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논제2013. 4. 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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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육과 중세의 교육은 객관식때는 양이 좀 된거같은데 논술로 바뀌니까 중요성이 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난다. 후대에 눈에 띠게 영향을 미친 것 같지 않아서 그런것 같다. 그리고 로마교육의 루두스, 문법학교, 수사학교, 법률학교, 철학학교는 중세의 시민교육에 영향을 미치니 알아둘 필요가 있는 듯,

중세교육의 주요 특징인 도제교육이나 기사도교육, 대학교육 등등은 좀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그리고 로마교육도 그냥 넘어가기 힘드니 간단하게만 보고 넘어가야지. ㅋㅋ 

1.로마 교육

로마교육은 크게 민족적 문화에 유지된 공화정 시기와 그리스 문화와 교육의 영향을 받은 제정시기(BC 31~476)로 나눠진다.

공화정기 로마는 용감한 군인과 근면하고 의무감이 강한 시민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교육 내용으로는 가정교육 중심, 도덕적 품성과 가사교육 중심의 여성교육, 실용지식, 신체훈련, 법률(12동판법), 실용적 응용과학을 익혔다. (로마시대에 법, 도로나 다리같은 실용적 건축물들이 발달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될듯)

대표적으로 키케로가 있는데 키케로는 웅변론에서 내세운 웅변가의 육성을 교육의 목적으로 제시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을 발판으로 성립된 제정기 로마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특징을 가진다. 또한 상무적 기풍과 조직화가 잘 되어있어 엄한 규율이 강조되는 시기였다. 또한 황제들이 수사학교에 관학제도와 장학제도를 도입해 학교교육이 크게 발전했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웅변가의 양성이 목표로 문법과 수사학을 강조했다.

대표적 사상가로 퀸틸리아누스가 있는데 퀸틸리아누스는 최초의 관립 수사학교의 수석교사였으며 공립학교의 수립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선천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며 교육이 선천적 능력을 계발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 능력이 잘 계발된 것이 웅변인이라고 보았다. 퀸틸리아누스의 교육관은 조기 교육을 옹호하고 조직적으로 구성된 학교교육을 중시하며, 지적 능력에 맞는 개별화 교육이며 그는 교사는 아이들을 친자녀처럼 대하고 부드럽게 대할 것을 요구했다.

 

이 시대의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Ludus), 문법학교(Grammaticus), 수사학교(Rhetors), 법률학교, 철학학교가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12동판법, 3R(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쳤으며, 정서 및 음악교육은 하지 않았다.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은 시기.

공화정 말기(기원전1세기)에 등장한 문법학교는 사립 중등기관이나, 정부의 보조가 있어 발전했으며, 고등교육을 위한 예비기관으로 7자유과 즉 3학(문학, 수사학, 논리학), 4과(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가르쳤다.

문법학교에서 7자유과를 통해 예비교양을 쌓은 학생들은 고등교육 기관인 수사학교,법률학교,철학학교에 갈수 있었다.

수사학교를 수료하면 법률학교, 철학학교에 갈 수 있었다.

 

※로마시대에는 교리문답학교라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생긴 학교가 있었다. 교리 문답학교를 통해 기독교가 처음으로 문화속에 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그리스 과학과 철학을 기독교 교리에 포함시켰다.

 

2. 중세 시대의 교육

서양 중세는 크리스트교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교육도 마찬가지. 신태식교육학책의 서양 중세 교육은 좀 구성이 대충대충(?)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교회교육(수도원, 교회 학교, 스콜라 철학)과 세속 교육(기사도, 도제교육, 시민학교, 대학)으로 나뉘어 놓은 전태련교육학책 구성이 합리적인듯 생각된다. 그래서 나도 교회교육과 세속교육으로 나눠서 생각을~ 그런데 세속 교육도 기독교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염두해 두어야 될듯. 핵심 이데올로기인 기독교에 기반해 나눠진 구조로 생각하면 될 것같다. 그리고 세속 교육은 계급, 계층(?)의 특성을 중심으로 이해하면 될듯.

 

(1)기독교 교육과 학교

기독교 교육은 원죄설에 입각해 성악설의 입장을 취하기 떄문에 내세에 천국을 가기위해 현세의 고통과 금욕을 경험해야 할 운수도원은 명적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도 영혼구원 내세 영생이며, 금욕주의를 통해 원죄를 벗어나고, 봉사하는 인간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중세의 교회 학교는 문답학교과 문답학교의 교사를 키우는 고급문답학교와 각 교구의 본산에 딸린 본산 학교가 있다. 셋 다 전도와 함께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인데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

또한 수도원 학교가 설립되었다. 수도원은 원래 수도사들의 공동 집단소로 기독교 정신에 의해 신앙, 금욕, 은둔생활을 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7~10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종교개혁에 이를때까지 서유럽에서 중요한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다. 보통 수도원 내에 설치되며, 수도사의 양성을 위한 기관이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반 자제들의 교육도 담당하게 된다. 교육 내용으로는 3학4과(7자유과)를 가르치며, 명상과 사색, 침묵이 강조되고 문답법식 교육을 실시했다.

수도원은 중세문화를 보존하고 스콜라 철학의 발달에 기여했으며 중세대학의 발전에도 공헌했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수도원은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는데 이를 통해 농경, 목공, 야금, 직물 등의 노동의 기술 전수와 많은 필사로 고대 문화도 보존했다.

 

(2)스콜라 철학

기독교와 연관된 것인데 중요성이 있기 때문에 따로 다루는게 좋을듯.

스콜라 철학은 십자군전쟁으로 교회의 권위가 큰 손상을 입자 교회의 교리에 대한 민중의 비판적인 회의가 생겨나게 되었다.(교회의 권위 하락) 특히 십자군 전쟁으로 동서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져 유럽의 지성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촉매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우위성을 확보하고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학문적 움직임을 일으켰고 이러한 결과의 산물이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은 기존 독단적 신앙을 합리적 신앙으로 전환시켜 신앙적 권위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논리학의 선구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무기로 교회교리를 변증하려 했다. 즉 신을 이론으로도 증명하려는 입장. 결국 이론에 의해 신앙을 옹호하고 철학에 의해 교회를 옹호하고 논리에 의해 이단을 없애는 것.

특히 예정설, 삼위일체설, 자유의지문제 등의 교리를 철학적인 명제로 환원해 조화로운 체계를 이루고 정통적 교회의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에 해답을 제공하고 비정통적인 해석을 논박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을 촉발시켰다.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의 실재론(Realism)은 기독교인은 신앙을 통해서 지식으로 나아가지 지식을 신앙에 나아가면 안된다(신앙이 지식에 앞선다)고 했고, 오컴 등은 유명론(Nominalism)은 일반적 관념은 이름뿐이고, 개별적인 사물이 실재라는 주장이다.(이름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가 있다는 것, 실재론과 반대되는 내용) 문제는 일단 신은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이다.

 

스콜라 철학의 교육 목적은 신앙의 정당성을 지지하기 위한 이성적 능력의 계발과 기독교적 지식의 체계화이며, 교육은 단순한 믿음의 주입에서 지적인 훈련으로 성격이 바뀌었으며, 논쟁력의 개발과 지식체계의 숙달에 중점을 두었다.

교육내용은 과목에 대한 지식을 즐겼을 뿐 아니라 비판, 검토, 분석이다. 그리스 철학이 교육내용에 포함되었으며, 종교철학과 신학 및 변증법적 훈련이 부과되었다.

교육방법으로는 교과서에 대한 주해와 용어의 해설, 논리적 사고의 훈련을 위한 문답과 토론,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논리적 반박의 훈련을 통한 연역적 사고와 삼단논법을 포함한 변증법적 훈련을 받았다.

 

스콜라 철학은 수도원주의의 도덕적 정서적 도야 위주의 교육에서 스콜라주의의 지적 도야로 교육을 전환시켰으며, 교육의 실제가 급진적인 지적 교육, 지적 도야로 전환되어 문예부흥의 동기를 형성하고 이것이 인문주의 교육으로 16,17세기에는 실학주의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스콜라 철학의 지적 특성은 중세 대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3)기사 교육, 도제 교육

기사 교육은 생활중심 교육, 실천중심 교육이며, 도제교육은 생활 속에서 특정한 직업에 대한 기술을 배우고 직업인으로 발달해 나가는 교육이다. 이 둘은 대표적인 세속 교육이며 생활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교육이다.

 

기사는 원래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도처럼 젠틀하고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 원래의 기사는 야만적이고 싸움을 일삼고 거칠은 사람들이었는데 교회는 기사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생산층인 농노보호를 위해 노력했고, 일요일을 신의 평화로 지정해 전쟁중에도 일요일에 쉬게 하는 법을 만드는 등 노력 끝에 12~13경에 기사들의 행동규범인 기사도가 확립되었다.

즉 기사교육은 봉건영주에게 봉사하고 교회를 지키고 약자를 돕고 부인을 존경하는 기독교적 무사의 양성을 목표로 한다. 용기, 충성, 명예, 관용 등의과 예절, 공손, 자비 등의 미덕이 요구되었다. 기사교육도 가정교육, 시동시기, 종자단계를 거쳐 기사입문식을 통해 기사가 입문되는 커리큘럼이 있었다.

 

도제교육은 중세 후기 자유도시가 생기고 조합이 발달하면서 직업에 종사하는 기술도 단순히 개별적 전승이 아니라 조합에서 규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습독하도록 제도화 된것에서 기인한다. (길드의 폐쇄적 교육)

따라서 수공업 분야의 전문적인 직업인의 육성에 두는 전문교육이며, 도제(7년), 직인(3~5년), 장인의 과정을 거쳐 장인이 된다. 도제교육은 중세에 있어 직업교육과 기술 발전에 공헌했으며 근대학교의 체계적인 직업교육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쁘게 말하면 자본주의, 산업혁명기에 보면 후진적인 교육(?)인데도 계속 되었다는 것.)

 

(4)시민교육을 위한 학교[각주:1]

도제교육과 비슷하게 십자군 전쟁 이후 상공업의 발달로 신흥 시민계급이 형성되고 신흥 상업도시가 발달되었다. 이러한 시민계급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합을 이루어 행했는데 상인조합과 기술조합 등 두 가지 형태의 조합이 있었다.

시민학교의 형태는 상류층 자제를 위한 학교와 하류층 자제를 위한 학교로 나누어 설립되었다. 상류층을 위한 학교는 중등학교로 발전되었으며, 하류층을 위한 학교는 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상류층 학교는 라틴어 학교와 공증학교가 대표적이며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하류층을 위한 학교는 조합학교, 독일어 학교, 습자학교 등이 있는데 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5)대학(university, colleage)

 

어원: university는 본래 뜻은 전체라는 뜻이지만 중세에는 도시의 사회나 조합에 적용되었다. 유니버시티는 교수와 학생의 조합리나는 뜻. college는 학생들의 합숙소였으나 학생들을 같은 곳에 모아놓은게 교수에 효과적임을 알게되자 하나의 교수단위로 발전해 단과대학이 되었다.

 

배경: 십자군 원정의 과정에서 생긴 소아시아 지역의 문화 유입과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도시의 발생과 성장은 중세 유럽에 새로운 학문적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 가운데 12세기초 몇몇 도시에서 의학, 법률학, 산학 등 특수한 분야의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가 명성을 얻게 되어 많은 수의 학생이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전개: 이렇게 형성된 대학은 교사와 학생의 안전을 보장하는 통치기구를 갖추 영구적 기관으로 조직을 갖추었으며(조합의 형성), 시 당국과 교회로부터 독자적 권위를 인정 받았다.(법인단체의 성격) 대학과 도시 자치권에 대한 연관성은 도시의 성장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중세 대학의 자치권은 역설적이게 대학 주변을 범죄자 소굴로 만들기도 했다.

이탈리아와 남부프랑스의 대학은 볼로냐(법학으로 유명 로마가 법으로 유명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될듯)대학의 모범을 따랐다.

북부 유럽은 교회에 대한 공부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프랑스의 파리대학은 신학으로 유명했다.

특권: 대학은 병역, 복역, 세금 면제. 치외법적권인 특권, 학위 수여와 교사자격증 수여 보장, 자유여행, 자치권 등이 인정되었다.

 

교육내용과 방법: 대학교수와 교사 양성이었으며, 기능과 역할은 연구보다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교육내용으로 라틴어, 희랍어포함 7자유과와 법학 신학 의학 등 대학의 특성에 맞는 과목을 교수했으며 강의를 통한 필기와 토론이 주된 방법이고 커리는 4~7년,8년으로 짜여져 있었다.

 

영향: 자치권의 보장으로 언론 자유의 토대, 고전 문화의 계승, 문예부흥운동(르네상스)의 선구자적 역할의 의미를 갖는다.

 

 

  1. 신태식 교육학논술책에는 문자학교와 문법학교 수사학교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뭔가 좀 설명이 부실하다. 그리고 시기가 뒤에 나오는 라틴어 학교, 공증학교 등하고 차이가 나는데 연관성을 설명 안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힘들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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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교육학/논제2013. 4. 21.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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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사상가 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대표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일단 이들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 등장했으므로 아테네 후기의 교육경향을 따랏다고 파악하면 된다. 후기에는 실용적 학문과 학문을 위한 학문 공부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의 실용적 학문은 소피스트들의 사상으로 보면 되겠다 후자의 학문을 위한 공부는 나머지 철학자들의 사상에서 읽어내면 되겠다.

 

 

1.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교육 사상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알면 좋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는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가 번영을 구가하던 BC4세기경이었으며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지배 계급인 귀족계급의 입장을 대변했다. 새로운 신흥계급의 출현으로 반 민주적인 귀족계급이 수세에 몰리는 시대에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진리를 강조하며 윤리적 기초를 다지려고 했다.

 

(1)철학적 관점

①지덕합일설: 간단하게 지와 덕이 하나라는 말. 선한 행위는 선의 본질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다. ( 덕이 지식이다.) 지와 덕의 속성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논했는데 단순한 선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려는 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행위가 선이라고 보았으며(그러한 맥락에서 너 자신을 알라), 덕은 가르칠수 있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②지행합일설: 누구든 진리를 알게되면 악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고 보고 보편적 진리를 인식하면  필연적으로 도덕적 실천을 하게 되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을 선하게 하려면 인간을 지혜롭게 해야 한다는 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도덕적 삶으로 이어진다면 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며, 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덕은 지식에서 비롯된다. 진리는 실천과 연결된다. 비슷한 명제 같으면서도 엄연히 다르다. 근데 소크라테스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이해하면 여기까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듯)

 

(2)교육관

①인간관: 인간은 원래 보편적인 진리의 싹을 내심에 지니고 있으며,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다.

②교육의 본질: 그러므로 학습자 안에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이 능력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으며, 갖지 못했던 지식을 밖에서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다.

③교육목적: 당연히 인간 개개인의 영혼에 잠자고 있는 분별력과 진리를 인식하게 하여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 도덕적 삶에 이르게 하는 도덕적 인간 형성이다.

④교육방법: 반어법(반문법), 산파술(산파술, 조산술)이 있다. 반어법은 상대방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 명료하지 못하고, 그들의 주장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인데 이를 통해 상대는 무의식적인 무지를 의식적인 무지로 이끌어 준다. 산파술은 상대방이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이나 지식을 토대로 보다 정확한 개념정의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다. 이때 논리적 추론과정(산파술)에 의해 획득되는 지식,진리는 타인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대화자의 내부에서 싹트는 것이다.

 

(3)소크라테스의 한계

소크라테스는 선에  관한 지식이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선의 본질의 관한 이해가 실천을 떠나서 생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선을 실행하는데 지식의 연마 뿐만 아니라 좋은 습관의 훈련이 다소간 필요하다는 사실도 간과했다.[각주:1]

 

 

2.플라톤

플라톤은 아테네의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그가 태어난 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한지 5년이 지난 쯤이었다. 어머니는 솔론의 친척이었으며 나중에 페리클레스의 가까운 사이인 퓌리람페스와 결혼할 정도로 명망있는 귀족집안이었다.

20세에 소크라테스 를 만나 큰 영향을 받게 되는데 28세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겪고 현실 정치에 대한 생각을 접고 철학에 몰두했다고 한다. (플라톤 철학의 문제 의식의 원인을 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후 여행을 하다 42세에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미아를 만들고 강의를 했다.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 사회적 혼란 등을 겪은 아테네를 최강의 폴리스로 만들려는 동기의 저술과 교육활동을 했다.

플라톤의  대표저서로 국가론이 있는데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훌륭한 특징을 종합하여 정의를 이념으로 하는 이상국가가 어떻게 창출될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국가론에서 교육의 목적, 내용, 방법 및 제도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1)플라톤의 사상

①관념론: 플라톤의 철학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계와 현상계로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데아계는 이성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는 초경험의 세계로 만물의 이데아가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는 영원불멸의 완전한 세계이고, 현상계는 이데아를 모사한 경험의 세계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완전한 세계이다. 플라톤은 진리가 현상계가 아닌 이데아계에 세계에 실재한다고 보았다.

 

②이데아에 이르는 과정(분선이론)

허상의 단계: 사다리의 바닥에서 동굴의 비유에서 죄수가 동굴 맨 안쪽에 묶여 있는 상태.

통념의 단계: 노력을 기울이는 단계로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고 인습적 가치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올바른 믿음은 가지고 있으나 믿음을 구체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사고의 단계: 논증적 사고를 할 수 있고 논리와 추론을 통해 정당화 할 수 있다. 과학, 수학, 기하학을 탐구함으로써 추상적 보편적 개념을 깨우친다.

철학의 단계: 표 면적인 겉모습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이데아계로 들어서는 단계로 구조 전체를 이해하고 지각함으로써 결론 자체를 파악할 수 있다. 변증법적 대화술을 통해 정의와 같은 개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단계이다.

③인간관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욕망, 기개, 이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이 절제, 용기, 지혜의 덕을 갖추고 지혜에 의해 조화롭게 이루어지면 정의의 덕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욕망은 인간의 행위를 이끌어 가는 감각과 육체적 욕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절제의 덕으로 조절된다.

기개는 자기를 주장하고 표현하는 의지와 의지가 발휘되는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용기의 덕으로 조절된다.

이성은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이해하는 기능으로 덕으로 조절된다.

 

또한 플라톤은 모든 인간이 영혼에 이데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순간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적  힘이 인간의 지성 및 도덕성에 영향을 미치기 떄문에 영혼의 특성에 따라 해야할 일이 정해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할에 따라 생산자, 전사, 철인계급이 형성된다.

 

④이상국가

플라톤은 위에 설명했듯이 국가론에서 이상적인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국가는 인간의 확대판으로 인간의 영혼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국가를 구성하는 계급 또한 생산자, 전사, 철인이라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각 계급 별로 절제, 용기 지혜가 발현해 통치자에 의해 구성원이 조화롭게 되는 국가이다.

(2)플라톤의 교육적 관점

플라톤은 교육의 기능이 개인적 차원으로는 한 개인의 욕구와 의지와 이성을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일이며, 국가적 차원에서는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발견하고 알맞은 덕을 길러 국가의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목적을 진선미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데아 세계의 실현을 위한 유능한 시민의 육성에 두었다. 이를 통해 국가를 이루고 있는 계급들의 영혼을 개선하여 국가가 요구하는 계급별 덕을 실현해 영혼 속에 지식을 넣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상기설을 주장했다. 지식을 넣는 것이 아닌 이미 영혼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도달하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다. 즉 대화를 통한 자극의 방법, 점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3)국가론의 교육

국가론은 이상국가의 실현에 대해 논한 저서이며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한 교육제도에 대한 설명도 있다.

플라톤은 철인, 전사, 생산자 계급별로 교육을 따로 실시하는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유전적 요인에 따른 알맞은 자기 위치에 맞는 곳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자는 따로 교육을 할 필요가 없으며, 전사는 군복무와 하위직무. 통치계급은 국가의 수호자가 (철인왕)될 능력이 있도록 키우는 것이다.

철인왕의 교육단계로는 신체 단련과 덕성 함양, 산술기하등의 교과교육으로 이루어지는 기초 교육(음악, 체육 등 품성도야 주장), 2년간의 군사 교육, 20세부터 10년간의 수학등 7자유과 교육, 5년간의 변증법과 철학교육, 행정실무 활동의 참여 순서로 이루어진다.

 

(4)교육적 의의와 한계

국가주의 교육사상은 국민들은 스스로 학습할 능력이 없으므로 국민을 교육할 권리가 국가의 귀속된다고 했다. 이는 서구최초의 체계적 공교육 주장이다. 또한 인간 본성의 3요소는 이성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해 이성의 도야를 중시하는 지의적 자유교육의 토대를 마련했고, 여성교육을 허용해 최초의 여성교육 옹호자가 되었다.

ㅇ그러나 지나치게 국가교육을 주장하고 서민교육의 불필요성과 소수 엘ㄹ트 위주의 교육은 현대교육의 기회균등사상에 배치된다. 

 

 

3.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사상

아리스토 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의 의사이며 플라톤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50세가 되던 해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학원을 세워 제자를 길렀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로 부르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정치학과 윤리학에서 나타나 있다.

 

(1)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실재론: 아리스토텔레스는 개개의 사물과 분리되어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내재하고 있다는 실재론을 내세웠다. 이는 스승이 플라톤의 사상과는 차이가 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완전한 유물론자는 아니었고 관념론과 실재론의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사물관: 모든 사물은 지니고 있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존재이다. 인간과 동물은 (만물)은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내부에 자기존재의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에 존재 의의가 있다.

 

연구방법: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감각기관을 통해 정확하게 지각하고 지적 능력으로 사물에 내재하는 법칙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법칙- 자연과학적 연구방법)

 

(2)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관

①교육목적: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이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일차적 목표) 본성, 습관, 이성이 필요하다. 본성은 습관을 통해 통제되거나 소용없게 되어 좋거나 나쁜성향으로 바뀐다. 교육목적은 이성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덕적 습관을 훈련시키고 이성적 능력을 계발해 절제와 용기와 관용을 갖춘 훌륭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 국가주의 교육)

아리스토텔레스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이성을 훈련해 사물의 본질을 관조하는 최상의 행복을 맛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교육은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노예가 아닌 자유민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자유교육'이라 불렀다.

 

 

②교육내용: 개인의 발달은 신체교육, 인격교육, 지력교육이 필요하다. 인격교육은  습관을 형성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음악을 통해 고상하고 좋은 것을 사랑하고 천박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는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유인의 이성교육을 도야시켜 줄 수 있는 교양교과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실용교육은 경시)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정치적 기능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을 고양하는 일이라는 넓은 개념으로 바꿔어 놓았다.

 

(3)교육적 의의와 한계점

①교육적 의의

자유교육 강조: 실용적 목적이 아닌 진리나 지식 그자체를 위해 추구하는 것은 자유교육의 토대가 되었다.(교육관의 변화)

국가주의 교육: 모든 시민은 국가에 소속되어 있는 존재이므로 이들을 다루는 교육 또한 국가의 관심하에 관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논리학 창시 :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 이상론에 비판을 가하면서 변증법적, 객관적, 과학적 방법을 주장했다. 이것은 스콜라 철학과 초기 실학주의에 영향을 주었으며, 사유의 법칙을 분석하여 전통적인 논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②한계

직업과 서민교육 경시: 교육이론에 비민주적인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성에 도야에 필요하지 않은 직업교육과 서민계급의 교육을 무시했다.

남녀차별: 남성은 선천적으로 우월하며 여성은 열등하다. 남녀의 관계는 마치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같다라고 주장했다.

 

 

4.소피스트의 교육사상

페르시아 전쟁 승리 후 아테네 민주정치가 활성화 되는데 이 과정에서 대중을 매혹시키는 탁월한 웅변술의 필요성이 부가되었다. 이를위해 수사학과 정치학에 교육을 담당한 이들이 소피스트 들이다.

(1)소피스트의 의미

sophist의 원뜻은 智者라는 뜻인데 아테네에서 다르게 사용되어 직업적인 교사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소피스트들은 대부분 아테네인이 아니었으며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대표적으로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이소크라테스 등이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수학자이며 신비적 종교관을 세워 영혼윤회설을 주장하고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를 주장했다 . 인간척도설은 자기에게 유리한 변론 능력에 초점을 맞추었고, 진리나 도덕 기준에 대해 상대주의적이었다.

 

(2)소피스트의 기본 입장

①상대적 진리관 :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절대지식을 부정하고 진리는 인간의 주관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했다.

②개인주의: 주관주의적 입장을 가진 그들은 공동체의 생활에 반대하고 개인주의를 지향했다.

③실용주의: 교육을 단순한 진리 탐구가 아니라 개인의 출세를 위한 방편, 실생활의 준비를 위한 것으로 보았다.

 

(3)교육관

①교육목적: 보편적 진리 탐구가 아닌, 유용한 지식(웅변술,정치학)을 익혀 출세하는데 두었다. 따라서 교육을 법정에서 유리한 증언을 하거나 설득시키는 기술 등으로 규정했다.

②교육내용: 웅변술에 필요한 수사학, 논리학, 문법이 주된 내용이며, 문법,수학,변증법,역사,물리학,시사문제 등을 가르쳤다 이는 7자유과목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③교육방법: 토론과 분석, 연습과 모방을 중시했다.

 

(4)교육사적 의의

소피스트들은 최초의 직업 교사로 가르치는 것을 하나의 기술로 본 최초의 사람들이며, 가르치는 기술 교수방법에 대해 진지한 사고와 실천을 했던 사람들이다. (요즘도 이런거 많던데.. art 스피치 art 인문학..) 또한 교육을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풍조가 형성되었다.

인간척도설은 진리나 윤리의 기준에 회의를 갖게 하고 도덕을 무시하는 풍조를 나았으나 비판정신을 길러주었다.

또한 소피스트들의 실용주의적인 교육관은 지식을 사회적 유용성에 의해 판단하고자 하는 사상은 19세기 말 실용주의를 거쳐 진보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피스트의 교육사상은 일단 소피스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나누어 차이점을 파악한 후에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점을 알아두어야 할 듯함. 소피스트의 가장 큰 특징은 교육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대적 배경에 따라 순수학문보다 입신양명이 추구되는 사회풍토를 반영한다. 이에 반해 소-플-아는 어느정도 유전적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당연히 이 시대에 유전적 영향을 인정하는 것은 신분제 사회를 인정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세명의 철학은 지배계급 위주의 철학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명 모두 인간의 본성이 원래 내재되어 있다는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플라톤의 내재되어 있는 이데아에 도달하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의 도야를 통한 최상의 행복을 맛보는 교육관을 제시했다. 플라톤은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철학을 제시한 인물로 이데아와 현상계 개념을 제시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애매하긴 하지만 실재적인, 사물의 본질과 사물의 일원론적 입장을 내세웠다는게 차이점.

  1. 이에 대해 오랫동안 스파르타에서 용병 생활을 했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와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선이 특정한 종류의 일을 잘 수행하는 것, 그리고 선의 기초는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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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세계사토픽2013. 4. 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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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이슬람 무역 상인들의 활동 범위에 포함되어 알려졌던 중세 아프리카도 신항로 개척으로 본격적으로 유럽인들에게 탐험되기 시작한다. 비록 신항로 개척을 위한 뱃길 위주의 탐험이지만 이때부터 유럽인들이 무력으로 아프리카에 다가서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1.신항로 개척

15세기 무터 활발하게 전개된 신항로의 개척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각주:1]

(1)신항로 개척의 배경 

신항로가 개척되게 된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동서 문명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비단과 향신료로 대표되는 동양과의 무역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동양에 대한 유럽인의 호기심을자극했다. 동방의 크리스트교국 존 프레스터의 전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각주:2] 그러나 이 시기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서 오스만제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점도 유럽인이 직접적인 항로를 탐험하게 된 원인중에 하나다. [각주:3]

기술적인 발전도 신항로 개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나침반이 전래되고, 천문학과, 지리학[각주:4]이 발달하고 조선술[각주:5]의 발달로 원거리 항해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화기의 발달과 이를 이용한 해전에서 화포사용은 유럽인의 해외진출을 용이하게 했다.

특히 이러한 중계 무역권에서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신항로를 개척에 뛰어들었다. 이 두 국가는 이슬람과의 다툼에서 왕권(1479년 에스파냐 왕국 성립)을 강화해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계무역에 소외된 지리적 위치가 오히려 대서양 방면의 진출로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배경이 있다.

(2)신항로 개척의 전개

신항로 개척에 앞장 선 사람은 항해왕자로 불리는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1394~1460)였다. 엔리케 왕자는 1420년부터 과학적 탐험대를 정기적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441년 보아도르 압(카나리아 제도 근처에 있는건가? 헷갈림)을 발견하고 이후 시에라 레오네에 도달했다(1462) 1471년에는 적도를 넘었으나 해안선이 남으로 구부러져 실망했다. 이후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탐험이 일시중단되었따.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1487년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인 희망봉을 발견했다. 그는 심한 폭풍우 끝에 이 압을 발견했으나 디아스의 보고를 들은 국왕은 희망봉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콜럼버스가 죽을때까지 인도라고 믿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1492) 그렇지만 포르투갈 왕실은 그것이 인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1498년 캘리컷에 도착한다. 항해동안 2년이 넘는 기간, 3분의1이상의 선원 사망, 300일 연속의 해상 생활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60배 이상의 이윤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무장병력의 파견이 시작되었다. 1500년 포르투갈은 상선대를 파견하고 1502년 바스코 다 가마를 다시 파견해 캘리컷에 무장사격을 가하고 아랍상인들의 함대를 해상에서 격파하는 등 이슬람상인을 배제하고 향료무역에서 우위를 독점하기를 원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전면적인 점령이 아닌 무역거점과 군사기지를 설치하는데 집중했는데 불필요한 마찰과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왕실의 지원을 받아 1492년 8월 바하마 제도에 도착했다. 이후 3회에 걸쳐 항해를 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는 대서양항로의 탐험을 자극했다.

영국의 존 캐보트(발음은 캐벗이라고 하던것 같았는데, 교과서같은데 캐보트라고 나오네)1496년 헨리7세의 후원으로 캐나다를 발견했고,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아메리카 대륙이 신대륙임을 발표했다.

교황 알렉산더 2세는 베르데제도의 서쪽 500km해상에 경계선을 설정하고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한다고 했으나 포르투갈이 1300km 서쪽으로 경계선을 이동시키는 토르데실라스조약이 체결되었다.(1494) 이후 1529년 사라고사 조약으로 에스파냐는 몰루카제도의 권리를 포르투갈에게 팔아 넘기고 양국의 경계선을 몰루카제도 동방 17도선으로 정하는 조약이 있었다. 즉 기존의 토르데실라스 조약이 베르데제도 1300km지점의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마젤란에 의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되자 그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따라서 몰루카제도 동방 17도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에스파냐령, 서쪽은 포르투갈령이 되는것.

 

시간이 흘러 마젤란은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을 횡단해 에스파냐로 돌아왔다(1522) 1519년에 출발해 3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3)신항로 개척의 결과

신항로 개척으로 가장 큰 영향은 세계적 교역망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유럽-오스만-아시아 의 구조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까지 아우르는 무역망이 연결되었다. 특히 세계적인 화폐로 은의 사용이 확대되었는데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은이 유럽으로 이동하고 다시 중국으로 은이 이동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교역망의 형성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가격 혁명과 상업 혁명이 일어났다.

아메리카의 막대한 금은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로인해 물가가2~3배로 치솟는 가격 혁명이 일어났으며, 가격혁명으로 인해 지대에 의존하는 지주와 임금노동자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반대로 상인과 금융업자, 농노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고 이는 금융업이 발달을 촉진했다. 어음 교환을 통해 현금을 휴대하지 않고 원거리 무역을 하거나, 자본이 없는 상인도 투자자로부터 돈을 빌려 해왜 진출에 뛰어들게 했다. 결과적으로 근대적 기업 형태의 주식회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은 부와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상업 혁명은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의 상업 자본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나타난 상업활동의 변화를 말한다. 상업혁명으로 유럽의 상업 자본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까지 확대되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아메리카의 은을 아시아에 판매했고, 영국의 동인도 회사도 은을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은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시장의 출현과 함께 세계적인 자본주의체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토양이 되었으며 시민계급(중산계급)이 자라게 했다.

유럽인의 생활도 많은 부분 변화했다. 차와 면직물, 감자와 옥수수, 고추, 담배 등이 들어와 일상생활에 자리잡게 되었다. 반대로 유럽에서 소와 말 커피와 사탕수수가 아메리카에 전해졌다. 아프리카에서도 금과 상아 뿐만 아니라 흑상아로 불리는 노예가 많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기호의 변화는 무역의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인의 아메리카 침략과 노예 무역이 형성되는 등 부정적인 일도 자행되었다. 에스파냐 인과 포르투갈인들의 침략으로 토착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매독, 천연두같은 질병이 옮겨졌으며 식민지화로 많은 수탈을 당했다.

 

2.노예무역

항로 개척으로 대서양 교역은 17세기 삼각 무역을 발전시켰다. 유럽에서 설탕과 담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아메리카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과 담배 농장에(대농장 경영) 노동력이 필요했고, 광산의 개발또한 노동력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그래서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노예 무역에 참여하여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묶는 삼각 무역이 전개되었다. 노예 무역은 8세기 중반 이슬람 상인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본격적인 것은 신항로 개척 이후의 일이다.

삼각 무역의 형태는 유럽에서 일용품(공산품), 무기 등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 노예와 교환한 후 아메리카에 가서 파는 것이며 아메리카에서 노예를 팔고 설탕과 담배 등을 사고 유럽으로 돌아와 파는 것이다. 특히 영구이 삼각무역의 덕을 봤는데 영국은 삼각무역을 통해 공업을 발전시켰다.

아메리카에 팔려간 노예는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인간적 존재가 아닌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아메리카에서 만들어진 흑인법(1685)에는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고, 주인의 마음대로 처벌할수 있으며, 주인의 동의없이 결혼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해방되는 노예는 극소수였다.

아메리카에 팔려간 노예는 부두교와 같은 토속 종교, 브레이크 댄스, 블루스, 소울, 재즈 등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그림 1,2 신항로 개척 이후 무역의 형태. 똑같은 내용을 표시하고 있다. 기억해야 될건 신항로 개척으로 오스만의 중개무역이 사라지고 유럽이 아시아와 직접 교역을 했다는 것, 그리고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의 삼각 무역이다. 특히 아시아로 꾸준히 은이 유입되는데 이는 중국의 무역 태도 및 유럽상품에 비해 아시아 상품들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림 3 노예 무역 노예 무역이 17세기에 증가하기 시작해 18세기에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1은 금성, 2는,3은 천재)

 

노예무역은 19세기에 들어오자 자유와 민권 사상에 눈을 뜬 유럽인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이후 덴마크(1805), 영국(1807), 프랑스(1818)순으로 노예 무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사람들은 비밀리에 노예 무역을 계속 하였고, 영국(1833),프랑스(1848)의 뒤를 이어 노예 노동에 의존하던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도 186~1880년 사이에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1. 대항해시대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오늘날의 젊은세대들은 일본코에이사의 게임인 대항해시대덕분에 대중화가 되어 더더욱 그렇게 느낄수도 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는 오리엔탈리즘적인 느낌이 나기 때문에 좀더 중립적인 대 발견 시대, 대 탐험 시대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본문으로]
  2. 바스코 다 가마는 신항로 개척의 이유를 '향신료와 크리스트교인'이라고 했다. 이는 존 프레스터 전설에 기인한 말인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이슬람과의 싸움과정을 통해 성장한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봐서 동방에서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 이슬람을 타도하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민석홍의 서양사개론에는 오스만의 무역 독점이 신항로개척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엔 무리가 있다고 서술했는데 교과서에는 주요하게 서술했으므로 패스.ㅋㅋ [본문으로]
  4.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개론과 지리학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대탐험시대로 부정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항구에는 전문적 해도학자들이 있었다. [본문으로]
  5. 삼각돛의 도입, 마스트 숫자의 증가, 카라벨선의 등장과 동시에 함에 대포를 장착함으로써 해양전술까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배들의 배수량은 230톤정도밖에 안되는 등 생각보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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