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논제2013. 4. 2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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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주의 자체는 크게 잘 다뤄지지 않는 것 같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반발이라는 흐름에서 나타나는 특징과 함께 로크와 코메니우스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될듯.

 

1.실학주의의 의미

실학주의는 르네상스기 이후에 나온 서양의 형식적 언어주의(키케로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교육운동을 의미한다. 관념보다 사물을 중시하며, 고전문학보다 자연과학적인 사물교과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근대 자연과학에 토대를 둔 실학주의는 사물과의 직접적 접촉(경험)과 이성에 바탕을 둔 전통을 지식 획득의 중요한 방법으로 확립시켰다.

 

2.실학주의의 대두배경

따라서 실학주의의 배경에 대해서 크게 과학의 발달과 르네상스기 형식적 언어주의에 대한 반발을 꼽을 수 있다.

①과학의 발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천문학적 발견, 지리상의 발견으로 세계관이 변화했으며 자연과학의 방법이 경험과 이성에 바탕을 둔 관찰, 즉 공리공론의 연역적 방법에서 관찰과 실험에 기초한 귀납적 방법으로 전환되었다.

②형식적 인문의주의 극복

인문주의는 형식적으로 변질되 고전의 무조건적 모방, 암기 및 교조주의적 성향, 심미적인 점에만 치중하는 점을 보였는데 이러한 형식적 인문주의에 대한 극복과 인간양심과 현실생활 및 대중교육 등에 일부 공헌했지만 형식적으로 치우치고 종교적 도덕적 완성에만 중점을 둔 종교개혁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3.실학주의의 성격

실학주의는 관념보다 사물을, 고전문학보다 자연과학적인 사물교과를 중요시하는 기본적인 성격을 가진다.

①실질도야 강조

실용성 있는 지식과 실제적인 직업 기술 및 과학적 연구방법을 중시하고,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지시을 통한 실질도야를 강조했다.

②교육목적

실생활에 유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합리적 인간양성을 목표로 하고 실용성, 실천성, 구체적인 지식, 직업에 필요한 기술 습득에 중점을 두었다.

③교육내용

지식의 실용적 가치를 중요시해 백과전서식으로 다양하고 많은 지식을 다룰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교과목 수를 25~30개 까지 만들고 교과과정을 구성했다.

④교육방법

관념적 사고방식보다 사물에 대한 직접적 사고방식을 중시하고, 고전이나 고전문학보다 사회생활이나 자연과학적 교과를 중시했다. 따라서 직관교육,실물교육, 실험, 여행, 시청각 방법등을 사용했으며 다양한 교구를 사용했다.

 

4.실학주의의 교육 유형

실학주의의 교육 유형으로는 인문적 실학주의, 사회적 실학주의, 감각적 실학주의가 있다.

①인문적 실학주의

대표적 학자로 라블레, 밀턴, 비베스가 있다. 이들은 키케로주의처럼 극단적인 고전중시적 성향이 아니라 고전을 실생활에 이용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즉 고전의 가치를 인정하고 고전연구를 고전 자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실생활에 이용하기 위해 고전을 연구하는 것. 그러므로 고전에 능통한 인간보단 실제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유능한 인간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문적 실학주의는 교육적으로 크게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실학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감각적 실학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②사회적 실학주의

대표적 학자로 몽테뉴가 있다. 사회적 실학주의는 가장 큰 목표가 실제 사회생활에서의 원만한 인간관계이다. 그러므로 상류계급의 귀족과 공적 실무가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공적 생활에 바탕이 되는 신사적 품격과 세상보는 안목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신사가 되는 것이 교육목적.

따라서 자연과학을 위시해 체육, 역사, 철학, 여행등을 중요시하고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사교계 진출후 다양한 문화를 접촉할 것을 강조했다.

 

③감각적 실학주의

대표적으로 베이컨, 코메니우스 등의 학자가 있다.(로크는 사회적 실학주의, 감각적 실학주의의 영역에 다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감각적 실학주의는 실학주의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 기본적으로 감각적 지각을 기초로 한 교육을 강조한다.

감각적 실학주의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존중하고, 감각적 지각을 기초로 자연계의 현상을 인식, 확립하여 자연력과 자연법칙을 활용해 현실생활을 향상시키려는 교육사조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관한 지식으로 인간생활의 복지증진이 교육 목적이다.

고전어 대신에 다양한 백과전서식 교육내용을 제시했는데, 특히 모국어, 자연과학, 사회과학의 실제적인 면을 중요시했다.

감각적 실학주의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발달을 적용한 교육방법을 실현하려 했다.

자연에 질서에 근거한 합자연에 따라 교육을 하고자 했으며, 직관을 중시했는데 이는 과학,심리적인 토대 위에 감각적 직관을 통한 학습을 말한 것이다. 말보다 사물이라는 말처럼 사물과의 직접적 경험을 통해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언어보다 그림같은. )

과학의 영향에 따라 실험과 귀납법을 통한 학습을 강조했다. 경험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교육은 기억보다는 감각적 지각의 훈련에 기초해야 하며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에 영향을 받아 성립된 지식과 진리의 원천으로 자연현상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자 했다. 즉 실물이나 표본에 의한 학습방법을 강조했다.

 

4.실학주의의 교육적 영향

실학주의는 근대교육 개혁의 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초기 실학주의는 큰 영향력이 없었지만 후의 감각적 실학주의에서 나온 합자연의 원리는 루소의 자연주의로, 코메니우스의 직관 교수는 페스탈로치로 이어졌다. 또한 코메니우스의 실학주의 교육은 근대국민교육제도의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독일, 영국, 미국에서 실과학교가 발달하는 영향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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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역사/한문사료2013. 4. 24.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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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이후 교과서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7차교육과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이들 국가의 속성에 대해서 나오지는 않는데 이번 2009개정교과서는 부여, 고구려, 마한의 목지국을 연맹왕국으로 설명하고 있다.[각주:1]이들 각 나라에 대한 것은 중국의 여러 삼국지, 사기, 위서, 후한서 등등에도 나와있지만 교과서는 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인용하고 있는 듯.

초기국가의 특징은 국왕의 출현과 국가체제의 정비, 영토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래의 군장세력이 잔존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부여의 마가구가저가나 고구려의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등의 가에서 고추가를 형성했다는 것은 군장국가 중에서도 유력한 부족의 귀족이 우대되고 일반 군장과 구별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한통) 내용이 많으니 고구려는 다음번에 한꺼번에 봐봐야겠다.

1.부여

(1)영고

以殷正月祭天, ……(中略)……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中略)……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2)4조금법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男女淫 (..)皆殺之.

尤憎妒 已殺, 尸之國南山上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兄死妻嫂, 與匈奴同俗.

(3)부여의 위치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4)부여의 사회

方可二千里 戶八萬 其民土著 有宮室·倉庫·牢獄.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麤大, 性彊勇謹厚, 不寇鈔. 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豬加·狗加 大使·大使者·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大者主數千家, 小者數百家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부여의 건국 설화는 여러개가 있다. 북부여에 관한 설화, 동부여에 관한 설화. 북부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흘승골성(요서)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라고 했으며 그의 아들 부루가 동쪽으로 이동해 동부여를 세웠다는 것이다.

동부여에 관한 다른 설은 북부여왕 해부루의 신하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동해 해변가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우라고 하여 아란불이 왕에게 건의하여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동부여라고 칭했으며, 그후 금와가 뒤를 이었다는 것.

이를통해 부여가 요서 지방에 건국했다 동부여로 이동했다. 동부여는 지금의 장춘시 외곽지역을 말하는듯 북부여의 건국연대가 기원전1세기로 기록된 것은 이 무렵부터 부여가 강력한 왕국으로 등장한 것을 의미한다.

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병합될떄까지 1천년 역사와 전성기의 영토는 북으로 흑룡강 이남, 남으로 백두산에서 요하 상류, 동쪽으로 연해주, 3세기경 영토 사방 2천리 인구 8만호였다고 한다.

주변에 고구려,선비와 국경을 대고 있었다.

세습왕 아래에는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는데 저마다 행정 구역인 사출도를 다스렸다. 부여 초기에는 가들이 모인 평의회에서 주요 국사를 결정해 왕권이 약했으나 점점 왕권이 강화되었다.  

부여는 귀족인 가가 있고 그 밑에 호민으로 불리는 지배층이 있으며, 민과 하호로 불리는 천민층이 있었다.[각주:2] 왕이 죽으면 후하게 장사지냈으며,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고

매년 12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국가의 단합을 도모했다. 이때 국가중대사를 토의하기도 하고, 전쟁시 우제점을 치기도 했다.이 시기의 제천행사들은 국가적인 대행사로 군장국가의 제천행사가 국가적인 행사로 바뀐것을 나타낸다.

고조선의 8조 금법과 비슷한 4조 금법이 전해진다. 이를통해 부여는 엄벌주의, 가부장적 사회 및 사유재산, 노예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위략에는 고구려에도 부여와 같이 도둑질한 자는 12배 배상을 했다 했는데, 이러한 법률은 초기국가 시대 공통된 내용으로 짐작된다.

 

2.고구려

本有五族, 有涓奴部‧ ……(中略)…… 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中略)……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雛加. 涓奴部本國主, 今雖不爲王, 適統代人, 得稱古雛加, 亦得立宗廟, 祠靈星‧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加古雛之號. 諸大加亦自置使者‧皁衣‧先人, 名皆達於王, 如卿大夫之家臣, 會同坐起, 不得與王家使者‧皁衣先人同列.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3.옥저

(1)옥저의 위치와 주변국, 크기

東沃沮在高句麗 蓋馬大山之東, (..중략.)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2)골장제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 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䥶,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

 

(3)민며느리제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4)고구려에 복속되어 공물을 바치는 옥저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中略)…… 使相主領. 又使大加, ……(中略)…… 統責其租稅. 貊布‧魚‧鹽‧ ……(中略)…… 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 ……(中略)…… 以爲婢妾, 遇之如奴僕.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옥저는 함경남도 부근에 위치해 느슨한 연맹국가를 영위하고 있었다. 변방에 위치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었으나 큰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중 옥저현후 세력이 중심세력을 형성했다고 알려졌다.(위지동이전에 보면  불내, 여화, 옥저국이 한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현이 폐지되면서 각기 제후국이 되었는데 옥저현이 중심이 됐다고 알려짐)

 총 5천호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고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다. 이후 한사군 설치후 임둔군 지배하에 있다 낙랑군 밑으로 갔다가 고구려 태조왕 때 고구려에 복속되어 천리길을 걸어 공납으로 바쳤다고 전해진다.

옥저에는 어린 여자가 남편 집에 가서 살다 혼인하는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뼈를 추려서 가족무덤인 목관에 안치하는 풍습이 있었다.(골장제)

 

4.동예

(1)책화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中略)……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2)무천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3)전투에 능하며 단궁과 반어피, 과하마가 유명했다.

能步戰. 樂浪檀弓 出其地. 其海出班魚皮,又出果下馬, 漢 桓時獻之.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동예는 옥저와 같이 느슨한 연맹체국가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파악되며 읍락마다 장수가 읍군 삼로등이 지배했으며, 불내예후국이가장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해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명주 삼베, 단궁이라 불리는 활과 과하마라는 말, 그리고 반어피 등이 특산품이었다.

동예는 총2만호를 거느리는 비교적 큰 나라였으나 왕국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족외혼의 풍습과 각 부족의 구역이 구분되어 책화라는 부족 영역 보호책이 있었다. 동예에도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5.삼한

(1)삼한의 위치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中略)……

(2)마한의 사회정치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中略)…… 凡五十餘國. ……(中略)……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中略)……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中略)……

(3)하호의 존재 (고구려의 하호와 비교된다)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中略)……

(4)강력한 왕권의 부재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中略)……

(5)사회풍속, 기풍제와 시월제, 소도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毛本, 木, 作本, 誤.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진수가 위략을 참고하여 삼한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했는데 삼한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삼한은 예맥족이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등의 연맹왕국과 고대왕국을 건설해 갈때 한강 이남의 한족 사회에서도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에 기초하여 정치적 통합운동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辰국, 기원전 4세기경) 진국은 한나라와 직접 교역했다고도 전해지는데 위만조선의 성립으로 기존 고조선의 유이민이 한강 이남으로 유입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해 삼한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남쪽으로 와 한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삼한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한은 약 50여 개(54개)의 소국으로 이뤄졌고 10만여 호를 거느렸고 가장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고 전해진다. 진한과 변한에 속한 소국은 이보다 적었다.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개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소국은 마한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으로 불렸던 것처럼 왕의 호칭을 가진 존재가 다스리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장수가 통치하였다고 한다.

장수의 명칭은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마한에서는 세력이 강한 이들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고 불렀다.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에서는 이러한 장수에게 관(官)과 인수(印綬)를 주기도 하였는데, 간접적 통제를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한편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등의 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데, 일제강점기 경북 지역에서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이라 새겨진 도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장수 등에 의한 소국의 통치 체계는 “국읍(國邑)에 비록 주수(主帥)가 있더라도 읍락(邑落)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라는 것으로 미루어 그다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는 곧 삼한의 통치 질서가 완비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 체계적인 국가 상태로 발전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삼한 사회는 ‘왕’으로 표현된 존재를 정점으로 신지‧읍차 등의 장수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피지배층은 토착 생활을 하며 농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므로 삼한은 일반적인 농업 사회의 특성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후가 따뜻하고 저수지가 많아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해 벽골제, 의림지같은 저수지는 마한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농기구도 발전해 북방이주민에 의한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후 괭이, 보습, 낫, 호미 등 철제농기구가 만들어져 생산력이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의창 다호리의 무덤이 좋은 근거이다. 한편 변한지역의 철은  품질도 좋고 수량도 많이 나와 일본으로 수출도 하고 화폐로도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삼한의 피지배층과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바로 ‘하호(下戶)’이다.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하호가 복속민과 같은 존재로 기록되어 있고, 동예조에는 일반적인 피지배민을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한의 하호의 성격을 해명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한편, 삼한에서는 음력 5월에 씨를 뿌리고 10월 농사가 끝난 다음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료상에는 제사의 대상이 단지 ‘귀신’으로 되어 있지만, 이 제사 자체가 농사와 관련 있는 만큼, 이는 바로 ‘농업신’에게 올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 나서 군무를 추는데, 땅을 밟는 동작은 지신(地神)을 즐겁게 하고 땅의 생육력(生育力)을 높여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라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제사는 일종의 축제로 거행되어 구성원 간에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국읍 장수의 정치권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각 국읍에 천군(天君)이 있어 제사를 주관하고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두었다는 점은 삼한 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문제로 중요하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과 유사하므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솟대신앙) 소도를 복원해 보면 현재 서낭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도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이곳으로 도망 온 죄인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도에 죄인이 오면 잡을 수가 없었다는 말. 이는 소도가 신성한 특수 구역임을 말해 주는 동시에 삼한이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분리된 사회였음을 알려 준다. (제정분리사회)

이들은 읍락에 모여 살고, 초가로 지붕을 한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두레를 만들어 농사를 공동으로 짓는 등 공동체적 전통이 있었으며,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부장품을 넣는 풍습이 있었다. 이들의 무덤은 고인돌보다 진화된 움무덤(토광묘)와 돌덧널무덤(석곽묘)가 있었다.  무덤 뿐만 아니라 바위에도 그림을 새겨 자신들의 세계관을 담았다. 경북 고령 양전동 암각화, 언양 천전리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이들을 통해 삼한 사람들의 예술관은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그렸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1. 통론에서는 군장국가로 설명하고 있다. 신특,구특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초기국가를 각각 다루지 않고 바로 성립과정에 대해서 언급했다. (부체제로) [본문으로]
  2. 하호에 대해서 여러 논란이 있는데 교과서에서는 천민층으로 기술했고 한국통론은 씨족원의 후신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한 양인신분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그냥 천민과 양인의 논란이 있다고 표현한 책도 있다. 깊게 찾아보기 그러니. 교과서의 내용을 피지배층이라고 완곡하게 이해하는게 일단은 합리적일듯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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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
교육학/논제2013. 4. 2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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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의 교육도 소주제로 파고들면 내용이 굉장히 많은데 ㅡㅜ 그러나 논술에서는 사소한건 물어보지 않을 것 같으므로(비토리노, 에라스무스, 라블레, 비베스 이런거 물어보지는 않겠지? 종교개혁도 고타교육령, 메사추세츠교육령, 예수회 이런거 다 나오지는 않겠지?) 그냥 큰 줄기만 파악하고 넘어가야겠다.

일단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것과 동시에 기존의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수정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공통점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인문주의 교육은 엘리트 위주의 교육, 종교개혁은 서민도 생각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시작하면 될듯.(엄밀히 말하면 루터는 제후들의 편에 서면서도 종교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입장이지만 굳이 인문주의 교육과 대체적인 차이점을 도출하자면.)

1.르네상스기의 교육

(1)르네상스의 의미

르네상스운동은 15세기를 전후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나타난 것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을 통해 새로운 인간생활과 문화를 수립하려는 운동이다.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의 표현과 실현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본위주이 또는 인문주의에 있다.

(2)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

인문주의 교육은 중세의 스콜라주의 교육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교육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위해 고대 자유인들의 삶을 재발견하고 고전작품을 통해서 이루려고 했으며, 신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율성과 주도성을 가지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정리하면 ①인간주의 교육의 토대 형성 ②인문학 중심의 자유교육 ③이탈리아의 개인적 인문주의와 북유럽의 사회적 인문주의④키케로주의로의 변질이 일어났다.

 

(3)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의 특성

①인간중심주의 : 신 중심에서 벗어나고자 한 인문주의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인간 자신의 자아실현 가능성을 신뢰하고, 내세보다 현세의 삶을 찬미하엿다. 인간은 무한한 자유의 존재이고, 소우주라는 헬레니즘의 인간중심주의를 부활하려고 했다.

②전인교육의 이념 형성: 인간 자아의 존엄성과 그의 실현을 존중하는 인간중심주의가 인간교육으로 발아하기 시작하자, 인간의 지적 도덕적 정서적 능력의 조화로운 발달을 추구하는 전인교육의 이념이 형성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교육을 떠올리면 연관될듯)

③교육적 인간상: 지적 능력, 문학적 취향, 세련된 예법, 지도력, 공적 봉사능력 등을 갖춘 다재다능한 전인을 추구했다. 즉 고대 웅변가의 덕, 중세 기사의 덕 근세 시민의 덕을 갖춘 정치지도자를 교육받은 인간의 표상으로 생각.

 

(4)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교육의 유형

①개인적 인문주의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 지방에서 유행했던 교육유형. 예술과 교양활동을 통해 개인의 교양을 넓히는데 주 목적으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부한 인생을 사는 것이 목표.

이러한 유형의 인문주의는 엘리트 위주의 교육으로 이탈리아의 궁정학교, 프랑스의 콜레와 리세, 영국의 퍼블릭스쿨, 독일의 김나지움 등이 있다.

 

②사회적 인문주의

북유럽 지방으로 전개된 인문주의는 네덜란드에서 성립한 공동생활포교단의 사회적 신앙과 결합하면서 종교적 사회적 경향을 띠었다. 개인적 인문주의보다 사회적인 경향을 띠어 적극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종교적 경향은 고전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이해도 강조하는 등 르네상스의 주된 경향하고 완전히 일치되지 않는 경향도 보인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③키케로주의(언어적 인문주의, 형식적 인문주의, 구술주의 등등으로도 불린다)

형식적 인문주의인 키케로주의는 문학이 가질 수 있는 인간적인 가치는 도외시한 문법이나 문체를 공부하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일인 것처럼 착각하여 키케로 문체를 흉내내는 것을 교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고전의 언어와 문법을 익히고 ,고전의 문장을 암기하는 형태의 언어교육은 19세기 초반까지 서양교육을 지배했다. 키케로주의에 대한 반발은 17세기 실학주의를 불러오기도 했다.

 

(5)르네상스 인문주의 교육의 한계

①귀족중심 교육 : 인문주의 시대의 교육의 기본은 재력이었다. 재력이 없으면 교육의 기회가 어려웠기 때문에 인문주의 교육은 대중교육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교육이 사회 지배층에게 필요한 능력함양수단으로 전락했다.

②형식적 언어교육 : 키케로주의는 인간교육을 기계적, 획일적 인간 조형으로 흘러가게 하고 교육내용도 편협하게 하며 교육방법도 암기로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종교개혁과 교육

(1)종교개혁의 성격

①신앙해방 : 종교개혁은 중세의 형식적 교권주의에서 벗어나 성서에 의해서 복음을 가질 수 있따는 신앙해방운동이다.

②종교적 자유주의: 구원이 교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잇따는 타율주의가 아닌 성서를 통해(활판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널리 퍼져 성서를 통한 직접 구원) 하나님과 직접 교섭하겠다는 종교적 자유주의 였다.(성직자나 의식의 중계가 필요없다는 신비주의적 신앙)

③교권개혁운동:세속적이된 교회와 타락한 성직자들의 부패를 개혁하겠다는 운동의 성격

 

 

(2)신교의 종교관

①신비주의: 종교개혁 운동은 종교의식과 교회 및 성직자의 권위를 중시하는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에서 탈피해 성서와 직접 접촉해 신과 인간의 직접적 교섭이 가능하다고 했다.

②현세인정: 영혼구원이 최상의 목적이지만 이와달리 현세를 인정해 근면검소한 생활을 해야 된다고 했다.(칼뱅의 예정설과 프로테스탄티즘적 윤리)

③금욕방법: 금욕 대신에 일과 근면을 제시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기도.(엄밀히 말하면 이념적으로 정당화 한것이겠지)

 

 

(3)신교의 교육관

①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 강조: 국가, 사회, 교회를 위해 종교적 도덕적 품성을 기르는 교육은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 사회의 책임으로 여기게 되었다.

②보편적 의무교육: 종교개혁가들은 교육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영혼구원을 얻게 하는 수단이므로 계급과 성에 관계없이 보편적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근대 공교육 제도 성립에 토대가 됨 (독일의 고타 교육령, 미국의 메사추세츠 교육령)

 

(4)종교개혁이 교육에 미친 영향

①교육은 올바른 신앙을 통해 영혼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누구나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대중교육운동을 전개했다.

②신교는 종교교과뿐만 아니라 직업과 생활에 필요한 세속교과도 인정하였기 때문에 종교와 생활이 조화된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③개인의 신앙과 자유에 대한 존중은 피교육자를 존중하는 풍토를 조성했다.

④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고 존중했기 때문에 여성교육과 아동교육에 필요한 여교사의 양성을 권고했고, 가정교육을 중시했으며, 어머니의 교육적 지위도 향상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인권이 그렇게 올라간 것은 아님)

⑤교육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책임을 강조해 모든 지역에서 학교체제가 생겨났다. 또한 학교교육의 조직적 구성에도 영향을 미침(칼이 설립한 학교는 학년별 학급조직을 가지기도)

 

(5)신교와 구교의 교육활동

신교와 구교는 나름대로의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종교개혁기에는 기존 형식주의에서 경시되었던 라틴어교육 중심의 중등학교와 서민을 위한 모국어 학교로 나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이러한 신교의 교육적 경향에 대항해 내부 개혁 운동을 통해 트렌트공의회를 통해 본격적을 개혁이 일어났다. 그 전에 로욜라가 1534년 파리에서 예수회를 창립해 엄격한 군대식 교육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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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런닝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