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五年夏六月 遣使入唐賀正 仍附表陳謝 曰 伏奉恩勑 賜浿江以南地境 臣生居海裔 沐化聖朝 雖丹素爲心 而功無可効 以忠貞爲事 而勞不足賞 陛下降雨露之恩 發日月之詔 錫臣土境 廣臣邑居 遂使墾闢有期 農桑得所 臣奉絲綸之旨 荷榮寵之深粉骨麋 身無由上荅 , (성덕왕 35년)
遣阿湌 貞節 䓁檢察北邉始置大谷城等十四郡縣 ( 경덕왕 7년)
二十一年夏五月築五谷鵂巖漢城獐塞池城徳谷六城各置太守 (경덕왕 21년)
『삼국사기』,[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해석:
1) 성덕왕 35년 여름 6월 사신을 당에 파견해 새해 인사를 올리고 표를 올려 사례해 말하길 엎드려 패강이남지역땅을 하사한다는 은혜로운 칙서를 받듭니다 신은 바다건너 변방에 살며 성조를 입었으나 비록 충성된 마음을 먹기는 하였으나 본받을만한 공적은 없었으며 충절로 일을 삼았으나 항상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폐하의 우로같은 은덕을 받고 일월의 조를 발해 신의 영토에 새기고 넓은 고을에 살게 되었으니 간벽할 시간을 따르게 되었고, 농상할수 있는 장소를 얻었습니다. 신은 명령을 받드니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2)아찬 정절등으로 하여금 북쪽 변방을 검찰하고 대곡성등 십사군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3)21년여름5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 여섯 성을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1번은 성덕왕대에 당나라와 발해말갈정벌에 나섰을때 별 소득이 없었지만 당에서 그에 대한 대가로 패강 이남의 땅을 사사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를 올린 상황을 서술했다. 패강은 지금의 대동강이다. (후에 패강진이 개성부근을 말하는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고 삼국유사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1
1)성덕왕(제위 702~737)과 그의 치적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형인 효소왕과 어머니가 같다. 즉위시 효소왕이 아들이 없어 화백회의에서 회의를 거쳐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대는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중대 왕권강화의 흐름에서 가장 최정점에 올라있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강력해진 왕권을 기반으로 많은 정책을 실시했다.
신라 중대에는 집사부의 기능이 강화되어 중시(경덕왕대 시중으로 변경됨)의 권력이 높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대등의 제도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단지 중대에는 상대등이 왕권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중대의 왕권은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덕왕 제위기에는 활발한 대외 관계활동이 두드러진다. 제위기간중 46회의 견당사를 보냈으며 중국에 많은 유학생을 보냈으며, 732년 발해의 등주 침입으로 이은 733년 발해 원정에 참여함으로써 당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반대로 일본과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735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 왕성국이라 칭하며 높아진 자존감을 나타냈으며, 이에 일본은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원정론까지 나오게 된다.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호국불교적인 입장을 취했다. 성덕왕은 전광대왕이라는 불교식 왕명을 가진 중대의 유일한 왕이었다. 봉덕사를 건립해 무열왕을 추복하고 왕실의 안녕을 기했다.
또한 유교적 예제의 정비와 국가불교도 고취하였다. 717년 당에서 귀국한 김수충(金守忠)이 공자 이하 10철과 72제자의 도상을 가져오자 왕은 이를 국학에 안치토록 조치하였다. 또한 718년에는 누각전(漏刻典)을 설치하였고, 721년에는 내성 기구 속에 소내학생(所內學生)을 두어 장차 문한계통에서 종사할 요원 양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제도정비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교적 예의에 입각하여 각종 예제를 정비한 것이다. 유교사상과 의례를 강화함으로써 가까스로 확보한 평화를 지켜나가고자 하였다.
2)신라의 지방통치제도
(1)통일 이전
초기엔 왕경을 6부(급량, 사량, 본피 모량, 한시?, 습비?)로 편제한것이며 이는 종래 부족적 전통을 행정적 조직으로 개편한 것으로 지방제도를 정비했다. 왕경인은 17관등의 경위를 보유했다. 이 시기까지는 족제적 전통이 남아 있었으며 지방외위와 경위가 구별되었다. 지방의 촌주 등은 외위를 갖게 되는 것. 또한 지방에 소경과 주 군 촌의 제도를 설치 실시했다.
①소경
소경은 왕경을 모방한 지방의 특수행정구역으로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의 성격이 강하였다. 소경의 장관을 사신(사대등)이라 불렀다. 소경은 514년(지증왕15)에 아호촌에 처음 설치하고, 557년(진흥왕 18)년 국원에, 639년(선덕여왕 8) 하슬라에 설치했다.
②주
주의 장관은 군주라 칭했고 주치도 군략상의 필요에 따라 이동해 신라의 주가 행정구획보다는 군사적 성격을 띠었음을 알 수 있다.
주는 505년(지증왕6)에 처음으로 실직주를 두었고 진흥왕대까지(540~576) 사벌주, 신주, 비사벌주, 비례홀주를 합하여 5주가 성립 되었다.
③군
주 밑에 위치한 행정구역으로 당주가 파견되었다.
④촌(성)
군 밑에 속한 행정구역으로 도사가 파견되었다. 군과 촌도 군사적 성격이 강한 행정구역이다.
2)통일 이후의 지방행정의 정비
그림 9주 5소경 - 출처 7차교육과정 국사교과서
685년(신문왕5)에 9주 5소경의 지방제도를 마련했다. - 이는 통일전 신라의 5주를 바탕으로 백제와 가야지역에 4주를 설치하여 9주로 만들고, 새로 편입된 고구려의 옛 땅을 북방의 주에 포함시킨 것.
통일전 국원소경, 북원소경, 금관소경 설치되었으나 신문왕대 서원소경, 남원소경이 설치되었고 경덕왕때 국원소경이 중원소경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수도인 경주가 지방에 치우쳐 있음을 보완하고 지방세력을 감시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소경에는 사민정책을 실시해 귀족들을 이주시켜 살게했다. 신라의 5소경은 행정구획의 의미보다 정치적 또는 문화적 필요에 의해 설치된 것이다.
주의 장관은 661년(문무왕1) 군주에서 총관으로 고쳐지고 785년(원성왕1)에 다시 도독으로 개칭되는데 당제를 모방해 종래의 군사적인 성격에서 민정장관의 성격으로 바뀐 것이다.
주 밑에 군과 현을 설치했는데(성덕왕) 통일전의 군과 촌을 개편한 것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120군 350현으로 나왔다. 군의 장관으로 태수가 임명되고 현에는 현령과 소수가 있었으며, 주와 군에 감찰의 임무를 가진 외사정이 설치되었다.
주군현에는 토착인으로 리를 임명해 외관을 보좌하도록 했는데 토착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그들을 상경시켜 관부의 일을 보게 하는 상수리제도를 마련했다.
주군현 밑에는 촌이라는 행정구역이 잇었는데 자연촌과 행정촌이 있었다. 행정촌은 지방의 토착인 유력자를 촌주로 삼아 자치케 했는데 이들은 현령의 통제를 받았다
특수 행정조직으로 부곡이 있는데 소국의 정복과정에서 이루어진 피정복자 집단이나 전쟁포로의 집단거주지를 의미한다. 주민은 천민이다.
- 이때 발해는 제2대 무왕(719~727)의 집권 시기로 활발한 대외 진출을 시도했던 시기였다. 당이 흑수부말갈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장사라는 관리를 보내 통치하려 하자 무왕은 장문휴로 하여금 산동성 등주를 공격해 등주자사를 죽였다(732), 이때 당은 신라와 발해를 공격했지만 추위와 눈으로 소득 없이 물러났다(73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