과 김효원에 의해 동서 분당 |
동서 대립 |
1589년 선조 22 |
정여립 모반 사건 | 서인 집권 |
1591년 선조 24 | 동인이 남북인으로 나뉨 |
북인 집권 |
1608년 광해군 원년 |
대북파 정권 장악 | |
1623년 인조 원년 |
서인에 의한 인조 반정 | |
1674년 숙종 원년 |
갑인예송(2차예송)으로 남인 집권 | |
1683년 숙종 9 |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 |
경술환국 직후 |
1689년 숙종 15 |
세자 책봉 문제로 노론 실각, 남인 집권 | 남인 집권 |
1694년 숙종 20 |
인헌왕후 복위 문제로 노론 집권 |
노론 집권 |
1724년 영조 원년 |
영조 즉위 | 탕평 |
붕당계보도, 연표 출처 - 아틀라스 한국사 (이밖에 청남탁남 한당산당 이것저것 널리긴 했는데 이정도만 알아도 크게 문제없을듯)
1.붕당정치
사림은 몇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향촌 사회에 서원과 농장 등 인적,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계를 장악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훈구세력이 쇠퇴하면서 사림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사림 세력은 의견이 나눠지기 시작했고 의견이 나뉨과 동시에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정치적 모임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붕당이다. 조선 초기엔 붕당은 유교적 원리에 따라 금기시하였으나, 성리학이 구양수의 붕당론을 수용하면서 조선 사회에서 붕당이 인정받고 붕당 정치가 활발하게 되었다.
2.붕당의 전개
1)붕당의 발생(동인과 서인, 김효원과 심의겸, 이조전랑)
최초 붕당은 1575년(선조 8) 김효원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신진 사림인 김효원의 집이 동쪽이라 동인 기성 사림인 심의겸이 집이 서쪽이라 서인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들은 하급 문반관인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정랑과 좌랑) 자리를 놓고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과 김효원이 경쟁한데서 발생했다.
서인과 동인의 차이는 서인은 치인에 역점을 두고 제도개혁을 통한 부국안민을 주장한 반면 동인은 수기를 통한 도덕성 제고를 역점에 두었다.
분당 초기에는 이이가 서인과 동인의 갈등을 조정해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선조 17년(1584) 이이가 죽자 유성룡, 이산해, 이발 등의 동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 그러나 선조22년 (1589)에 동인인 전주출신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켯다 발각되어 다수의 동인이 처형되었다.
정철의 세자 책봉: 그러나 동인은 2년뒤인 1591년 서인 좌의정 정철이 세자 책봉을 선조에게 건의하자 동인은 이를 문제삼아 서인파를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서인에 대해 기축옥사 때 피해를 많이 입은 이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강경한 입장을 가진 전자를 북인, 온건한 입장을 가진 이들를 남인이라고 불렀다.
2)광해군대의 대북의 집권
신분(명분)의 차이 때문에 북인의 분당 : 서인 몰락 후 정치 상황이 북인이 우세한 가운데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때 선조는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왜를 막게 했다. 그러나 왜란이 끝나고 인목대비가 뒤늦게 영창대군을 낳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실리주의자)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명분주의자)으로 갈렸다. 그러나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항일전쟁을 주도한 대북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후궁인 공빈김씨의 소생인 광해군대의 정치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계축옥사: 광해군은 붕당극복을 위해 남인도 고루 등용했다. 그러나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과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에 위협을 느껴 1613년(광해군5)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 이를 계축옥사라 한다. 이때문에 광해군은 후대에 성리학적 법도에 어긋나는 패륜으로 불리게 된다.
1611년 급진개혁: 정인홍의 주장으로 남인의 추앙을 받던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제사에서 삭제하고 이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축출한 사건은 반발을 더 크게 했다.
3)인조반정과 서인정권
인조반정: 1623년 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들은 광해군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 소생인 원종의 아들 능양군을 추대해 왕으로 삼았으며 폐모살제의 명분으로 광해군을 유배되고 대북파는 모두 처형되었다. 이를 인조반정이라 한다.
이괄의 난(1624): 이괄이 자기의 공로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까지 점령했으나 평안남도 군사에게 진압되었다. 이 난 평정후에 서인은 패도에서 왕도로 돌아서 남인파를 등용해 붕당연합을 결성했고, 광해군대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했다. 이때 이괄의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가 부당하게 즉위했다고 호소하는 사건은 후금의 신경을 건드렸다.
정묘호란: 결국 후금의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1627년 쳐들어왔다. 이후 조정은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주화론자와 소장파 관인들인 주전론자로 나뉜다.
병자호란 : 결국 1636년(인조14)에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청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소현 봉림대군을 데려갔다. 후에 봉림대군이 돌아와 효종으로 즉위한다. 원래 소현세자가 왕세자였으나 그의 친청태도가 문제되어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이 시기 서인은 호위청, 총융청, 수어청, 정초군 등의 새로운 부대 설치를 통해 권력기반을 유지해나간다.
효종과 서인정권 : 효종 즉위 후에도 서인정권은 계속된다. 그러나 허목 윤선도 같은 저명한 남인 인사도 등용되어 조화를 이루었다. 효종정권대 붕당의 관계가 요동치는 정도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4)현종대 1차 예송논쟁
1차예송: 현종 즉위시 남인들이 효종의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들고 나와 서인을 공격했으나 서인이 승리했다. 이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남인과 (3년복) 신권을 강화하려는 서인 (1년복,기년복)의 대립에서 서인이 승리했다.
5)숙종과 환국정치
2차예송: 숙종초에 왕권강화를 주장해온 남인의 의견이 채택되어 서인이 실각하게 된다. 효종비 사망을 계기로 효종의 어머니(조대비)가 입어야 될 상복을 서인은 대공복(9개월)로 주장했고 남인은 기년복(1년)을 주장했는데 숙종이 기년복을 채택했다. (남인승리 이후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어 정치전개)
경신환국(숙종6 1680) : 허적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허적 윤휴를 사형시키고 서인이 남인을 몰아낸 사건으로 서인이 집권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다. 노론은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민생안정과 자치자강을, 소론은 실리와 북방개척을 주장했다. 이때 노론이 정치를 주도했다.
기사환국(숙종15 1689) : 노론이 남인계의 후궁(장희빈)이 낳은 왕자가(경종)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
갑술환국(숙종20 1694) : 숙종이 폐위된 민비,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장희빈을 사사하자 노론과 소론이 다시 집권한 사건. 이후 권력이 노론과 소론 사이 왔다갔다 하는 시기가 된다.
6)영정정조대 탕평론
영조대 완론탕평: 소론의 지지를 받은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했다. 즉위직후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의 도전을 받았으나 극복하고 이 과정에서 임오화변(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임)이 일어난다. 이때 노론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임오화변을 찬성하는 벽파로 나뉘게 된다. 이후 어느 당파를 가리지 않고 온건한 세력을 등용하는 완론탕평을 실시했다.
정조대 준론탕평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겪은 정조는 당파를 꺾지 않고는 탕평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해 초월적 군주가 되어 신하를 양성하고 재교육 시키는 방향의 정책을 펼쳤다. 이를 준론탕평이라 한다.
각 시대별로 있었던 당파들의 정책과 정치적 전개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뤄야 하지만 대충 흐름만 봤다.
큰것만 정리하면 동서인 분당 →정여립 모반 사건(동인처형) →정철의 선조 세자 책봉 문제(동인이 다시 복권)→임진왜란(광해군 및 대북세력 집권) → 인조반정(서인중심 남인 일부 참여) → 예송논쟁(1차 서인 2차 남인 승리)→ 경신환국(서인 승리 이후 노론소론으로 분당) →기사환국(남인 승리) →갑술환국(서인승리 남인의 완전 몰락) → 탕평론의 전개로 대충 정리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