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문사료

사료에서 나타나는 고조선의 여러 모습

런닝보이 2013. 4. 19.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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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倹立都阿斯逹 經云無葉山, 亦云白岳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髙[각주:1]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庻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即太伯, 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願化爲人. 時神遺霊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㛰之, 孕生子號曰壇君王倹. 以唐髙即位五十年庚寅 唐堯即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亰,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逹,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旀逹,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即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亰, 後還隠於阿斯逹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歳.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真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三國遺事』卷1, 「紀異」1 古朝鮮 王儉朝鮮

 

 

 

-삼국유사 권1 기이 고조선 왕검조선에 내용. 흔히 알고있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신하들과 지상으로 내려와 호랑이와 곰을 만나고 곰이 인간이 되서 결혼해 단군왕검을 낳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위서와 배구전에 수록된 내용을 인용하면서 주석을 달고 있는데 한서에 나온 4군과 배구전에 나온 3군. 그리고 주나라에서 기자가 와서 조선을 통치했다는 설을 의심하고 있다.[각주:2]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삼국지 권 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서 기술한 고조선의 모습. 고조선이 주나라가 쇠할 쯤에 넘어온 기자의 후예라는 기자조선설을 주장하지만 위지선비동이와 같이 타자로 취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중국은 자국과 다른 영역으로 고조선을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을 중국의 동북공정이 이용해먹는 것도 알수 있다. 조선이 기자의 후예라는 것, 그리고 주 왕실을 존중하려 했던것.

그리고 연나라와 대립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세력이 강하였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때 대부라는 관직명으로 보아 고조선에도 관직 체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의 영역이 새롭게 개편되는데 (어떤 경로인지는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점점 쇠퇴했다고 하는게 정설. BC4세기경. 사기에 따르면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한 것은 연나라 소왕때인데 이때가 BC4세기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인해 한반도의 청동기문화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서북지역에는 세죽리- 연화보 문화권, 한반도 내에서는 세형동검문화권이라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권이  형성된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도 몇가지 알 수 있는데 연개의 침입으로 2000리를 뺏겼다는 것을 보아 영토가 상당히 넓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만번한은 보통 지금의 평북 박천군 일대를 이야기 하는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영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1. 재 요녕설. 2.재 평양설. 3. 중심지 이동설이다. 현재는 중심지 이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고조선이 멸망했을 때 낙랑군 조선현이 설치된 곳은 지금의 평양 근처이다. (BC108) 그러므로 멸망 전까지의 중심지는 자연 평양 근처가 된다. 그러나 세형동검 문화권에 상한연도에 대한 분석(최대로 올려잡아도 기원전3~4세기), BC4세기 진개의 침략 이전에 영토와 관련지으면(고조선이 연의 침입에 패해 이동한것과 청동기문화의 상한연대가 겹침)만약 중심지가 그전까지 평양이 성립하기 곤란하다. 따라서 평양은 기원전 3세기 정도부터 중심지였으며 그 이전에는 요하 하류의 해성 개주 지역으로 상정되는 지역에 중심지가 위치했다고 하는 것이다.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

……(中略)……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收中國亡命.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위만의 조선 이동에 대해서 기록한 사료이다. 사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교과서마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사료를 수록했다.  부왕이 죽고 준왕이 즉위하고 전국시대가 끝날 무렵 혼란기에 위만이 고조선으로 넘어온다. 그때 호복과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또한 위만정권에 토착민이 많이 등용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위만조선도 중원왕조와 뚜렷하게 다르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樂浪朝鮮民犯禁八條, ……(中略)……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中略)……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燕郡

 

 8조금법에 대한 사료.  한사군 설치 이후의 시점이라 낙랑조선이라 표현한듯 하다.  8조중에 3조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 살인한 자는 즉시 죽인다. 2.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갚는다. 3. 도둑질한자는 노비로 삼는다. 만약 벗어나고 싶으면 1인당 50만을 내야 한다. 비록 내도 수치스러워 결혼할 짝을 취하기 어려웠다.

이를 보아 이 시기의 고조선 사회가 철기문화의 발달로 생산력이 높았으며, 농업 중심의 사회라 노동력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살인, 상해 엄금) 사유재산이 있었으며, 노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정도 노예제가 존재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적으로 신분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일부 사회분화가 된 분위기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적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 降其旁小邑, 眞番‧臨屯 ……(中略)…… 皆來服屬, 方數千里.

……(中略)……

傳子至孫右渠, ……(中略)……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 ……(中略)…… 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中略)…… 朝鮮裨王長, ……(中略)…… 卽渡 , 馳入塞. ……(中略)…… 遂歸報天子曰, 殺朝鮮將, 上爲其名美, ……(中略)…… 卽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中略)……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 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中略)……

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 ……(中略)…… 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幷, 將戰益急. 恐不能與(戰), 王又不肯降. 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 ……(中略)…… 相路人之子最 ……(中略)…… 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下略)……

『史記』卷115, 「朝鮮列傳」55

 

 

위만조선의 전개부터 고조선의 멸망까지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사기는 중국(한나라)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므로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사료의 내적 비판이 필요하다. 처음 읽었을때 왜 위만이 한나라의 외신인지 에서 응? 하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아. 사기는 한나라의 입장에서 쓴 것이지 라고 뒤늦게 떠올랐다. 이때 외신은 후의 조공책봉 관계와 비슷하게 생각해도 될듯.(표적사례, 기반사례.ㅋㅋㅋ) 한나라의 외신이라고 하지만 정치적 군사적 독자성이 확보되었음으로 보아 어느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갖췄다고 봐야 한다. 또한 고조선이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취하고 한나라의 무역을 방해하자 무제의 정벌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자국과는 한나라와는 다른 국가였다고 생각하는게 맞다. 한의 침략에 1년 넘게 항거했으나 왕검성이 함락되었으며, 한사군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있다.

 

 

  1. 고는 중국의 요임금의 이름을 의미한다. 즉 요임금과 같은 때. [본문으로]
  2. 이때의 명칭을 흐름에 따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보통 부정된다. 그 근거는 1. 문헌상으로 한나라 초 복생의 상서대전에서 처음 그러한 기술이 보이고, 이전 기록에는 일체 언급이 없다. 게다가 기자의 묘가 하남성이나 산동성 등지에 있었다는 기록도 보임. 2. 상황론적으로 황하중류와 고조선 사이가 왕래가 쉽지 않은 점. 3. 고고학적으로 고조선등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황하문화의 청동기와 뚜렷한 차이가 난다는 점. 즉 양 문화권의 청동기문화가 상관성이 떨어지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기자조선설을 통해 한4군과 결부시켜 동북공정으로 정리하고 있다. , -한국사특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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